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시학 강의 / 물 - 임영조

석전碩田,제임스 2019. 11. 20. 06:47

시학 강의  

 

 

                               - 임영조  

 

 

대학에 출강한 지 세 학기째다  

강의라니! 내가 무얼 안다고?  

'시창작기초' 두 시간  

'시전공연습' 두 시간   나의 주업은 돈 안 되는 시업(詩業)이지만  

강사는 호사스런 부업이다  

매양 혀 짧은 소리로  

자식 또래 후학들 앞에 선다는  

자책이 수시로 나를 찌른다  

시란 무엇인가?  

생이 무엇인지는 알고?  

나도 아직 잘은 모른다, 다만  

삼십년 남짓 내가 겪은 황홀한 자학  

그 아픈 체험을 솔직히 들려줄 뿐이다  

누가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  

설명하기 무엇한 상사몽 같은  

그 내밀한 시학을 가르쳐줄 뿐이다  

시란 무엇인가?  

그건 알아서 뭐 하게!  

그게 정 알고 싶으면 너 혼자  

열심히 쓰면서 터득하라!  

그게 바로 답이니……  

오늘 강의 이만 끝.  

 

 

- 시집 <귀로 웃는 집>(창작과 비평사, 1999)   

 

 

* 감상 : 임영조 시인. 1943년 충남 보령시 주산면 황율리 104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내무부에 근무

 

한 작은 아버지 때문에 서울에서 공부를 했던 문학도였습니다. 1951년 주산국민학교에 입학했고, 1964년 서울 대동상업고등학교와 1967년 서라벌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습니다. 1970<월간문학> 신인상에 시 출항이 당선되었으며, 197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목수의 노래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등단 이전 그의 이름은 임세순. 그러나 이름이 여자이름 같아 등단하면서 이름을 영조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니까 임영조는 그의 필명인 셈입니다.    

1969년 육군본부 통신대대에서 3년간의 군복무를 마친 후 동아일보 출판부에 일자리를 얻었으나 곧 사직하고, 1974()태평양화학 홍보실에 입사했으며, 1989년 출판부장이 되었습니다. 1994년 생업과 시업 중 시업(詩業)을 택하기로 하고 ()태평양을 사직했습니다. 동작구 사당동에 방 한 칸을 마련한 다음 이소당(耳笑堂)’이란 택호를 걸고 시작(詩作)과 독서를 매진하다가 같은 해 한국 시인협회 제29회 정기총회에서 사무국장으로 선임되었습니다. 1995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시작으로, 1996년 추계예술대학 문예창작과, 1998년 서울시립대 시민대학 문예창작과, 2001년 고려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등에서 시 창작 실기강사로 출강했습니다. 2003년 한국 시인협회 상임위원장에 취임했으나, 같은 해 528일 췌장암으로 과천 자택에서 영면했습니다. <껍데기는 가라>는 시로 유명한 시인 신동엽이 주산농고 교사로 근무할 때, 임영조가 다니는 중학교의 지리 교사로 가르친 이력이 있는데 이 때 둘은 사제 시간의 연을 맺었습니다.    

번째 시집 <갈대는 배후가 없다>로 제38회 현대문학상(1983), 고도(孤島)를 위하여10편으로 제9회 소월시문학상(1994), 타계 후 문학사상사 제정 소월시문학상 특별상 등을 수상했으며, 20077월 보령댐 물빛공원에 그의 시비가 세워졌습니다.    

가 남보다 유난히 커서 어릴 적에는 당나귀라는 별명으로 놀림을 받기도 했던 그의 네 번째 시집 제목도 <귀로 웃는 집>이었고, 그가 타계하고 난 후 문학 지인들이 추모 문집을 내면서 책의 제목을 <귀로 웃은 시인 임영조>로 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과 따뜻한 이야기를 나누듯 "편지 같은 시"를 썼던 시인 임영조는 1985년 첫 시집 <바람이 남긴 은어>를 발표한데 이어 <그림자를 지우며>, <갈대는 배후가 없다>, <귀로 웃는 집>, <지도에 없는 섬 하나를 안다>, <시인의 모자> 등 총 여섯 권의 시집을 남겼습니다.    

론가들은 임영조 시인을 현란한 수사, 철학적 심각성을 경계하고 친숙한 언어, 간결한 구문을 즐겨 사용하는 시인으로 기억합니다. 그래서 그의 시는 수공업적인 시인의 향수를 느끼게 합니다. 각박한 세상사에 해학이 가미되고 진솔한 시의 묘미가 형상화된 까닭에 그의 시를 읽는 맛이 쏠쏠합니다    

늘 감상하는 시도 시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상황과 마음을 너무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시입니다. 시인은 이 시에서 시를 쓰는 일, 즉 시업(詩業)삼십년 남짓 해 온 황홀한 자학(自虐)’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자학은 다른 사람이 보면 딱하고 어림없는 짝사랑이니 어쩌면 부질없는 상사몽과도 같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최고의 학문이 이루어지고 있는 대학에 출강하면서 시를 가르치는 자신의 모습을 시로 표현한 것이 오늘 우리가 읽는 한 편의 시입니다. 그것도 출강한 지 약 1년이 지난 시점에서 쓴 시입니다.  

 

- 시란 무엇인가?  

- 생이 무엇인지는 알고?  

- 그건 알아서 뭐 하게?  

 

마도 그의 시 창작 강의 시간, 학생들이 모두 쳐다보는 강의실 앞 칠판에는 이런 문장이 씌여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시와 삶을 연결시켜, 그 내밀한 시학을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지만, 사실 현실의 강의실 안에서는 그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강의랍시고 하는 자신도 초라해지고, 또 혀 짧은 소리로 하고 있는 자기 강의를 듣고 있는 학생들도 매양 불쌍해 보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자책감에 스스로 열심히 쓰고 스스로 터득하라고 일갈하고 오늘 강의 끝!’을 외치는 그의 음성이, 그가 타계한 지 16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명쾌하게 들리는 듯 합니다.      

변에서 시를 좋아하는 사람도 많고 또 시를 쓰는 사람도 참 많아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요즘은 꼭 일간신문의 신춘문예 관문을 통과하지 않아도 시인이 되는 길이 다양하다 보니 이름이 알려진 듯 아닌 듯한 문예지들이 저마다 시인들을 배출해 내고 있습니다. 심지어, 백화점의 평생교육원에서 시학 강의를 들은 사람들이 동호회를 조직하여 자체 문예지를 발행하면서 스스로 시인을 만들어내기도 하는 세상입니다. 이제 경제적으로 조금 먹고 살만해지고 문화적인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 관심을 갖다 보니 시인이라고 타이틀을 갖고 싶어 하지만, 사실 배고픈 시절에는 시인으로 사는 것이 그리 녹록치 않았습니다. 특히, 임영조 시인과 같이 생업을 박차고 나와 시업에만 전념한다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마도 보령 물빛공원에 임영조 시인을 국보급 시인처럼 떠받들며 시비를 세우며 남아 있는 문인들이 한 마음으로 기리고 있는 것은, 그가 이룬 시업 즉 평생을 황홀한 아픈 자학으로 이룬 그의 내밀한 시학을 삶 속에서 용기와 결단으로 솔직하게 보여주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령댐을 지나는 일이 있으면 꼭 물빛공원에 들러 외로운 섬을 지키면서 열강하는 그의 내밀한 시학 강의를 꼭 들어봐야겠습니다    

(詩碑)에 새겨 진 그의 시 전문을 소개하면서 글을 맺습니다. 이 가을의 끝자락, 만추(晩秋)의 계절을 이대로 보내는 것이 아쉽기만 합니다. - 석전(碩田)

 

 

                             - 임영조  

 

무조건 섞이고 싶다   

섞여서 흘러가고 싶다  

가다가 거대한 산이라도 만나면   

감쪽같이 통정하듯 스미고 싶다   

 

더 깊게   

더 낮게 흐르고 흘러   

그대 잠든 마을을 지나 간혹   

맹물 같은 여자라도 만나면   

아무런 부담없이 맨살로 섞여  

짜디짠 바다에 닿고 싶다   

 

온갖 잡념을 풀고   

맛도 색깔도 냄새도 풀고   

참 밍밍하게 살아온 생을 지우고   

찝찔한 양수 속에 씨를 키우듯  

외로운 섬 하나 키우고 싶다   

 

그 후 햇빛 좋은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증발했다가  

문득 그대 잠 깬 마을에   

비가 되어 만날까   

눈이 되어 만날까   

돌아온 탕자의 뒤늦은 속죄   

그 쓰라린 참회의 눈물이 될까

 

- 임영조 시선집 <그대에게 가는 길>(천년의 시작, 2008), 문예중앙 1991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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