친구를 위한 기도
- 박인희
주여
쓸데없이
남의 얘기하지 않게 하소서
친구의 아픔을
붕대로 싸매어 주지는 못할 망정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척
남에게까지
옮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어 하는 사람
주어진 일을 묵묵히 하면서도
속으론 철철 피를 흘리는 사람
떠날 수도 머물 수도 없는 사람
차마 울 수도 없는 사람
모든 것을 잊고 싶어하는 사람
사람에겐
그 어느 누구에게도
가슴 속 얘기
털어내 놓지 못하는 사람
가엾은 사람
어디하나 성한데 없이
찢기 운 상처에
저마다 두 팔 벌려
위로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우리는
말에서 뿜어 나오는 독으로
남을 찌르지 않게 하소서
움추리고 기죽어
행여 남이 알까 두려워
떨고 있는
친구의 아픈 심장에
한 번 더
화살을 당기지 않게 하여 주소서
- 김율도 엮음 기도시집 <기도하면 열리리라>(율도국, 2010)
* 감상 : 박인희. 1945년에 태어났습니다. 가수이며 작곡가, 작사가, 방송인으로 소개되고 있는 그녀는 70년대 대표적인 통기타 가수 중 하나로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차분하고 청아한 음색의 소유자로 히트곡으로는 <방랑자> <모닥불>, <목마와 숙녀> <세월이 가면> <끝이 없는 길> <하얀 조가비> <그리운 사람끼리> 등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수녀 이해인 시인과는 풍문여자중학교 재학 시절 동기 동창 절친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71년 숙명여자대학교 불문과에 재학 중 혼성 뚜엣 ‘뚜아에모아(너와 나)’의 멤버로 발표한 ‘약속’으로 가수에 데뷔했고 그 해 가을 TBC 가요대상 중창단 부문에서 대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그 후 오랫동안 대학 시절, 교내 방송국 방송국장을 지낸 경험을 살려 방송 프로그램의 진행을 하면서 방송인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1981년, 가수 활동을 접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한인 방송국장으로서 일하면서 살았는데 지금 아들이 미국에서 변호사로 활동 중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연예계를 떠나고서는 언론에 노출되기를 싫어하여 현재 알려진 근황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가 지난 2016년, 근 35년 만에 한국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한참이 지나도 자신을 기억해주는 팬이 있다는 것에 놀랐다고 말하는 그녀는 그 해 송창식과 함께 컴백 콘서트를 열기도 했습니다.
글쓰기를 좋아하여 숙명여대 3학년 재학 중 지은 <얼굴>이 사람들에게 회자되어 <한국의 명시집>에 수록되기도 하였으며, <지구의 끝에 있더라도>(청맥, 1994), <소망의 강가로>(청맥, 1989) 등의 시집을 내기도 했습니다. 이해인 수녀와 함께 수필집도 한 권 냈습니다.
가수 박인희와 수녀 시인 이해인은 두터운 우정으로 유명합니다. 그들의 우정은 보통사람과 달리 주로 편지로써 서로의 생각과 우정을 교환하는 좀 특이한 관계였는데, 이해인이 수녀가 된 뒤에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정작 학교에선 말 한마디 주고받지 않다가 집에 가서야 서로 편지를 끊임없이 써댔다고 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시도 박인희가 이해인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두 사람의 우정이 남다르게 무르익은 건 사실이지만 둘 다 안으로 곰삭이면서 글로 깊은 교류가 이루어지다 보니 더러는 보통사람이 상상하지 못하는 내적 갈등이 있기도 했을 것입니다.
몇 주 전 이해인 수녀의 시를 소개하면서 언급했던 ‘말’과 관련된 그 녀의 에피소드를 다시 한번 언급해야겠습니다. 이해인 수녀가 고등학교 다닐 때 백일장에서 1등을 했는데 어떤 친구가 “글 잘 쓰는 애가 오죽 없으면 네가 1등을 했느냐?”고 한 말이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말끔히 가시지 않을 정도로 말에 의한 상처는 오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박인희의 이 시가 이해인 수녀를 생각하면서 쓴 글은 아닐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해인 수녀가 친구의 말로 상처를 받아 괴로워할 때 대신 울어주는 마음으로 쓴 시일수도 있고 어쩌면 자신이 다른 친구에게 받은 상처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몇 년 전, 교황청의 임직원들에게 교황이 성탄절에 얘기했던 따끔한 꾸지람이 회자된 적이 있습니다. 그 기사를 전하는 뉴스는, 성탄절에 거룩한 설교를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걸 대신하여 소위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동료 사제들을 향해서 교황은 질책 겸 따끔한 반성의 메시지를 남겼다고 전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지금까지도 제 마음 속에서 잊혀지지 않는 한 항목이 있습니다. '가십(Gossip)을 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남녀노소 모여 앉기만 하면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 나의 삶과는 전혀 상관없는 주제의 다른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은근히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기를 좋아합니다. 바로 이런 대화가 가십입니다. 세 명이 함께 이야기하다가 한 사람이 그 자리를 뜨면, 남은 두 사람이 자리를 뜬 사람의 험담을 하기 때문에 다 같이 자리를 뜰 때까지 소변 누는 것도 참아야 했다는 웃지못할 딱한 사정을 토로하는 사람을 만난 적도 있습니다. 심지어 어떤 목사는 설교 단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고 전하는 데 시간을 할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랑, 정치 이야기, 성도들과 상담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마치 무용담 늘어놓듯이 술술 이야기하는 이도 있습니다.
친구들을 위해서 봉사해야 하는 동창회 회장과 총무 등 앞에서 수고하는 친구들을 뒷담화하면서 왕따시키고, 그들이 진행하는 행사에 보이콧을 하자고 무리를 지어 당을 짓는 모습도 이와 다를 바가 없는 유치한 행동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말에서 나오는 독으로 남을 찌르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시인 박인희만의 기도가 아닙니다. 친구의 아픈 심장에 한 번 더 화살을 당기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남의 말 하기‘입니다. 친구의 내밀한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지도 못하면서, 마치 누구보다도 많이 아는 것처럼 남에게, 그 이야기를 옮기는 것은 철철 피를 흘리게 만드는 일입니다.
이해인 수녀의 ’말을 위한 기도‘라는 시 한 편을 읽으면서 오늘 감상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이 시를 읽으면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말을 사용해야 하는 지에 대한 깨달음을 줍니다. 이 가을에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은총 속에 이어가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말을 위한 기도
- 이해인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수없이 뿌려놓은 말의 씨들이
어디서 어떻게 열매를 맺었을까 조용히 헤아려 볼 때가 있습니다
무심코 뿌린 말의 씨라도 그 어디선가 뿌리를 내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왠지 두렵습니다
좋은 열매로 또는 언짢은 열매를 맺기도 했을 언어의 나무
내가 지닌 언어의 나무에도 멀고 가까운 이웃들이 주고 간
크고 작은 말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둥근 것, 모난 것 밝은 것, 어두운 것 향기로운 것, 반짝이는 것
그 주인의 얼굴은 잊었어도 말은 죽지 않고 살아서 나와 함께 머뭅니다
살아있는 동안 내가 할 말은 참 많은 것도 같고, 적은 것도 같고-
그러나 말이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세상살이
매일매일 돌처럼 차고 단단한 결심을 해도 슬기로운 말의 주인 되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날마다 내가 말을 하고 살도록 허락하신 주여
하나의 말을 잘 탄생시키기 위하여 먼저 잘 침묵하는 지혜를 깨우치게 하소서
헤프지 않으면서 풍부하고 경박하지 않으면서 유쾌하고
과장하지 않으면서 품위 있는 한마디의 말을 위해
때로는 진통 겪는 어둠의 순간을 이겨내게 하소서
참으로 아름다운 언어의 집을 짓기 위해 언제나 기도하는 마음으로
도를 닦는 마음으로 말을 하게 하소서 언제나 진실하고
언제나 때에 맞고 언제나 책임 있는 말을 갈고 닦게 하소서
내가 이웃에게 말을 할 때에는 하찮은 농담이라도
함부로 지껄이지 않게 도와주시어 좀 더 겸허하고
좀 더 인내롭고 좀 더 분별있는 사랑의 말을 하게 하소서
내가 어려서부터 말로 저지른 모든 잘못
특히 사랑을 거스린 비방과 오해의 말들을 경솔과 속단과 편견과 위선의 말들을
주여, 용서하소서
나날이 새로운 마음, 깨어있는 마음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내 언어의
집을 짓게 하시어 해처럼 환히 빛나는 삶을 노래처럼 즐거운 삶을
당신의 은총 속에 이어가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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