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겨울나무 - 이재무

석전碩田,제임스 2020. 1. 29. 06:44

겨울나무

 

 - 이재무

 

이파리 무성할 때는

서로가 잘 뵈지 않더니

하늘조차 스스로 가려

발밑 어둡더니

서리 내려 잎 지고

바람 매 맞으며

숭숭 구멍 뚫린 한 세월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보자니

보이는구나, 저만큼 멀어진 친구

이만큼 가까워진 이웃

외로워서 더욱 단단한 겨울 나무

 

- 시집, <몸에 피는 꽃>(창비, 1996)

 

* 감상 : 이재무 시인. 1958년 충남 부여에서 출

 

생했습니다. 한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국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고 1983<삶의문학>, <실천문학>, <문학과사회>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섣달 그믐>, <온다던 사람 오지 않고>, <벌초>, <몸에 피는 꽃>(창작과비평, 1996), <시간의 그물>, <위대한 식사>, <푸른 고집>, <저녁 6>, <데스벨리에서 죽다>(천년의 시작, 2019). 그리고 산문집으로 <생의 변방에서>. 공저 <우리시대의 시인 신경림을 찾아서>. 편저 <대표시, 대표평론 I·II>가 있습니다. 2회 난고문학상, 편운문학상, 1회 윤동주시상을 수상하였고 현재 동국대학교 문창과 대학원 등에서 시창작 강의를 하고 있으며 계간 시 전문지 <시작> 편집주간으로 활동했습니다.

    

울나무는 시인 뿐 아니라 소설가, 또 영성을 추구하는 구도자들에게도 많은 시적 은유가 떠오르게 하는 존재인 것 같습니다. 그 많던 무성한 잎을 다 떨군 채 북풍 한설 맞으면서 홀로 두 팔을 하늘 향해 벌리고 서 있는 모습이 영락없이 신 앞에서 단독자로 서 있는 구도자의 그것과 닮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겨울나무라는 키 워드를 넣고 검색을 하면 수없이 많은 시들이 검색되는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늘 우리가 감상하는 이재무 시인의 겨울나무는 시인 자신을 겨울나무와 동일시, 감정이입시켜 노래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화려한 직함과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책이 찍힌 명함, 그리고 재물과 권력, 빽과 학연, 지연으로 대변되는 '세상에서의 성공'에 가려 있을 때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앙상한 가지와 줄기만 남게 되니 보이는 삶의 진실, 그 많던 세상 친구들은 어디에도 없고 곁에는 어두운 발밑에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던 이웃만 남았습니다. ‘저만큼, 이만큼운율을 살려 바로 시인은 이 시를 통해서 외로운 삶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느 인터뷰에서 그가 했던 고백처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정규직으로 살아오지 못하고 한 때는 출판사에서, 또 한 때는 서울 목동과 노량진 일대의 몇몇 유명한 입시 학원에서, 서른 후반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는 지방과 서울을 오가며 시간강사로 여러 대학을 전전해 왔고, 또 지금도 전전하고 있는 중이다보니 자연 길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시간이 많았던 그였습니다. 그래서 차창 밖으로 이파리를 다 떨군 채 서 있는 겨울나무는 어쩌면 자신의 모습과 너무도 닮았습니다. 차창 밖 스쳐 지나는 풍경들을 일별하다 도둑처럼 불쑥 찾아온 시상(詩想), 그리고 이제 서리 내리고 잎 지고 숭숭 가슴에 구멍이 뚫린 한 세월을 지나고 줄기와 가지로만 견뎌내는 이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삶의 진실. 시인은 자기 스스로 한 그루 겨울나무가 되어 담담하게 노래합니다.

 

2016, 그가 어느 잡지사에 기고했던 글,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라는 제목의 글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오늘 감상하는 시와 똑같은 시인의 마음이 엿보여서 이곳에 전재해서 소개해 보겠습니다. 평생 시업(詩業)을 하면서 살아온 그가 앞으로 남은 인생을 시인으로서 어떤 자세로 살아갈 지에 대해 담담하게 쓴 한 편의 시 같은 글입니다. 그가 오래 전 노래했던 겨울나무가 어느덧 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을 잘 표현하고 있는 고백의 글입니다.

    

[(전략)무언가에 쫓겨 늘 바지런히 앞만 보고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면 거기 가 땀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시가 안쓰러워 떨쳐내지 못하고 조강지처인 양 여직 품어 다니고 있다. 가까이 들여다보니 그새 주름이 자글자글 그녀()도 나처럼 늙어가고 있다. 이제 걸음의 속도를 늦춰 늘 숨차 하는 그녀와 나란히 보폭을 함께 하리라.

    

지상의 낙지 족들인 담쟁이들은 등로에 충실할 뿐 등정을 고집하지 않는다. 매순간 오르는 일이 아프고 아름다운 결실이므로 그들은 꿈의 실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살아간다. 시지푸스의 후예들인 그들을 닮고 싶다. 나날이 결실인 삶을 살아가련다. 오늘 하루 열심히 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리라. 살며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로워서 더욱 단단해진 겨울나무처럼 먼 데 있는 친구보다 이만큼 가까워 진 이웃과 함께 소소한 행복을 찾으며, 또 내일을 위해서 오늘을 희생하는 어리석은 삶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아가겠다고 시인은 다짐합니다. 무슨 큰 일을 이루었기 때문에 성공이 아니라, 나날이 지금 여기에서작은 결실을 맺는 삶이 진정한 성공이요 진짜 행복이라고 말하는 시인의 음성이 또렷이 들려오는 듯 합니다.

 

록 외롭지만, 그 때문에 더욱 단단해졌노라고, 그리고 우리에게 사랑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노라고 말하는 음성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