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사랑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9)
* 감상 : 고정희 시인. 1948년 1월 전남 해남에
서 5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고성애(高聖愛).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을 통해 문단에 나왔습니다. <전남일보> 기자,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스찬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부장,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역임하였습니다.
<누가 홀로 술틀을 밟고 있는가>(1979), <실락원 기행>(1981), <초혼제>(1983), <이 시대의 아벨>(1983), <눈물꽃>(1986), <지리산의 봄>(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1989), <광주의 눈물비>(1990), <여성해방 출사표>(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1991) 등의 시집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려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로하는 장시를 잇달아 발표했는데, 1991년 6월 9일 자기 시의 모체가 되어 온 지리산을 등반하는 도중 뱀사골 계곡에서 실족으로 사망했습니다. 유고 시집으로 1992년에 간행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가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고정희 시인의 ‘겨울 사랑’은 사실 시 속에서 겨울을 나타내는 표현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달려온 삶의 여정이 혹독한 추위를 생각하게 하는 '겨울'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겨울을 견디게 했던 것이 바로, 그녀가 경험했던 한번의 따뜻한 감촉,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찐한 사랑의 추억이었다고 고백하고 있고, 벽이 허물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활짝 열렸던 그 밤도 모닥불이 타고 있는 겨울 밤이었음을 노래합니다. 그 겨울 밤,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쳐들어 온 치자꽃 향기가 온통 가득했던 그 사랑, 그 한번의 이슥한 사랑의 진실을 알고 난 후 그녀는 어쩌면 일생이 차가운 겨울이라고 해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인이 말하는 ‘그 사랑’의 순간은, 매일 새벽 5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명상과 기도, 그리고 시 쓰기를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는 그녀의 삶의 모습을 생각하면, 하나님을 처음 알았던 순간의 사랑을 이야기 하는 듯도 하고 또 한편으론 평생을 시를 통해서 삶의 구원을 모색해 보려던 사명을 깨달았던 순간을 이야기하는 듯도 합니다. 물론 이 시를 남녀 간에 있을 법한 애틋한 첫 사랑의 순간으로 이해하고 감상해도 무방하겠지만 말입니다.
시인은 시작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실천에 적극 앞장섰는데 특히, 1984년 대안문화 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창립에 참여해 적극적인 동인 활동과 함께 한국 여성 해방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자발적인 출연으로 창간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초대 편집 주간을 맡아 1년간 그 기틀을 다지는 데도 기여했습니다.
소백산 한쪽을 들어 올린 그 사랑의 포옹은 그 이후 그녀의 혈관 속을 계속해서 흐르면서 가슴 뜨거워지는 ‘별’이 되어 그녀를 인도했을 것입니다.
1991년 그녀가 늘 찾아 오르곤 했던 지리산에서 실족사로 마흔 초반의 나이에 운명을 달리했습니다. 그녀가 가고 난 후 유품을 정리하는 가운데 발견된 <독신자>라는 제목의 시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예감이라도 한 듯,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로 살아왔던 삶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칼날 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자신을 지키려고 ‘끝까지’ 싸워야 했던 처절한 고독한 몸부림, 그리고 그 눈물을 씻어주시는 절대자의 따뜻한 위로가 느껴지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독신자
- 고정희
환절기의 옷장을 정리하듯
애정의 물꼬를 하나 둘 방류하는 밤이면
이제 내게 남아 있는 길,
내가 가야할 저만치 길에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크고 넓은 세상에
객사인지 횡사인지 모를 한 독신자의 시신이
기나긴 사연의 흰 시트에 덮이고
내가 잠시도 잊어본 적 없는 사람들이 달려와
지상의 작별을 노래하는 모습 보인다
그러므로 모든 육신은 풀과 같고
모든 영혼은 풀잎 위의 이슬과 같은 것,
풀도 이슬도 우주로 돌아가, 돌아가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강물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어라
바다로 흘러가는 강물이어라
잊어야 할까봐
나는 너를 잊어야 할까봐
아무리 붙잡아도 소용없으니까
하느님 보시기에 마땅합니까?
오 하느님
죽음은 단숨에 맞이해야 하는데
이슬처럼 단숨에 사라져
푸른 강물에 섞였으면 하는데요
뒤늦게 달려온 어머니가
내 시신에 염하시며 우신다
내 시신에 수의를 입히시며 우신다
저 칼같은 세상을 걸어오면서
몸이 상하지 않았구나, 다행이구나
내 두 눈을 감기신다
- 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비, 1992, 유고시집)
폭설이 왔어야 하는데 그 대신 사흘씩 겨울비가 주룩 주룩 내리는 이 겨울에, 고정희 시인의 시 두 편을 감상하면서 이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오로지 절대자 앞에서 ‘단독자’로 살아가는 오롯한 삶이 되길 다시 한번 다짐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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