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 반칠환

석전碩田,제임스 2020. 4. 1. 06:40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

(속도에 대한 명상)

 

                                            - 반칠환

 

보도블록 틈에 핀 씀바귀 꽃 한 포기가 나를 멈추게 한다

어쩌다 서울 하늘을 선회하는 제비 한두 마리가 나를 멈추게 한다

육교 아래 봄볕에 탄 까만 얼굴로 도라지를 다듬는

할머니의 옆모습이 나를 멈추게 한다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다 돌아서는

어머니의 뒷모습은 나를 멈추게 한다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

 

- 시집,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시와시학사, 2001)

 

* 감상 : 반칠환 시인. 1964년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92<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습니다. 2002년 서라벌 문학상, 2005년 자랑스런 청남인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는 <뜰채로 죽은 별을 건지는 사랑>(시와시학사, 2001), <웃음의 힘>(시와시학사, 2005), <전쟁광 보호구역>(지혜사랑, 2012) 등이 있고, 시인선집으로 <새해 첫 기적>(지혜사랑, 2014), 시선집 <누나야>(시와시학사, 2003), 시평집 <내게 가장 가까운 신, 당신> (백년글사랑, 2004), 장편동화 <하늘궁전의 비밀>(백년글사항, 2003), <지킴이는 뭘 지키지?>, 인터뷰집 <, 세상을 훔치다> 등이 있습니다.

 

칠환 시인은 그의 두 번째 시집인 <웃음의 힘>에 실린 시 노랑 제비꽃이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 수록되고 또 새해 첫 기적201212월부터 20132월까지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 글 판 문안으로 선정되어 많은 블로거들이 포스팅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오르며 유명세를 탄 시인입니다. 교과서에 실린 그의 시와 광화문 글 판 문안의 시를 먼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노랑 제비꽃

 

                            - 반칠환

 

노랑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

숲이 통째로 필요하다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

지구는 통째로 제비꽃 화분이다

 

새해 첫 기적

 

                            - 반칠환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 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시집, <웃음의 힘>(시와시학사, 2005)

 

두 시 뿐 아니라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시를 보면 그의 시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 같이 모두 짧다는 것입니다. 짧지만 그 속에는 깊은 철학적인 사유와 삶의 기지(機智)가 한데 버무려져 있습니다. 특히 그가 속도에 관한 명상시리즈로 쓴 촌철살인과도 같은 짧은 시들은 그동안 세간의 인기를 모으기에 충분했습니다. ‘나를 멈추게 하는 것들이란 제목의 오늘 소개하는 시도 속도에 대한 명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똑같은 부제가 붙은 시가 지금까지 무려 11번까지 이어 질 정도입니다. 이렇듯 반 시인은 삶을 미친 듯이 달려가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한 번쯤은 멈춰 서서 가만히 관조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속도 전도사를 자처하는 시인입니다. 짧은 시이지만 그 속에서 생각지도 못했던 보석을 줍는 듯한, 주옥같은 시를 만들어 내는 그가 모국어를 얼마나 능수능란하게 다루는지, 그리고 사물의 핵심을 꿰뚫어 보는 안목이 얼마나 깊은 지 그의 시를 통해서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것이지요. 현재는 숲 생태전문가로서도 열심히 활동하면서 자연을 그의 산문과 시 작품 속에 담아내는 일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시인의 권면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가끔씩 멈춰 서서 삶을 돌아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앞만 보고 달려오다 보니 잃어버리고 산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삶의 목표도 잊은 지 오래고 자기자신이 누군지도 잃어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내가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거지?’라는 뜬금없는 질문을 하는 날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질문에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면 그 때부터 심각한 실존적 공허감과 그 후유증에 시달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바로 이런 근본적인 삶의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그 해답으로 매일 매일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 이제는 잠시 멈추는 것 자체가 그 비결임을 깨달은 자의 노래라고 생각하면 될 듯 합니다. 특히 시의 마지막 문장, ‘나는 언제나 나를 멈추게 한 힘으로 다시 걷는다는 표현이 참 좋습니다. 멈춰선 그 힘으로 다시 힘을 얻어 걷는다는 말이 역설적이면서도 너무도 공감이 가는 말로 들리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년 전, 어느 일간 신문사의 문화센터에서는 느린 삶의 학교라는 명칭으로 학생들을 모집한 적이 있었는데, 해마다 기수별로 진행된 그 교육에 몰려 든 수강생들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린 삶에 대해 갈급해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고 또 그만큼 잃어버리고 산 것이 많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산 금정산 자연 생태계 지킴이로 자원 봉사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초등학교 친구 하나가 있습니다. 몇 년 전 12일 부산 여행을 하면서 40년 만에 만난 이 친구와 함께 금정산을 올랐던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친구의 해박한 자연 지식에 하루 종일 감탄을 했습니다. 산을 오르면서 발걸음을 멈추고 사라져 가는 습지에서 귀한 곤충과 식물들을 발견하고는 마치 가족처럼 돌보는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당시 저는 제비꽃의 종류가 그렇게도 많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세모난 달걀형 꽃잎에 짙은 보라색 줄 무뉘가 있는 왜제비꽃’, 잎에 알록달록한 줄무늬가 있는 알록 제비꽃’, 잎 새 모양이 단풍잎과 비슷한 단풍제비꽃’, 잎사귀 모양이 가늘게 갈라진 남산제비꽃’, 원줄기가 없고 전체에 털이 난 잔털제비꽃’, 흰 꽃 아래쪽 꽃잎에 자주색 줄무늬가 선명한 콩제비꽃’, 노란색으로 피는 노랑제비꽃’, 흰색으로 피는 흰제비꽃’, 그리고 제 기억에 친구가 일러 준 제비꽃 중에는 서울 제비꽃도 있었던 걸로 기억이 됩니다. 그저 보라색깔의 평범한 제비꽃만 제비꽃인 줄 알았지, 그렇게도 수많은 제비꽃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친구를 새롭게 보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반칠환 시인도 숲 해설가 교육을 받으면서 새삼 이런 사실을 처음 알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노랑 제비꽃 하나가 피기 위해서 그 주위에 있는 숲 전체가 배경으로 필요하다는 사실도, 아니 우주가 통째로 필요하다는 사실도 속도를 줄이고 또 가만히 멈추는 시간이 없었으면 절대로 볼 수 없는 일이었을 테니까요. 친구가 비전문가이면서 어떤 전문가보다도 더 탁월한 식견이 있어 부산 지역 방송에서 금정산 생태계 뉴스를 보도할 때마다 친구를 마지막으로 인터뷰하는 이유도, 그만큼 그가 욕심없는 느린 삶을 살아가면서 자연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것을 기자들이 먼저 알아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쁜 목사 = 나쁜 목사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깊이 알아가면서 이 땅에서 하늘의 메시지를 나누는 목회 사역이 주 업무인 성직자가 바쁘다 보면 자기가 돌봐야 하는 신도들의 사정을 진정으로 볼 수 있는 눈도 없어지고, 그들의 외로운 이야기를 들어줄 귀도 없어지게 되니, 바쁘면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말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 말이 꼭 성직자나 목회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은 아닐 듯 합니다. 보도블록 틈새에서 놀라운 생명력으로 새싹을 키워낸 것도 대단한데, 그곳에서 노란 꽃까지 피워낸 씀바귀를 잠시 멈춰 서서, 경이롭게 바라볼 수 있는 시인의 여유가 우리에게도 꼭 필요한 오늘입니다. 한 포기 풀을 들여다보는 멈춤이 없이는 굽은 허리로 실업자 아들을 배웅하는, 어느 가정의 힘든 이야기도 절대로 들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때여서 그런지 올 해 사순절은 유난히도 더 길게 느껴집니다. 그렇지만 4월의 첫 날인 오늘은 힘들게 땅을 비집고 나오는 봄 새싹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잠시 멈춰 서서 들여다보는 시간을 한번 가져봐야 겠습니다

 

저 평범하고 보잘 것 없지만 일상의 조그만 순간들 때문에 잠시 멈춰 서는 그 순간, 기적이 일어나고 또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