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2월 / 겨울노래 - 오세영

석전碩田,제임스 2020. 2. 26. 06:42

2

 

                                - 오세영

 

'벌써'라는 말이

2월처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새해 맞이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2,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보아라.

항상 비어 있던 그 자리에

어느덧 벙글고 있는

,

세계는

부르는 이름 앞에서만 존재를

드러내 밝힌다.

외출을 하려다 말고 돌아와

문득

털 외투를 벗는 2월은

현상이 결코 본질일 수 없음을

보여 주는 달,

'벌써'라는 말이

2월만큼 잘 어울리는 달은 아마

없을 것이다.

 

- 시집,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시와시학사, 1992)

 

* 감상 :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해주(海州)입니다. 전주 신흥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충남대학교(1974~1981)와 단국대학교(1981~1985) 국문학과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다가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현대문학(현대시)을 가르쳤으며 2007년 정년퇴임, 현재는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1968년 박목월(朴木月)에 의해 시 잠깨는 추상<현대문학>에 추천되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반란하는 빛>(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 <모순의 흙>(1985), <무명연시>,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1991),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1999), <적멸의 불빛>(2001) 등이 있습니다. 모더니즘에 심취해 있던 초기 시에서는 감각적인 언어 의식과 날카로운 직관으로 기교적이며 실험정신이 두드러지는 시들을 발표했다면, 점점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철학적으로 노래하는 시를 써 왔습니다.

    

족 정서와 세계 정신의 보편성이 녹아 있는 작품들이 높이 평가되어, 한국시인협회상(1983), 녹원문학상(평론부문, 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편운문학상(평론부문, 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문학상(2000) 등을 수상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오세영 시인이 쓴 월별(1~12) 시 씨리즈 중에서 2월에 해당하는 시입니다. 시에서도 표현했듯이 떠들썩하게 새해 맞이를 했던 때가 바로 엊그제 같은데, 마치 쏜 화살 같이 지나간 시간이 1월도 아니고 벌써’ 2월이 되었다는 자각을 시적 은유로 삼아 한 편의 시로 노래했습니다. 시인이 새삼 시간의 빠름을 알아차린 건 어느 날 두툼한 털 외투를 입고 뜰로 내려서다가 피부로 느껴져 오는 따스한 봄 기운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리고 다시 들어가 그 옷을 벗어 놓고 집을 나서는 상황을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묘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벌써라는 말을 되뇔 수 밖에 없는 때가 바로 2월이라는 말입니다.

 

난 가을 마당에 떨어진 낙엽을 일부러 치우지 않았습니다. 낙엽 밟는 소리가 좋아 그대로 놔 두었는데, 이번 겨울은 너무 따뜻해서 낙엽 아래에서 상사화 파란 싹이 지난 1월 중순부터 나오기 시작하더니 2월에는 낙엽 위로 불쑥 고개를 내밀 정도로 웃자라버렸습니다. 지난 주에 눈이 내린 후 몰려 온 반짝 추위에 혹시나 새싹들이 화들짝 놀라 다치기라도 할까봐 주위의 낙엽들을 더 많이 덮어줬습니다. 아마도 시인도 같은 심정으로 뜰에 있는 매화 나뭇가지에 벙글어 지고 있는 꽃 망울을 관찰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나치지 말고 오늘은 뜰의 매화 가지를 살펴 보아라고 마치 독자들에게 간곡하게 권하는 듯 하지만, 정작 스스로에게 그것을 보고 이름을 불러 주는 여유를 갖자고 다짐하고 있습니다.

 

생들을 상담하면서 제가 즐겨 쓰는 비유가 하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100m 단거리 달리기가 아니라, 42.195Km 풀 코스를 달리는 장거리 마라톤이다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단거리 달리기는 옆에 달리는 동료가 나의 경쟁 상대이기 때문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일단은 이겨 놓고봐야 하듯이 달려야 합니다. 달리다가 상대방이 잘못해서 넘어지면 그것은 곧 나의 행운입니다. 옆에서 같이 달리는 상대가 누구인지 알 필요도 없고 또 알면 더 불편해 지는 것이 단거리 달리기의 특징입니다. 그러나 풀 코스 마라톤을 달리는 자세는 이와는 정반대여야 합니다. 마라톤을 100m 달리듯이 뛰기 시작하면 아마도 얼마 못 가서 낙오하고 말 것입니다. 마라톤을 끝까지 완주하려면 호흡을 길게 하면서 옆에 뛰는 동료 선수는 어떤 선수인지, 도란 도란 이야기 하면서 같이 달려야 할 때도 있고 힘들 때에는 서로 도움을 주고 받으면서 달려야 완주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달리는 길 옆에 피어 있는 이름 모를 꽃들을 보면서 즐길 줄도 알아야 하고, 중간 중간 마련해 놓은 음료수 공급대에서는 물 한 모금 마시면서 호흡을 가다듬을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인은 바로 이런 것을 2월에 새삼 느낀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새해 맞이 1월에는 마치 단거리 달리기 선수인 양 출발을 했고 또 숨가쁘게 달려왔는데 벌써 2월이 되었지만, 아무것도 가시적으로 이룬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지금 단거리 달리기를 하는 게 아니라 마라톤 풀코스를 뛰어야 하는 사람이구나하는 깨달음을 갖게 되는 시점도 바로 2월입니다.

 

인이 살아가는 세계, 즉 주변을 둘러보면서 세심하게 이름을 붙여서 불러줘야 할 존재들이 얼마나 많은 지를 새삼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고나 할까요. 그저 눈에 보이는 것(현상)만 보고 본질을 놓치고 허겁지겁 달려가지 않겠다는 자각을 3월이 되기 전, 2월에 할 수 있다는 것이 복이요 행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벌써라는 말 속에 모두 들어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요.

 

래 전에는, 한국의 현대시 100선 중에 오세영 시인의 작품이 네티즌 투표에서 1위를 했기 때문에 수준 미달의 시를 너도 나도 오세영이라는 이름을 붙여 유통(?)하는 바람에 유명세를 톡톡히 타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 글이나 써 놓고 오세영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시로 통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오세영 시인의 시라고 버젓이 소개되는 가짜 시들이 많다고 합니다.

 

통 어수선한 세상입니다. 이런 때 성철 스님의 법어가 생각날 것 같은, 오세영 시인의 겨울노래라는 시를 읽으면서 마음을 한번 가다듬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불교적 세계관과 동양적 체념론으로 무장된 그의 작품 세계를 잘 대변해 주는 시로 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시입니다. 이 모든 것들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믿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는 우리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석전(碩田)

 

겨울 노래

    

                              - 오세영

 

산자락 덮고 잔들

산이겠느냐.

산 그늘 지고 산들

산이겠느냐.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아침마다 우짖던 산까치도

간 데 없고

저녁마다 문살 긁던 다람쥐도

온 데 없다.

길 끝나 산에 들어섰기로

그들은 또 어디 갔단 말이냐.

어제는 온종일 진눈깨비 뿌리더니

오늘은 하루 종일 내리는 폭설(暴雪)

빈 하늘 빈 가지엔

홍시 하나 떨 뿐인데

어제는 온종일 난()을 치고

오늘은 하루 종일 물소리를 들었다.

산이 산인들 또

어쩌겠느냐.

    

- 시집, <벼랑의 꿈>(시와시학사,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