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더 큰 슬픔
- 이수익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이,
슬픔일랑 잠시 밀쳐두고 밥을 삼켜야 하는 일이,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밥을 씹어야 하는
저 생의 본능이,
상주에게도, 중환자에게도, 또는 그의 가족에게도
밥덩이보다 더 큰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 있느냐고.
- 시집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시와시학사, 2000)
* 감상 : 이수익 시인. 1942년 11월 경남 함안군 여항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대 사범대 영어교육과를 졸업하고 196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고별’, ‘편지’가 당선되어 등단했습니다. 부산시 문화상(1980), 한국방송대상 작품상, 현대문학상(1987), 대한민국문학상(1988), 정지용문학상(1995), 한국방송대상, 한국시인협회상(2001), 공초문학상(2007), 지훈문학상, 이형기 문학상(2008) 등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는 <고별>, <우울한 샹송>(삼애사, 1969), <야간열차>(1978), <슬픔의 핵>(고려원, 1983), <단순한 기쁨>(고려원, 1986), <그리고 너를 위하여>(문학과비평, 1988), <아득한 봄>(1991), <푸른 추억의 빵>(1995), <눈부신 마음으로 사랑했던>(시와시학사, 2000), <꽃나무 아래의 키스>(2007), <처음으로 사랑을 들었다>, <천년의 강>, <침묵의 여울> 등이 있습니다.
시인은 대학졸업 후 줄곧 방송국 프로듀서라는 직업을 가진 채 시 창작을 병행해 왔습니다. 부산 MBC 방송국 프로듀서로 입사해 KBS 라디오 차장, KBS 편성운영국 부주간 등을 거쳐 KBS TV 편성주간, KBS 라디오본부 편성주간, KBS 라디오 2국 국장, KBS 라디오센터 제작위원 등을 지내다 지난 2003년 정년퇴직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이 시를 읽으면서 가장 먼저 생각난 건, 2011년 담낭암으로 작고한 소설가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라는 책의 한 구절이었습니다. 갑자기 남편을 여의고, 또 4 개월 뒤 당시 27살이었던 아들마저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는 끔찍한 불행, 그녀의 표현대로 ‘참척(慘慽’)을 겪은 후 그가 일기 형식으로 쓴 글들을 모아서 낸 책인데 그 속에서 그녀는 이렇게 썼습니다.
‘비빔밥을 꿀같이 달게 먹고 내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 온 나는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는 이제 살고 싶으냐‘고.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라고 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저녁 기도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다시 배가 고팠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하루를 반성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식욕을 채우기 위해 허위허위 성당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양을 자제했기 때문에 더욱 맛있는 저녁을 먹고 내려오면서 나는 내 육신과 정신의 분열이 한없이 창피하고 슬퍼서 몸 둘 바를 몰랐다. 할 수 있는 말은 다만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매일 먹는 밥, 아니 죽을 만큼 슬픈 일을 당하면서도 꾸역꾸역 먹어야 하는 참으로 슬픈 짐승인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느낀 감회를 술회한 것인데, 아마도 이수익 시인의 이 시도 바로 이런 감정을 시로 표현한 것일 것입니다. 참척과 같은 크낙하게 슬픈 일을 당하고서도 굶지 못하고 때가 되면 밥을 먹어야 하는 일, 그것이 못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슬픔일랑 잠시 밀쳐 두고, 또 그래도 살아야겠다고, 상주가 되었든 중환자가 되었든 아니면 그들을 간호하는 가족이 되었든 ‘밥을 삼켜야 하고’ 또 ‘밥을 씹어야 하는’ 그것이 지금 겪어내야 하는 슬픔보다 더 큰 슬픔으로 다가오는 현실, 그것이 바로 이 시가 포착한 ‘시적 은유’입니다.
초기 그가 막 등단하여 시를 쓸 때에는 구어체로 읊조리는 듯 운율과 리듬감을 살리는 서정적인 ‘연애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해서 서정주 시인은 ‘새로운 패턴의 시’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어느 날 “시를 그렇게 쓰면 골격의 힘이 없어질 수 있으니 이미지 시를 써보라”는 박남수 시인의 조언을 받아들였고, 그가 지금도 ‘이미지즘 계열의 시인’이라는 별칭이 붙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퇴직 후 이곳저곳 강연을 다니면서 그만의 ‘시인론’을 이렇게 피력하곤 했습니다.
“시인이란 ‘불행의 작두’를 타야 할 숙명을 지닌 사람이다. 시인이란 칼날 같은 현실을 돌아가지 않고 당당하게 그 위를 걷고, 자신의 상처로 세상이 치유되지 않으면 기꺼이 죽음에도 키스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슬픔을 피하지 않고 직면해 내는 시인의 숙명을 이야기한 대목입니다. 특히 이수익 시인은 그동안 써 온 시들을 통해서 삶의 슬픔과 고뇌,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시련을 간결한 시어로 이미지화 시키는데 탁월한 시인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난해한 시라든지, 자기 취향적인 언어로 복잡하게 표현하는 시보다는 누구나 공감이 갈 수 있는 언어로 전달되는 시를 그가 꾸준히 써 온 이유입니다.
1987년 가수 길은정은 이수익 시인의 시 ‘우울한 샹송’에 곡을 붙여 앨범을 하나 냈습니다. 와이키키 부라더스와 함께 작업한 이 앨범에 수록된 그녀의 노래 때문에 이수익 시인의 대표시가 될 정도로 유명하게 된 시를 오늘 덤으로 한번 감상해 보겠습니다. 이 시에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른 가수 길은정은 2005년 1월 7일, 직장암 말기 판정을 받고 2년여에 걸친 투병 끝에 4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당시 직장암 선고를 받은 후에도 마이크를 놓지 않고 죽기 며칠 전까지 원음방송에서 방송을 진행하며 마지막 길을 방송과 함께 했던 그녀는 어쩌면 이수익 시인이 2007년 시집 <꽃나무 아래의 키스>를 낸 후 갑자기 쓰러진 후에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하는 모습과 어쩌면 닮았다고나 할까요.
우울한 샹송
- 이수익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 되어 젖어 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 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 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 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 시집 <우울한 샹송>(삼애사, 1969)
코로나19가 창궐하면서 생사를 넘나드는 사람들의 슬픈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때입니다. 제 때 치료를 받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 또 확진 판정을 받기 위해서 검사도 순서에 밀려 받지 못하고 원인도 모르고 죽어간 사람의 이야기도 들립니다. 그리고 그들의 절규가 허공에 메아리 되어 흩어지지만 아무도 들어주지도 않는 것 같습니다. 대구에서 하루에도 수 천 명씩 확진 판정을 받을 당시, 신천지 신도들을 먼저 검사 하는 원칙이 정해지면서 순서가 밀린 어느 어머니는 검사도,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다가 그만 증상이 악화되어 돌아가셨는데, 이 죽음을 두고 그 따님이 억울해 하면서 절규하는 모습이 뉴스 화면에 방송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차라리 신천지 신도라고 했으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울부짖으면서 슬퍼하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종교의 아편에 중독되어 육체영생, 종교 지상최고를 외치며 반사회적, 반이성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신천지 신도’라고 할 걸 외치며 울부짖는 딸의 마음이 더 슬프게 다가왔습니다. 오죽했으면 모든 사람이 혐오하는 신천지 신도라고 했으면 살았을 것이라고 했을까요.
그런데 그런 극한의 슬픔을 외치던 그녀도 어느 순간,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서 식사를 하기 시작했을 것을 생각하니 이 보다 더한 슬픔이 우리에게 어디있겠냐고 반문하는 시인의 마음이 절절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이 슬픈 봄에, 이 우울한 마음을 한 번에 날려버릴 만한 기쁜 소식이 담긴 편지 한 통이 빨간 우체통을 통해서 전달되어지길 간절히 바래 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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