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뿌리개 꼭지처럼
- 이정록
물뿌리개 파란 통에
한가득 물을 받으며 생각한다
이렇듯 묵직해져야겠다고
좀 흘러넘쳐도 좋겠다고
지친 꽃나무에
흠뻑 물을 주며 마음먹는다
시나브로 가벼워져야겠다고
텅 비어도 괜찮겠다고
물뿌리개 젖은 통에
다시금 물을 받으며 끄덕인다
물뿌리개 꼭지처럼
고개 숙여 인사해야겠다고
하지만 한겨울
물뿌리개는 얼음 일가에 갇혔다
눈길 손길 걸어 잠그고
주뼛주뼛, 출렁대기만 한 까닭이다
얼음덩이 웅크린 채
어금니 목탁이나 두드리리라
꼭지에 끼인 얼음 뼈,
가장 늦게 녹으리라
- 시집,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것들의 목록>(창비, 2016)
* 감상 : 이정록 시인은 1964년 충남 홍성
에서 출생, 공주사범대학 한문교육과를 졸업했습니다. 1989년 대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농부일기’가 당선되었고, 1993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혈거시대’가 당선되어 문단에 등단했습니다. 시집으로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 문학동네, 1994>, <풋사과의 주름살>(문학과 지성사,1996>, <버드나무 껍질에 세들고 싶다>(문학과 지성사, 1999>, <제비꽃 여인숙>(민음사, 2001>, <벌레의 집은 아늑하다>(문학동네, 2004, 개정판>, <의자>(문학과 지성사, 2006>, <정말>(창비, 2010), <어머니 학교>(열림원, 2012) 등이 있습니다. 2001년에 김수영 문학상을, 2002년에는 김달진 문학상, 2006년에는 제26회 소월시문학상 우수상, 2017년에는 박재삼 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현재, 천안농고 국어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단국대, 고려대에서 시 창작 강의도 한 적이 있습니다.
이정록 시인은 작년 이맘 때 쯤 ‘느슨해진다는 것’이란 제목의 시를 함께 읽으면서 소개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정록 시인의 시를 읽으면 그가 사용하는 시어들이 하나의 비유가 되어 삶의 문제들을 일상의 언어로 유머스럽게 소환해 내는데 탁월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오래 헤어져 있던 친구나 연인이 옆에서 소곤소곤 스토리텔링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슬프고도 아름다운, 맑고 깨끗한 시어들이 감칠맛이 납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겨우내 꽁꽁 싸매 두었던 마당 한 켠의 수도 꼭지를 풀어내면서 새 봄을 맞는 느낌을 노래한 시입니다. 한 겨울 얼음 일가에 갇혀 눈길 손길 걸어 잠그고 칩거했던 시인 자신을 수도 꼭지에 비유해서 느끼는 그대로 노래한 시이기 때문에 쉽게 다가오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소한 일상의 상황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세심하게 들여다보고 그것을 한 편의 시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면 그는 천상 시인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침내 콸콸 쏟아지는 물이 파란 통에 담겨지면서 묵직해지는 것을 보면서 ‘이렇듯 묵직해지리라’ 다짐할 뿐 아니라 철철 흘러넘치는 순간도 놓치지 않고 가끔은 좀 넘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자신을 돌아보는 시인의 눈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추운 겨울 내내 한 번도 직접 물을 주지 못한 것 때문에 정원의 나무들이 ‘지쳤다’고 표현하는 마음이라든지, 이제 새 봄과 함께 가벼워질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텅 비어도 좋다고 결심하는 마음이 바로 시인의 마음입니다. 추운 겨울에 얼지 않게 하려고 싸매두었던 수도꼭지를 새 봄을 맞아 풀어내는 아주 평범한 일상의 사건 하나를 경험하면서, 마음의 빗장을 굳게 잠그고 스스로 다가서지 못해 주뼛주뼛 하면서 그저 내 안에서 출렁대기만했던 지난날의 스스로를 돌아보는 것까지 사유를 확장하고 그것을 시로 노래하는 시인이 대단합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쏟아지는 수도꼭지의 물을 바라보며 이 봄에는 나 때문에 상처 입은 주변의 지친 이들에 흡족한 생수가 될 수만 있다면, 그리고 그 지친 영혼들을 토닥여 줄 수만 있다면 내가 가벼워지고 텅 비는 것 쯤이야 무슨 대수냐고 시인은 반문하는 듯 속삭입니다.
지난 일요일 오후, 온 가족이 시간을 내서 가을부터 치우지 않고 그대로 놔 둔 낙엽들을 말끔하게 치우는 '마당 정리'를 하느라 기분 좋은 땀을 좀 흘렸습니다. 꽁꽁 싸매 두었던 수도꼭지를 푼 후 끝까지 틀어 힘차게 물이 쏟아지도록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콸콸콸 소리를 내는데 마치 그 소리가 추웠던 지난 겨울을 원망하는 듯, 왜 이리도 늦게 나를 해제시켜주느냐고 호소하는 듯 크게 들렸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의미 심장한 표현으로 시를 마무리합니다. ‘얼음덩이가 웅크린 채 어금니 목탁 두드린다’는 표현이 그것인데, 이것은 아직도 추위를 느끼는 겨울에나 적합한 표현입니다. 왜 굳이 시를 마무리하는 마당에 시인은 이 시어들을 이곳에 뒀을까?
새 봄을 맞아 묵직해지고, 흘러넘치고, 또 시나브로 가벼워질 뿐 아니라 비워내고, 또 머리를 숙여 겸손하게 먼저 인사를 하고 싶은 낮은 마음이 있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꼭지에 낀 얼음 뼈가 가장 늦게 녹는 것처럼,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웅크린 채 얼어 붙어있는 ‘뼈’ 같은 응어리가 내 속에 아직도 있는 건 아닌지, 성찰하는 마음으로 시를 마무리하고 싶어서 이 표현을 가장 마지막 연에 넣은 것은 아닐까.
이 아침, 이정록 시인의 시 한 편을 읽으면서 나 자신을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져 봅니다. 혹시 꼭지 아래에 끼어 있는 얼음 뼈가 아직도 녹지 않고 웅크리고 있는 건 아닌지 말입니다.
수도꼭지를 틀 때마다 시인의 마음이 되어 나를 되돌아 보다 보면 어느 새 마당은 온갖 꽃들로 만발하여 환하게 가득 찰 것을 기대해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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