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의 끝
-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푹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 시집 <그 여름의 끝>(문학과지성사, 1990)
* 감상 : 이성복 시인. 1952년 5월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불문학과를 나와 계명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하다 지난 2012년 명예 퇴직하였습니다. 대학 재학시절, 불문학과의 교수로 있던 비평가 김현 교수와 운명적으로 만남으로써 문학의 길에 들어섰으며, 1977년 그가 운영하는 <문학과 지성>을 통해서 ‘정든 유곽에서’, ‘1959’ 등 2 편의 시가 추천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졸업 후, 대학신문사의 방송통신대 판 전문기자로 활동하면서 그의 첫 시집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문학과 지성, 1980)를 냈습니다. 시인의 회고에 의하면 이 시기가 그의 시작활동의 황금기였던 때였으며 그 해 최고 신인 시인에게 수여하는 <김수영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1982년 계명대학교의 강의 조교로 대학에서의 교편을 시작하였으며 시집으로, <남해금산>(문학과 지성, 1986), <그 해 여름의 끝>(문학과지성, 1990), <호랑가시나무의 기억>(문학과지성, 1993), <아, 입이 없는 것들>(문학과지성, 2003), <달의 이마에는 물결무늬 자국>(열림원, 2003), <래여애반다라>(문학과지성, 2013) 등이 있습니다.
한 여름 무더위가 시작되면서 피기 시작하여 가을까지 피었다 지기를 반복하는, 시에서 표현했듯이 ‘타올라 불을 뿜는 듯한’ 배롱나무(목백일홍) 꽃이 이 시의 중요한 소재입니다.
어떤 이는 이 시를 연애시로 읽는 이도 있고 또 어떤 이는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한 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어떻게 해석하든, 그것은 읽는 사람의 몫에 달려 있지만 이성복 시인의 시 기법의 특성인 초현실주의를 감안한다면 연애시이기 보다는, 자신의 시적인 상상력의 변화 과정과 결단을 은유적으로 노래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성복 시인의 시들에는 유난히 ‘그 해 여름’ ‘그 해 겨울’ 그 해 봄‘ 등 ’그‘라는 관형사를 즐겨 사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라는 관형사가 붙음으로써, 어느 막연한 여름이 아니라, 너도 알고 나도 아는 ’아주 특별한‘ 여름이나 겨울, 봄이 되고 맙니다. 이 시에서도, 시적 화자가 지칭하고 또 누군지는 모르지만 화자와 함께 경험을 공유했을 그 누군가가 아는 그 여름에는 나무 백일홍이 화사하게 피었고, 또 여러 차례의 폭풍이 있었지만, 백일홍은 꽃을 매달고 있었고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여러 차례 폭퐁우에도 쓰러지지 않았던 것은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반자가 있었기에 가능했고, 폭풍 한 가운데서도 과감하게 시도하는 기법(장난처럼)들을 이해하고 격려해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붉은 꽃들을 매달 수 있었으며,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장난도 그만 둬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 여름은 비록 백일홍 꽃들이 억센 꽃이 되어 마당을 피로 덮는 것과 같은 ‘절망’이었지만, 시인은 그 절망이 드디어 끝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끈질기게 피고지기를 반복하는, 화려한 나무 백일홍 꽃처럼 다시 다가 올 새로운 ‘그 여름’을 기대하며 홀로서기 새 출발을 하겠다는 다짐입니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인 <그 여름의 끝>이 발간된 해, 투병 끝에 그 해 여름이 막 시작하는 어느 날 먼저 간, 운명의 문학 동반자였던 김현 교수의 죽음과도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그가 겪어온 삶의 여정 속에서, 시적 관심이 바뀌어 가는 변곡점을 나타내는 심정을 토로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성복 시인은 그 후, 실제로 그의 시 세계가 많이 변화되고 있습니다. ‘폭풍’과 ‘우박’과 ‘불’과 ‘피’ 등으로 표현된 ‘질풍노도’의 세계를 넘어 이제는 <래여애반다라>로 이어지는 새로운 성찰의 시 세계로 나아가는 것 말입니다.
몇 해 전, 고향의 선영 주변에 배롱 나무 묘목을 심었는데, 올해 벌초 때 보니 화사한 꽃을 핀 모습이 너무도 예뻤습니다. 이번 가을에는 몇 그루 더 심기로 했습니다. 내가 태어난 경상도에서는 이 꽃을 도화(道花)로 지정을 할 정도로, 1등 상품 꽃나무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특히 오래된 재실이나 선영 주변, 동네 주변에 많이 심었기 때문에 지금 이맘 때 쯤 고향 주변은 배롱나무 꽃의 화사함을 만끽할 수 있어 참 좋습니다.
강릉 오죽헌(烏竹軒)에 가면 600년 된 배롱나무 꽃을 만나 볼 수 있고 부산 양정동에는 800년 된 배롱나무를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뭐라 형언할 수 없는 묘한 화려한 꽃 빛깔로 보는 이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는 나무 백일홍은 그 꽃이 피고지며 무려 100일을 지속하는 것과 더불어, 그 수령(樹齡)에서도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인함과 생명력이 특징입니다. 그래서 시인이 그 해 여름을 생각하며 아쉬워하지만, 또 다른 그 해 여름을 기다리며 ‘절망의 끝’이라고 표현한 것은 새로운 기대감이나 포기하지 않는 결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일 것입니다.
처서가 지나자마자 불어오는 바람이 완연한 가을바람입니다. 매미 소리도 힘을 잃어가고 대신 귀뚜라미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는 계절에 시인처럼, 비록 ‘절망’이라는 현실이 앞을 가로 막을지라도, 또 다시 찾아 올 미래의 ‘그 여름’에 다시 필 화려한 백일홍을 기대하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출발점으로 받아들이고 이제는 ‘절망은 끝났다’고 힘차게 선언해 볼 일입니다. 이 가을의 문턱에. ^&^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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