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9월 - 고영민

석전碩田,제임스 2019. 9. 11. 06:10

9  

 

                                     - 고영민  

 

그리고 9월이 왔다  

산구절초의 아홉 마디 위에 꽃이 사뿐히 얹혀져 있었다  

수로를 따라 물이 반짝이며 흘러간다  

부질없은 짓이겠지만  

누군지 모를 당신들 생각으로  

꼬박 하루를 다 보냈다  

햇살 곳곳에 어제 없던 그늘이 박혀 있었다  

이맘때부터 왜 물은 깊어질까  

 

산은 멀어지고 생각은 더 골똘해지고  

돌의 맥박은 빨라질까  

왕버들 아래 무심히 앉아  

더 어두워지길 기다렸다  

이윽고 저녁이 와  

내 손끝 검은 심지에 불을 붙이자  

환하게 빛났다  

자꾸만 입안에 침이 고였다  

 

- 시집 <구구>(작가세계, 2015)  

 

* 감상 : 고영민 시인은 1968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문학사상]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악어><공손한 손><사슴공원에서><구구> 등이 있습니다.  

 

1, 고영민 시인의 시, ‘똥구멍으로 시를 읽다를 소개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 때 시인을 소개하면서 소소한 일상의 삶 속에서 소재를 찾아 콩트 같은 발상과 해학, 풍자를 곁들이는 시로 잘 알려 진 시인이라고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9월이 왔습니다. 계절이 바뀌고 시의 계절인 가을이 왔으니, 계절에 맞는 시 한 편을 꺼내 읽는 것도 예의일 것 같아 오늘 감상하는 시를 골랐습니다. 안도현 시인은 자신이 엮어 낸 책, <이 시를 그때 읽었더라면>에 이 시를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은 한 편의 시 같은 멘트를 달았습니다.  

 

리고 9월에는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구별해서 보는 눈을 갖게 하소서. 강둑에 앉아 햇살에 반짝이는 강물을 삼십 분만 보게 하소서. 하늘이 산의 능선을 면도칼로 오린 것처럼 또렷해지는 날을 자주 만나게 하소서. 그리하여 9월에는 들과 나무와 저녁과 밤과 당신과 내가 모두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하소서.’  

 

도현 시인이 무식한 놈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하는 너하고 이 들길을 여태 걸어왔다니, 나여, 나는 지금부터 너하고 절교(絶交)!’  

 

마도 안도현 시인의 생각은, 시인이라면 섬세한 눈과 마음으로 자연을 들여다 볼 수 있어야 하고 또 모르면 열심히 공부해서 적어도 그들의 이름 정도는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합니다. 좋은 글 좋은 시를 쓴다는 것은 계절을 따라 피고 지는 각종 꽃들의 이름을 그저 이름 모를 꽃으로 뭉뚱그려 표현하는 게 아니라 세심하게 그들의 숨결을 느끼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면서 그들의 이름을 불러 줄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특히, 가을에는 더욱더 그래야 한다는 생각에 저도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지난 여름 쏟아지는 폭염과 찌는 듯한 무더위 중에는 그저 빨리 지나만 가야했던 수롯길을 천천히 걸으며 누군지 모를 당신들을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계절, 가을이니까요.  

 

론 쑥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분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비슷 비슷한 류의 꽃들이 피는 요즘 같은 때에는 이게 그것 같고, 저게 이것 같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쑥부쟁이와 구절초의 구별은 고사하고, 쑥부쟁이와 흡사한 개미취와 쑥부쟁이는 아무리 아무리 구별하려고 해도 어려워서 결국 포기하고 스마트 폰 어플 모야모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산 길을 걷다가 이름을 알고 싶은 꽃의 사진을 찍어 물어보면 불과 몇 초 안에 정답을 알려주는 시절이다 보니 구별 방법을 익히기 보다는 어플 모야모에게 물어보는 방법을 택한 것입니다  

 

런데 이상한 것은, 이름 모를 들풀에 막상 그 이름을 알고 이름을 불러주면 놀랍게도 그동안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쑥부쟁이와 구절초, 개미취가 다 비슷비슷하지만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때 전혀 다른 깊은 세계가 펼쳐지는 것입니다. 아마도 오늘 감상하는 9월의 시에서 고 영민 시인도, 늘 봐오던 수로의 물을 애정을 가지고, 그 속에 비치는 가을 들녘의 꽃들을 보면서 일일이 이름을 불러주었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갑자기 물의 깊이가 더 깊어지는 것을 느낀 것입니다. 평소에 발부리에 부딪히는 돌맹이도, 이 가을에는 맥박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그 맥박이 빨라지는 생명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무심히 가을 바람 맞으며 그늘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손 끝 하나 하나에 느껴지는 환한 생명력이, 가슴을 뛰게 하고, 또 입안에 침이 고이게 할 정도로 매력적인 세상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나브로 드디어 가을입니다.  

 

부쟁이와 구절초를 구별하지 못한다고 해서 무식한 놈!이라고 자책하는 시인을 보고 조금 심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시인들은 그런 것 조차도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살아가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시인들의 시를 날마다 꺼내 읽으며 공감하고 당신과 내가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아는우리는 진정한 시인의 도반입니다.  

 

가을에는, 조금 여유를 가지고 부질없는 짓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그동안 그냥 지나쳤던 것들을 골똘하게 생각하며, 그냥 하루를 보내 보는 시간도 가져 볼 일입니다. 가을이니까.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