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려니
- 류영구
그러려니 지내려니
궂은 장맛비가 구질구질
전봇대 광고 위에 내리고
늙은 황소처럼 늘어진 마음속에도 내린다
줄줄이 흐르던 등허리 땀
조금은 가셔 시원하다마는
몹쓸 놈, TV에서 울려오는 뉴스 짓거리는
흐느적거리는 혈관에 기름을 붓고
5톤 트럭 수박장수의 비 맞은 숨찬 마이크 소리
바쁘게 돌아가는 도시의 소음
혈관 깊숙이 가시관 하나 더 만들어 놓았다
눈감고 귀 막고 입 닫은
슬픈 조선 며느리의 나직한 눈물이
앞집 담장이덩굴 촉촉한 잎새로 스며든다
그러려니 지내려니 종일 장맛비 내린다
- 시집 <내시경>(2009, 엠아이지)
* 감상 : 류영구 시인. 1943년 부산에서 태어났으며 경북 상주가 고향입니다. 경북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중고등학교 교사로 평생 근무하다가 지난 2006년 2월 대구공고를 마지막으로 정년퇴임을 했습니다. 개신 교회의 장로로 돈독한 신앙 안에서 문학의 길을 걸어 온 이력도 눈여겨 볼 만합니다. <한울문학>과 <문학저널> 시부문 신인상을 수상함으로써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내시경>(2009, 엠아이지), <영혼속에 젖어드는 그대>(3인 시집), <도래샘>, <침묵속의 메아리>, <하늘빛 풍경>, <꽃을 심다>, 그리고 공저 <재래시장 풍경> 등이 있습니다.
그의 시집 <내시경>이 출판되었을 지난 2009년 당시, 어느 신문에 실린 서평 기사입니다. 이 짧은 기사 한 줄이 그의 시 세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듯 합니다.
‘이번 시집에 묶인 시들은 ‘내시경’을 통해 몸속 병을 진단하듯, 사회 문제들을 바라본다. 내시경이라는 제목으로 36편을 연작으로 묶었는데 낱낱의 일상에 대해, 그리운 사람에 대해, 미워한 사람에 대해, 속죄할 사람과 용서해야 할 사람에 대해 쓰고 있다. 그래서 시인은 때로는 걱정스러운 얼굴, 때로는 화난 얼굴, 때로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다. 시가 사회성을 반영해야 하는지, 안 해도 되는지 알 수 없다. 사회성을 반영하는 시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역시 알 수 없다. 어쨌거나 간에 시인 류영구는 ‘세월’과 이른바 동행하는 사람이고, 만나고 헤어진 사람들에 대해 쓰고 있다. 그래서 그는 때때로 비명을 지르고, 악을 쓰고, 절규하고, 하하하 큰소리로 웃기도 한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구질 구질 장맛비가 계속되고 등허리에 땀이 나는 요즘 같은 더운 날, 가만히 있어도 축축 쳐지는 때, 그저 세상 돌아가는 것에 별 관심없이 지내려고 하는데도 눈에 띄고 또 귀에 들리는 열불 나는 뉴스 때문에 혈관에 기름을 붓는 것처럼 화가 나는 세태를 꼬집는 시입니다. 세월은 흐르고 정권도 바뀌었다고 하지만, 아마도 이 시가 씌여진 2009년 경의 상황과 작금의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을 듯 합니다.
국무총리, 대법관, 장관, 검찰총장 등 국회의 인사청문회가 필요한 고위공직에 후보라고 내세운 사람들이 하나같이 투기에, 위장 전입에, 탈세에, 자녀의 이중 국적에, 병역기피에 이르기까지 평범한 국민들은 도무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윤리적 도덕적인 문제들로 범벅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흠결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겠지만 한 사회의 지도자급에서 일할 사람이 이렇게도 없나 하는 자조적인 한숨이 나옵니다.
바로 이런 마음으로 이 시를 읽어야 제대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5톤 트럭 수박장수’ 기봉이 아버지는 신호위반 걸렸을 때 그 벌금 물면 하루 벌이 다 날아간다고 좀 싼 걸 요구했다가 얄짤 없이 다 끊기고, 노상에서 부도난 양말 공장 물건 떼어 팔다가 쫓겨 다니는 순실 엄마는 ‘슬픈 조선 며느리의 나직한 눈물’을 흘리며 읍소해 봐도 소용없었건만, 그 시간 고위공직자 후보로 나선 사람들은 하나같이 법을 조롱하듯이 온갖 추악한 일들을 꾸미며 수 백 억 볼로소득(不勞所得)을 챙기고, 출세 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회입니다.
오래 전부터 '5톤 트럭 수박 장수 이야기'는 가끔씩 좌중을 웃기곤 했던 저의 18번 '옛날 아재 개그' 레파토리 중의 하나였습니다.
어느 날 힘겨운 지방 장사를 끝내고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 기봉이 아버지. 그런데 어느새 경찰 순찰차가 따라 붙더니 저만치 갓길에 정차하라고 신호합니다. 과속 위반 단속에 걸린 것입니다.5 천 원짜리 곱게 접어서 면허증과 같이 보이면, 5천원은 쓱 챙기고 거수 경례하고 사라지던 그들. 그 날도 대수롭지 않게 그렇게 하려고 지갑을 열었더니 5천원 짜리 지폐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원짜리 곱게 접어 면허증을 보여줬습니다. 5 천원은 당연히 거슬러 줄거라고 생각하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경찰 보소! 면허증만 되돌려 주고는 깎듯이 경례하고 그냥 출발해서 가버리는 게 아닌가. 돈 아끼려고 점심도 거르고 모은 피 같은 돈인데, 기가막힌 기봉이 아버지 경찰차를 급히 따라가며 골목에서 방송하던 큰 스피커 볼륨을 높혀 방송합니다.
‘앞에 가는 백차 5천원 돌려주세요! 앞에 가는 백차 5천원 돌려주세요!.....’
고속도로가 떠나갈 정도로 시끄럽게 울려 퍼지는 소리가 심지어 반대편 차선에서 달리는 차량에서도 들릴만큼 큽니다. 어쩔 수 없이 앞서 가던 순찰차가 멈추었습니다.
‘옳거니, 이제 5천원 돌려 받는구나’ 싶어 뒤따라 정차했더니, 경찰관이 화난 표정으로 다가와서, 5천원이 아닌 아까 그 만 원짜리 지폐를, 그대로 휙 집어 던지고는 재빨리 가버립니다.
5 천원만 돌려달라고 했는데 만원 전부를 다 도로 돌려 받으니 기봉이 아버지 미안하기도 하고 또 이건 아니다 싶어, 따라가면서 또 방송을 시작합니다.
‘앞에 가는 백차, 5 천원 받아가세요! 앞에 가는 백차 5 천원 받아가세요!...........’
지금이야, 개그 속의 상황과 같은 일이 벌어지면 돈을 준 사람이 더 크게 처벌을 받기 때문에 완전히 사라진 광경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가끔씩 고속도로를 운전하는 일이 있으면 이 개그 속의 그 기봉이 아버지 비 맞은 숨찬 마이크 소리가 제 귀에 들려오곤 합니다. 그러려니 하고 지내려 하지만 정치인들의 싸움박질 하는 뉴스나 공직자들의 비리 소식, 그리고 지금도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모습으로 진행되는 청문회 뉴스가 들리면 '그 소리가' 어김없이 생각이 나는 거지요.
올해 장맛비는 이제 거의 다 끝난 거 맞겠지요?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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