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
- 문정희
부부란 여름날 멀찍이 누워 잠을 청하다가도
어둠 속에서 앵 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만 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나머지를 어디다 바를까 주저하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달에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함께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손을 한번 쓸쓸히 쥐었다 펴 보는 사이이다
서로를 묶는 것이 거미줄인지
쇠사슬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부부란 서로 묶여 있는 것만은 확실하다고 느끼며
오도 가도 못한 채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바라보는
그런 사이이다
- 시집 <다산의 처녀>(민음사, 2010)
* 감상 : 문정희 시인. 1947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습니다. 진명여고를 졸업하고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부, 석사과정을 마친 후 서울여자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고려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동국대 석좌교수 등을 거치면서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한국 시인협회 회장을 역임했습니다. 1969년 <월간문학> 신인상에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문정희 시집>, <새떼>, <혼자 무너지는 종소리>, <찔레>, <아우내의 새>, <남자를 위하여>, <하늘보다 먼 곳에 매인 그네>, <별이 뜨면 슬픔도 향기롭다>, <오라, 거짓 사랑아>,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나는 문이다>, <다산의 처녀> 등이 있습니다.
문정희 시인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해서 새삼 시인을 소개하는 글을 길게 쓸 필요는 없을 듯합니다. 얼마 전 임보 시인을 소개하면서 문정희 시인의 시 ‘치마’와 그에 대한 답가 형식으로 쓴 임보 시인의 시 ‘팬티’를 언급했던 기억이 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문정희 시인을 알게 된 것이, ‘한계령을 위한 연가’ 시를 읽고 난 후였습니다. 그 이후 문정희 시인이 쓴 시들을 읽으면서 여류 시인으로서 보통 여자들은 표현하기 힘든 부분을 참으로 속 시원하게 표현하는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이 시인은 혼자 사는 싱글이든지 아니면 남편이 없는, 있더라도 자유분방한 아내를 이해할 줄 아는 같은 감성을 가진 예술가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감상하는 ‘부부’라는 시를 읽으면서 이런 상상이나 추측이 무색할 정도로, 현실의 삶이 튼튼하게 뿌리박고 있는 부부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어 참으로 의외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시에서도 노래하고 있듯이, ‘부부’라는 존재는 참 희한한 존재임에 틀림없습니다. 젊었을 때에는 그저 육체적인 사랑과 육아, 그리고 아이들을 키우는 일에 온통 집중하느라 부부라는 관계가 당연한 것으로 알았지만,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부는 참으로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사이라는 생각을 점점 더 자주 하게 됩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단정적으로 말하지만, 또 결혼은 사랑을 무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말을 하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쉼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리는’ 그런 관계입니다. 시인이 표현한 이 표현이 도대체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다면, 튼튼한 쇠사슬로 이어져 있는 것 같지만, 서로 헤어져 남남이 되고 나면 거미줄보다도 더 연약한 것으로 이어져 있던 사이이기도 하고, 또 서로 사랑해서 백년 가약을 맺은 사이이지만 그저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배경 삼은 것 같이, 쥐었던 손에 뭔가 들어 있을 것이라 펴 보지만 쓸쓸히 빈 손만 바라봐야 하는 그런 관계라고, 애매한 대답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부부 사이입니다.
어쩔 수 없이 현실의 삶 속에서 신용카드와 전기세, 수도세를 함께 걱정하며 지지고 볶으며 살지만 보이지 않는 끈으로 단단히 묶여, 죄 없는 어린 새끼들을 유정하게 같은 방향으로 바라보는 그런 사이가 바로 ‘부부’입니다.
이 시를 읽다가 문득, 강화에서 활동하고 있는 함민복 시인의 ‘부부’라는 같은 제목의 시가 생각이 나서 꺼내 읽어 봅니다. 이 시와 문정희 시인의 시가 마치 두 짝의 고무신을 섬돌에 나란히 벗어 놓은 것 같이 상통하는 느낌이 듭니다.
부부
― 함민복
긴 상이 있다
한 아름에 잡히지 않아 같이 들어야 한다
좁은 문이 나타나면
한 사람은 등을 앞으로 하고 걸어야 한다
뒤로 걷는 사람은 앞으로 걷는 사람을 읽으며
걸음을 옮겨야 한다
잠시 허리를 펴거나 굽힐 때
서로 높이를 조절해야 한다
다 온 것 같다고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아서도 안 된다
걸음의 속도도 맞추어야 한다
한 발
또 한 발
- 시집 <말랑말랑한 힘> (문학세계사, 2005)
함민복 시인은 이 시를 결혼식 주례를 부탁한 후배의 청을 거절하지 못해 고민 고민하다가, 주례사를 대신해서 한 편의 시를 써 본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주례사를 할 당시, 함 시인 자신은 결혼도 하지 못한 노총각있으니 ‘부부’라는 제목으로 시를 쓰기엔 참으로 난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반 평생은 해로한 노부부의 지혜가 듬뿍 깃들어 있는 듯 부부 관계를 너무도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집집마다 식탁이 있어 긴 밥상이건 짧은 밥상이건 들 일이 전혀 없지만 손님을 치른다든지, 또 제삿상을 차리는 일이 있을 때 긴 밥상의 한 쪽을 들어본 사람은 설명을 붙이지 않아도 무슨 말인지 금새 알 수 있는 시입니다. 흔들리지 않게 높이와 속도를 조절해가며 걸음걸이를 서로 맞춰가야 하는 상황, 문턱을 넘고 좁은 문을 통과할 땐 바로 보고 가는 사람이 등 뒤로 걷는 사람에게 건네는 ‘조심’이라고 짧게 한 마디를 하는 상황, 그리고 앞 사람의 눈빛만 보고 방향을 가늠하면서 상이 놓일 자리까지 탈 없이 옮겨와 밥상을 안착시키는 상황 등이 바로 부부 관계를 설명하는데 너무도 딱 맞다는 말입니다.
2011년, 노총각 함민복 시인이 소설가 김훈의 주례로 늦장가를 갔습니다. 그 결혼식에서 가수 안치환이 ‘꽃 보다 아름다운 민복’이를 외치며 축가를 불러줬고 그 때부터 행복한 부부 생활이 시작되었는데, 후배에게 해 줬던 자신의 주례시를 현실 속에서 본인 스스로 실제로 체험하고 난 후 요즘에는 부부로 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한 발 또 한 발 걸음의 속도를 맞춰 걸어가다가, 그의 표현대로 어느 한 쪽이 '먼저 탕 하고 상을 내려놓는 일‘만 없으면 그저 감사할 일입니다. 먼저 탕 하고 놓는 일이, 의도적인 때도 있지만, 전혀 의도없이 육체가 허락도 없이 ’다 온 것 같다고‘ 생각하여 쓰러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을 배경 삼아 백년이 지나도 남아 있을 암각화가 풍화되어 가는 긴 부부 관계 속에서, ’끝까지‘ 사랑하는 데 실패하지 않기를 두 손 모아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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