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단추를 채우면서 / 직소폭포에 들다 - 천양희

석전碩田,제임스 2019. 9. 4. 06:41

단추를 채우면서   

 

- 천양희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세상이 잘 채워지지 않는다는 걸  

단추를 채우는 일이  

단추만의 일이 아니라는 걸  

단추를 채워 보니 알겠다   

잘못 채운 첫 단추, 첫 연애, 첫 결혼, 첫 실패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절하는 밤  

잘못 채운 단추가   

잘못을 깨운다  

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매달린 단추의 구멍 찾기 같은 것이야  

단추를 채워보니 알겠다  

단추도 잘못 채워지기 쉽다는 걸  

옷 한 벌 입기도 힘든다는 걸 

 

- 시집 <오래된 골목>(창작과비평사,1998)  

 

* 감상 : 천양희 시인.

19421월 부산 사상에서 태어나서 경남여중고, 이화여대 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65년 대학 3학년일 때 당시 연세대 교수였던 박두진 시인이 발행하던 당시 유일한 문예지 <현대문학> 추천으로 '庭園 한때', '아침', '和音'을 발표하면서 등단하였습니다. 이 인연으로 박두진 교수의 제자였던 시인 정현종과 만나 결혼하고 아들까지 낳았으나, 1973년 결혼 5년 만에 정현종 시인이 아무 말없이 이효석의 딸(현재의 부인)과 딴 살림을 차리면서 이혼하였습니다. 1983년 첫 시집 <신이 우리에게 묻는다면>(평민사)을 냈고 그 후 발간된 그녀의 시집은, <사람 그리운 도시>(나남 출판사, 1988), <하루치의 희망>(청하, 1992), <마음의 수수밭>(창작과 비평사, 1994), <오래된 골목>(창작과 비평, 1998), <너무 많은 입>(창비시전, 2005), <나는 가끔 우두커니가 된다>(창작과 비평, 2011), <벌새가 사는 법(육필시집)>(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2)<새벽에 생각하다>(문학과지성, 2017), 산문집 <시의 숲에 거닐다>, <직소폭포에 들다>, <나는 울지않는 바람이다> 외 다수가 있습니다.  

 

주 전에 정현종 시인의 방문객이라는 시를 소개했는데, 그 정현종 시인과 오늘 감상하는 이 작품의 천양희 시인이 부부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합니다. ‘단추를 채우면서1996년 제 10회 소월시문학상 수상자였던 천 시인의 수상 대표작이었습니다. 시인의 삶에 대한 회한이 묻어나는 이 시는, 다분히 개인적인 삶의 이야기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합니다. 1998년 어느 잡지사와 했던 인터뷰 기사를 보면, 이혼할 당시 그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고백입니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이라는 걸 하면서 나는 문학을 버렸다. 생활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문학을 버린 건 내가 나를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아무도 아무 것도 돌이킬 수 없었다. 삶이 이런 거라면.. 차라리…… 나는 문득, 죽을 생각으로 살아보자며 다시 일어섰다. 한 권의 시집은 커녕 방 한 칸도 없이, 나는 살기 위해 아침 일곱 시에서 밤 열한 시까지 일했다. 가게에서 자기도 하고 하숙을 하던 때도 있었다.’ 

    

쩔 수 없이 뛰어 든 생활 전선(이대 앞에서 조그만 의상실을 직접 운영)에서 그 이후 그녀가 겪어내야 했던 삶의 무게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잘못 채운 첫단추, 첫연애 첫결혼 첫실패'란 표현에서 시인의 쓰라린 심경이 읽혀집니다. 어느 해 겨울, 외출하려고 옷을 입다 첫 단추를 잘못 채웠을 뿐인데 옷 모양 전체가 망가져 버린 그 순간 마치 인생 전부가 흐트러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첫 단추의 실패가 마지막까지 이어지는 잘못 끼운 단추의 난감함이 이 시를 쓰게 했다고 시인은 시작 배경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보면 누구나 첫 단추를 잘 못 끼우는 것과 같은 실패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소중한 것은 잘 못 채워진 첫 단추에 갇혀 스스로 송두리째 모든 삶을 포기하는 선택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그 첫 단추 구멍까지 풀어 헤치고 다시 채우고자 결단하는 것입니다.  

 

안 내소사. 그 곳에서 30분쯤 걸어가 길이 끝나는 곳에 자리 잡은 직소폭포. 1979년 여름 서른일곱 나이에 삶이 버거워 그만 내려놓기 위해 찾았던 곳이었습니다. ‘천추의 큰 울음처럼우렁찬 폭포수 앞에서 폭포처럼 오열한 시인은 어디선가 들려오는 한마디, ‘너는 죽을 만큼 살아보았느냐는 말에 마음을 다잡고 시를 읊었습니다. 천 시인은 이 때의 심경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막다른 길에 다다르거나 길을 잃고 헤맬 때마다 삶을 주도하는 진짜 힘은 자신을 인정하는데서 시작된다고 생각하고 어려움을 극복했다  

 

렇게 천양희 시인을 다시 살아나게 한 직소 폭포에서의 깨달음은 그 후 하루치의 희망이라도 쓰자는 생각으로 자신만의 시 작업에 몰두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13년 후 그녀는 직소폭포에 들다 는 제목의 시와 산문집을 발표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에서, 시인이 깨달은 것그래, 그래 산다는 건, 옷에 달린 단추도 채우는 게 쉽지 않듯 은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습니다  

 

쯤에서 시인을 죽음의 막다른 골목에서 다시 살아나게 했던 깨달음이 무엇이었는지, 직소 폭포에 들다를 직접 읽으면서 함께 느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직소폭포에 들다  

 

- 천양희 

 

폭포소리가 산을 깨운다. 산꿩이 놀라 뛰어오르고  

솔방울이 툭, 떨어진다. 다람쥐가 꼬리를 쳐드는데 오솔길이 몰래 환해진다.  

! 귀에 익은 명창의 판소리 완창이로구나  

 

관음산 정상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정상이란 생각이 든다  

피안이 이렇게 가깝다  

백색 淨土(정토)! 나는 늘 꿈꾸어왔다  

 

무소유로 날아간 무소새들  

직소포의 하얀 물방울들, 환한 水宮(수궁).  

폭포소리가 계곡을 일으킨다. 천동소리 같은  

우레 같은 기립박수소리 같은 - 바위들이 흔들한다  

 

하늘이 바로 눈앞인데  

이곳이 무한천공이란 생각이 든다  

여기 와서 보니  

피안이 이렇게 좋다  

    

나는 다시 배운다  

絶唱(절창)의 한 대목, 그의 완창을  

 

- <마음의 수수밭>(창비, 1994)  

 

월이 흘러 상처가 아물자 그 자리에는 옹이가 생겼습니다. 이제는 '삶의 상처를 시로 승화시킨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라는 이름이 천양희 시인에게 주어진 타이틀이 되었습니다. 시인은 상처에 맞설 수 있는 힘이 일상의 사소한 것들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시, 그리고 감성적이고 진실한 시를 쓰는 시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합니다. 홀로 살아 온 삶 자체가 오로지 책을 읽고 시를 쓰는 수행의 과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이곳 저곳 몸이 성하지 않지만 아직도 시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소통할 수 있는 곳이라면 기꺼이 달려가는 그녀는, 어설픈 시어들로 치기(稚氣)를 부리는 시들을 호된 죽비로 서슴없이 내려칠 줄 아는 문단의 든든한 어른 역할을 자임하고 있기도 합니다.  

 

앞에서 수도자처럼 살아가는 그녀가 시를 대하는 자세가 엿보이는, 최근 어느 강연에서 했던 짧은 고백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국은 '단독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배워야 하는, 진지한 삶의 자세이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 석전(碩田)

 

새벽에 생각하니  

 

시여 고맙다  

네가 늦도록 나를 살렸구나  

너는 내 고단한 생각을 완성해주었다.  

저녁노을은 저물수록  

더 붉게 탄다는 말이  

오늘따라  

생각을 찢는 것이  

시의 마땅한 일이란 것을 절감하게 한다‘(천양희, 20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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