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8월의 눈사람 / 민박 - 권대웅

석전碩田,제임스 2019. 8. 14. 06:35

8월의 눈사람  

 

  - 권대웅  

 

여름내  

해바라기가 머물던 자리  

나팔꽃이 피었다 사라진 자리  

목이 쉬도록 살아 있다고  

매미가 울어대던 자리  

그 빈자리  

흔적도 없이 태양 아래 녹아버린  

8월의 눈사람들  

 

폭염 한낮  

밥 먹으러 나와 아스팔트 위를 걷다가  

후줄근 흘러내리는 땀에  

나도 녹아내리고 있구나  

문득 지구가 거대한 눈사람이라는 생각  

눈덩이가 뒹굴면서 만들어놓는  

빌딩들 저 눈사람들  

 

8월 염천(炎天)  

해바라기가 있던 자리  

화들짝 나팔꽃이 피던 자리  

내가 밥 먹던 자리  

돌아보면  

그 빈자리  

 

선뜻선뜻, 홀연, 가뭇없이  

 

-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문학동네, 2003)  

 

* 감상 : 권대웅

 

시인. 1962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198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양수리에서가 당선,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당나귀의 꿈>(민음사, 1993),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 때>(문학동네, 2003), <나는 누가 살다 간 여름일까>(문학동네, 2017))가 있고 산문집 <그리운 것은 모두 달에 있다>, <당신이 사는 달>, 장편동화 <돼지저금통 속의 부처님>, <마리이야기> 등이 있습니다  

 

 

을 소재로 달시를 쓰는 시인으로, 그리고 달 그림과 함께 시화전을 여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레 출판사에서 편집주간으로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광고 카피라이터, 불교방송국의 작가 등으로 잠시 외도(?)를 했지만 결국 마흔 중반에 독립, 도서출판 <마음의 숲> 대표가 되어 자연과 영성, 그리고 문학을 지향하는 내용의 책들, 말하자면 시인 자신을 닮은 책들을 발간하고 있습니다.  

 

단 이후 서정시를 주로 써 온 시인의 시답게 ‘8월의 눈사람을 읽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은 서러움의 감정이 묻어납니다. 시인의 다른 시들도 유난히 슬픔, 외로움, 눈물 등과 친숙한 시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아마도 시인은 달과 같은 외로움을 타고 난 듯 합니다  

 

‘8월의 염천(炎天)’ ‘폭염 한낮등과 같은 시어들이 포진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 시는 요즘과 같은 무더위가 절정에 달해 있을 때 쓴 시임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그 여름에 머물지 않고, 아무리 찌는듯한 더위가 절정에 달해도 다 지나가버리고 말 것들임을 이내 알아차리고 노래합니다. 그냥 노래하는 정도가 아니라 경쾌한 리듬감을 가지고 노래합니다. ‘....~자리가 반복되는 운율은 결국 빈자리로 귀결되고, 마지막 연의 그 빈자리까지 이어집니다. 그리고 선뜻선뜻, 홀연, 가뭇없이 그마저도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푹푹 찌는 듯한 더위에 초월하여 이 모든 것들이 지나가고 난 자리, 그 자리에 나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밥 먹던 자리, 그 자리도 돌아보면 홀연 8월의 눈 사람처럼 이내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가 시적 은유로 선택한 것은, ‘사라지는 것입니다. 찌는 듯한 더위, 맹위를 떨치는 8월의 폭염과 사라지는 것이 연결되는 지점이 바로 눈사람이라는 것은 시인이 가진 '이내 사라지고 말 어떤 특별한 경험'이겠지요  

    

은 시집에 실린 시를 덤으로 하나 더 소개합니다. ‘민박이라는 제목의 그의 시는 마치 불교의 선승이 정진하면서 묵상하는 묵상 글 같다는 느낌이 듭니다  

 

에게 있어 세상에서의 한때는 어수선하고 곧 어디론가 떠나야 하는 민박처럼 불안정한 것입니다. 이 시에서 그가 바라보는 세상과 ‘8월의 눈사람에서 바라 보는 세상은 눈덩이가 뒹굴면서 만들어 놓는것들이고 선뜻 녹아버릴 것들이라는 점에서 그 맥이 통하는 것 같습니다.  

 

민박  

 

- 권대웅   

 

반달만한 집과   

무릎만한 키의 굴뚝 아래   

쌀을 씻고 찌개를 끓이며   

이 세상에 여행 온 나는 지금   

민박 중입니다  

때로 슬픔이 밀려오면 바람소리려니 하고 창문을 닫고   

알 수 없는 쓸쓸함에 명치끝이 아파오면   

너무 많은 곳을 돌아다녀서 그러려니 생각하며   

낮은 천장의 불을 끕니다  

나뭇가지 사이에서 잠시 머물다 가는   

손톱만한 저 달과 별   

내 굴뚝과 지붕을 지나 또 어디로 가는지   

나뭇잎 같은 이불을 당기며   

오늘밤도 꿈속으로 민박하러 갑니다  

  

- 시집, <조금 쓸쓸했던 생의 한때>(문학동네, 2003)  

 

 추도 이미 지났고 말복도 지났습니다. ‘절대로 절기는 속이지 못한다는 속담이 있듯이 곧 찬바람이 불고 언제 그랬냐는 듯이 더위는 물러갈 것입니다. 그리고 간사하게도 우리의 입에서는 춥다는 말이 나올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더우면 더울수록 폭염 한낮과 염천이 차지하고 있는 그 곳은 더 홀연 빈자리로 덩그러니 남을 것입니다.  

 

뭇없이 없어 질 나뭇잎 같은 이불 당기며 오늘 밤도 시인과 같이 꿈속으로 민박하러 한번 떠나 볼까요?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