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책
- 곽효환
하늘 가득 펑펑 쏟아진 눈 쌓이고 동장군이
동네 꼬마들의 바깥출입을 꽁꽁 묶은 날 저녁이면
어머니는 감자며 고구마를 삶고
누이와 나와 사촌들은
구들방 아랫목에 깐 이불에 발을 묻고
할머니의 옛날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어릴 적 약을 잘못 먹은 탓에
길눈이 어둡고 글을 배우지 못했지만
어느새 마을 최고의 흉내쟁이이자 이야기꾼이 된
할머니의 이야기는 밤 깊어도 마를 줄 모르고
아이들은 졸린 눈을 부비며 귀를 세우다가
하얀 눈을 소리도 자국도 없이 밟으며 온다는
눈 귀신에 진저리 치곤 했다
다음 날이면 나는
말 한마디 토씨 하나 숨소리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외워서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그 서사 그 느낌 그 흥분을
에워싼 동리 아이들 앞에서 재현하는
이야기꾼이 되곤 했다
아직 글을 다 깨치지 못한 어린 내게
할머니는 살아 있는 귀한 책이었다
할머니에게도 그런 책이 있었을 테고
다시 그 할머니의 할머니에게도
오래된 그런 책이 있었을 게다
오래오래 전해져 내려오다
그만 내가 잃어버리고 만
- 시집 <슬픔의 뼈대> (문학과지성사, 2014)
* 감상 : 곽효환 시인. 1967년 전북 전주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습니다. 건국대학교 국문과를 졸업하였고 고려대학
교 대학원 국어국문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6년 <세계일보>에 ‘벽화 속의 고양이 3’을, 2002년 <시평>에 ‘수락산’외 5편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 <인디오 여인>(민음사, 2006), <지도에 없는 집>(문학과지성, 2010), <슬픔의 뼈대>(문학과지성, 2014), <너는>(문학과지성, 2018), 연구서 <한국 근대시의 북방의식>, 그리고 공저와 다수의 논문이 있습니다. 애지문학상(2013), 편운문학상(2015), 유심작품상(2016), 그리고 2019년 올해 9월에는 김달진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대산문화재단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난 2013년 중앙일보 ‘시가 있는 아침’에 실렸던 시 86편을 묶어서 낸 시 해설서인 <너는 내게 너무 깊이 들어왔다>(교보문고, 2014)를 내고 이름을 세간에 알렸습니다. 백석, 이용악, 윤동주 등 우리 근대문학을 꽃피운 시기의 작고 시인들로부터 현재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고은, 신경림, 신달자, 문정희, 정호승 등 시단의 원로, 중진, 중견 및 소장 시인들의 작품을 골고루 소개하고 있어 우리 근현대 시 가운데 좋은 시, 울림이 있는 시, 가슴 속 깊이 오래 남아 있는 시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특히 섬세하고 담백한 곽 시인의 탁월한 해설이 곁들여 져 있어 시인과 작품 자체를 좀 더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곽효환 시인은 평소 ‘시인이 자신의 목소리로 자기 세계를 이야기하지만, 동시에 독자를 향해 열려 있는 시’가 좋은 시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시를 사랑에 비유하여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랑’은 시의 영원한 주제입니다만 중요한 것은 얼마나 열렬히 사랑하느냐보다 얼마나 아름답게 떠나보내느냐 입니다. 따라서 시를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모두 아름다운 대상을 끌어안는 것 못지않게 어떻게 잘 떠나보내고 비워내야 할지 고민해야 합니다. 이를 바탕으로 가슴에 고여 있고 숨어 있는 서정과 서사를 퍼 올려 세상 밖으로 흘려보내고 떠나보내는 것이 시이고, 그것이 시인의 임무입니다. 그들은 “잘 가라. 내가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것들아”라고 외치며 마음속의 마르지 않는 샘을 아름다운 문장으로 떠나보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시는 이런 시에 대한 생각을 갖고 있는 시인이 이야기를 들려주듯이 독자들에게, 흘려보낸 수채화 같은 샘물입니다. 특히 밤 깊어가는 줄 모르고 길어 올리는 ‘이야기 샘’인 추억 속의 할머니를 시적 은유로 삼아 마르지 않는 샘물인 시 한 편을 독자들에게 흘려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유년 시절이 생각나게 하는 추운 겨울, 함박 눈이 펑펑 쏟아지는 날 할머니를 중심으로 옹기종기 모여 있는 손녀 손자들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 광경은 한 세대만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시인의 눈에는 수대에 걸쳐 이어 온 광경으로 그려집니다. 그리고 그 모습은 하나의 역사가 되어 살아 있는 책으로 나에게까지 용케도 전해져 내려왔지만, 그만 내가 잃어버리고 말았던, 그래서 이제는 아득하게 ‘오래된 책’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 시를 읽으면, 나를 중심으로 이어져 내려 온 삶이라는 것이 그저 동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세대와 세대, 그리고 과거와 현재 등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진행되어 왔고 또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살아있는 역사책’이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 역사책이 나의 대(代)에서 끊길 안타까움과 아쉬움, 그리고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는 깨달음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할머니까지 이어진 ‘귀한 책’이었지만 어느 날 내가 잃어버리고 만 그 책은 아름다운 추억을 소환해내는 ‘오래된 책’입니다. 그리고 시에서 구체적으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화자인 내가 이제부터 앞으로 그 오래된 책을 ‘흥분과 서사, 그리고 느낌이 그대로 전달되는’ ‘살아있는 이야기 책’으로 만들어가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듯합니다.
몇 년 전, 집수리를 대대적으로 하면서 그동안 간직해 왔던 책들을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꽤 많이 버린 적이 있었습니다. 읽지 않는 책들은 과감하게 버리라는 것이었는데, 당시 버릴 책들을 골라내는 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책 한 권 한 권마다 그 책을 갖게될 때의 상황들이 기억이 나서, 책을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책과 연관되어 있는 ‘옛 추억’을 버리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지요. 대학과 대학원 시절 공부할 때 구입했던, 전공과는 약간 비껴있던 오래 된 책들은 아마도 그 때 대부분 다 버렸던 것 같습니다. 젊은 시절 치열하게 공부했던 ‘학습 자료’들을 이제 이 나이에 또 들춰 볼 여력이나 시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많이 버렸는데도 다행스럽게 아직도 방 하나는 빽빽하게 책이 차지할 정도로, 앞으로 아름다운 추억을 불러 낼 ‘오래된 책’들이 있으니 저는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이번 겨울, 눈이 펑펑 내리는 날에는 작정을 하고 서재에 앉아 ‘오래된 책’들을 꺼내 보며 살아있는 옛 추억들을 소환해 내는 귀한 시간을 한번 가져봐야겠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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