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그대 혼의 깨어남이 없다면(성탄절에) - 고진하

석전碩田,제임스 2019. 12. 25. 07:12

그대 혼의 깨어남이 없다면(성탄절에)   

 

                                     - 고진하

 

어두운 시간의 강물 위로

큰 별의 추억이 부풀어 흐르지만

그대가 별이 되어 솟구치지 않는다면,

 

푸른 잎새 푸른 가지마다 매단

기쁨의 꽃등을 노래하지만

그대 내면의 혼불을 밝히지 못한다면,

 

꼬마버선, 털장갑 벗어

성탄목에 걸고 가는 천진도 있지만

그대가 새 아기로 태어나지 못한다면

 

성처녀의 순결이 흩날리듯

흰눈의 어울림이 분분하지만

그대 혼을 빨래하는 방망이질이 없다면,

 

깨어 있던 목자들처럼 눈부신 새벽 앞에 엎드린

성스런 복종도 있지만

그대가 사랑의 새벽빛으로 동트지 않는다면,

 

울타리 없는 파아란 하늘을 이고 사는 바리사이들이

오늘도 탐욕의 생울타리를 두르지만

그대의 허울을 벗고 알몸으로 나서지 않는다면,

 

라마에서, 보스니아에서 들리는

살육과 주림의 슬픈 탄식을 듣고도

그대 귀에 박힌 이기(利己)의 말뚝을 뽑지 않는다면,

 

목마른 혼들이

벌나비처럼 영생의 꿀샘에 모여들지만

그대가 먼저 혼의 부요를 길어 마시지 못한다면,

 

새들의 자유한 비상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스승의 간절한 부름이 있지만

그대가 무거움을 털고 깃털의 가벼움을 얻지 못한다면,

 

하늘도 땅의 뜨거운 입맞춤으로

아기 왕은 오늘도 태어나지만

아기 왕의 고고성(呱呱聲)이 저렇듯 우렁차지만

 

그대 혼의 깨어남이 없다면!

 

- 시집 <우주배꼽>(세계사, 1997)

 

* 감상 : 고진하 시인. 1953년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습니다. 감리교신학대학교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시인이자 목사로서 원주 치악산 근처 명봉산 자락, 대안리에 불편당(不便堂)'이라는 편액을 걸어 놓은 둥지를 틀고 그 산 빛의 다채로운 변화를 즐기며 한가로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도, 네팔 여행 중 옛 사원들을 순례하는 중에 그 울타리 안에 사람을 가두지 않는 그들 종교의 열린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아 인도 종교와 철학 쪽으로도 마음공부의 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1987<세계의 문학>에서 시인으로 데뷔했으며,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민음사, 1990), <우주배꼽>(세계사, 1997), <프란체스코의 새들>(문학과지성, 1999>, <얼음수도원>(민음사, 2001), <수탉>(민음사, 2005), <거룩한 낭비>(, 2011), <꽃 먹는 소>(중앙북스, 2013), <명랑의 둘레>(문학동네, 2015)가 있고, 산문집 <나무 신부님과 누에성자>, <내 영혼의 웰빙>,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마음의 숲, 2019) 등과 여러 권의 번역서가 있습니다. 1997년에는 <김달진문학상>, 2003년에는 <강원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현재는 명상과 저술에 전념하는 한편, 동네 카페를 빌려서 <한살림 교회> 예배를 드리며 목회 활동도 하고 있으며, 대학과 교회 등에서 시와 영적인 삶에 관한 강연도 틈틈이 하고 있습니다.

 

학대학을 나온 목사이면서 시를 쓰는 시인이기 때문에 그의 시를 읽으면 깊은 말씀 묵상에서 우러나온 시라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울타리에만 한정하지 않고, 삶의 가장 근본을 넘나드는 묵상을 하다 보니 어떤 때엔 불교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또 어떤 때엔 도교나 인도 철학의 향기가 나는 듯도 합니다. 그만큼 타 종교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더 깊이 이해하려면 이웃종교에 대한 공부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다보니 그의 옷차림에서 조차 목사보다는 스님의 모습이 더 짙게 엿보이기도 합니다.

 

2015KBS에서 방영한 <인간극장>에는 자발적으로 불편을 감수하려는 의미로 <불편당>에 살고 있는 고진하 권포근 부부가 초절약의 지혜를 발휘하면서 생활하는 모습이 5부작으로 방영된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시골 어디서든 자라는 개망초, 토끼풀, 쇠비름, 질경이 등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야생초를 가지고 건강 식단을 꾸려가는 모습은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며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잡초 레시피>라는 제목의 요리책도 이 때 출간했을 정도입니다.

 

진하 시인의 시는 쉽게 읽힙니다. 이 때 그 쉬움은 시인이 그만큼 어렵게 쓴 시라는 역설도 됩니다. 그 고심의 과정을 시인은 아주 자연스럽게 드러낼 뿐입니다. 굳이 어렵게 감출 이유가 따로 있겠냐며 함께 사유하고 공유해가자며 술술 풀어낸 것이 시가되고 글이 되었습니다. 그가 시를 파 다듬는 일에 비유하여 말했듯이, 시인이 손수 시 끝의 노랗게 마른 부분을 떼어내고 시 뿌리의 흙을 털어내고 시 마디의 거친 살결을 벗겨내는 힘든 작업을 했으니, 시를 읽는 독자는 이제 잘 다음어진 라는 파를 씻고 알맞게 썰어 요리마다 넣어 기본 양념으로 삼기만 하면 되는 격입니다.

    

기 왕성한 청년 시절, 믿지 않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의 진정한 의미도 모른 채 더 흥청망청해 하는 성탄 즈음의 모습에 의분(義憤)해서, 성탄절 예배를 드리고 나면 송구영신 예배가 있는 마지막 날까지 어김없이 한적한 기도원에 올라가 금식 기도를 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불광동 기독교 수양관을 오른 쪽으로 끼고 올라가는 그 기도원에 가서 분요한 연말년시 기간을 기도하면서 보내며 한 해를 마무리 하고 또 한 해를 계획했던 그 시간들이, 젊은 청년이 어찌 그런 생각을 다 했을까 싶을 정도로 지금 생각하면 제 스스로도 대견스런 추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이후 결혼을 하면서 기도원 올라가는 일은 더 이상 하지 못했지만, 연일 각종 송년회가 이어지고 의미없는 성탄의 축하들이 난무하는 요즘 같은 때가 되면 그 때의 그 의분이 문득 문득 생각이 나곤 합니다.

 

늘 감상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고 시인도 바로 이런 마음에서 이 시를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대 혼의 깨어남이 없다면아무리 요란하게 성탄을 축하한다고 해도 의미없는 일이라고 나열하고 있는 내용들이 구구절절 깊은 묵상의 샘에서 길어 올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 저곳에서 메리 크리스마스’ ‘오늘 태어난 아기 왕을 축하하며 기쁜 성탄이라고 건네는 인사들이 넘쳐나지만 그대가직접 삶 속에서 혼을 빨래질 하듯 치열하게 살아내지 못한다면 마치 벌 나비가 꿀샘에 날아들지만 여전히 목마른 것과 같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그대가직접 모든 허물을 벗고 알몸으로 삶의 현장으로 뛰어들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눈에 있는 조그만 티끌만 지적하다가 그대의 귀에 박힌 이기(利己)의 말뚝을 뽑아 내지 않으면, 탐욕의 울타리에 갇혀 있는 바리새인 꼴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시인은 외칩니다.

 

찌 어찌 하지만 무엇 무엇이 없다면이라는 구조가 반복되는 시를 읽다보면 신약 성경 고린도전서 13, 소위 사랑장'에서 반복어법으로 사랑을 노래한 사도 바울의 문체가 갑자기 생각납니다.

 

[내가 사람의 모든 말과 천사의 말을 할 수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내 모든 소유를 나누어줄지라도, 내가 자랑삼아 내 몸을 넘겨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31~3절)

    

탄절 아침, 내가 새 아기로 태어나는 결단을 해야 한다는 고진하 시인의 조용 조용한 음성이 마치 함성처럼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의 시가 내가 오늘 살아내야 할 삶의 좌우명이어야 하며 간절히 올려드려야 할 기도여야 함을 말하는 듯 합니다.

 

든 내 영혼을 깨우라고, 날마다 사랑의 새벽 빛으로 일어나라고 촉구하는 음성이 고고(呱高)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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