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의 전쟁
- 김선태
꽃들의 전쟁이 터졌다
목표는 섬진강변에 온통 꽃불을 놓고 올라가
지리산 천왕봉에 봄의 깃발을 꼽는 일
구례 산동의 산수유 소대가 먼저 노란 연막탄을 쏘아 올리자
광양 다압에 집결한 매화 군단의 사격이 일제히 시작됐다
자욱한 포연을 뚫고 화개로 진격해 들어가자 이번엔
쌍계사 벚꽃 연대가 하얗게 질려 그만 혼비백산한다
지리산 곳곳에서 펑펑 터지는 산벚꽃 포대의 파상공세
이제 세석평전이 붉은 피로 덥힐 때까지
철쭉 군단과의 마지막 일전만 남았다
고지가 눈앞이다
ㅡ<한국동서문학>(2018년 여름호), 시집 <햇살 택배>(문학수첩, 2018)
* 감상 : 김선태 시인. 1960년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습니다. 목포대를 거쳐 중앙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석사), 원광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목포에서 36년째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으며 계간 <시와사람> 편집주간을 역임했습니다. 광주여대 문예영상과 교수(2002∼2003)를 거쳐 2004년부터 목포대학교의 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그는 남도의 정신과 정서를 일관되게 육화해 온 시로 김영랑 시인의 대를 잇는 남도 문학의 정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1993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1996년 월간 <현대문학>에 시 ‘눈물에 대하여’외 4 편과 문학평론 ‘비애와 무상의 시학’이 추천되어 등단했습니다. 대학 재학 중인 1982년, 고대신문 창간 35주년 기념 현상 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3학년 국어교과서에 시 ‘미래엔’이, 고등학교 1학년 국어교과서에는 ‘천재교육’, 고등학교 문학교과서에는 시 ‘비상’ 등 3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009년 애지문학상, 2011년 전라남도 문화상, 2012년 영랑시문학상, 2017년 시작문학상, 2018년 송수권 시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시집으로는 <간이역>(문학세계사, 1997), <동백숲에 길을 묻다>(세계사, 2003), <살구꽃이 돌아왔다>(창비, 2009), <그늘의 깊이>(문학동네, 2014), <한 사람이 다녀갔다>(천년의시작, 2017), <햇살 택배>(문학수첩, 2018) 등이 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를 읽자마자 무릎을 탁 치고 말았습니다. 해마다 남녘으로부터 들려오기 시작하는 봄꽃 소식을 접하면서 시에서 묘사한 것처럼 남에서 북으로 마치 꽃 전쟁의 전선이 확대되는 것 같은 양상을 어떻게든 표현해 보고 싶었는데, 이 시를 읽자마자 “맞아 바로 이런 느낌이야” 하면서 100% 공감이 갔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꽃이 순서대로 피기 시작하는 현상을 보면서 ‘전쟁과 같은 긴박감’을 시적 은유로 삼아 멋진 시로 승화해 낸 것입니다. 마치 꽃 소식이 들려오는 상황을 10배속 영상으로 보듯이, 긴박하고 리드미컬하게 묘사한 시가 그야말로 ‘꽃들의 전쟁’ 그 자체입니다. 역시 무릎을 탁 치면서 '천상 시인은 시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봄의 꽃 소식은 채 1 월도 되기 전, 제주도에서부터 시작이 됩니다. 내륙에는 북풍한설이 여전히 가득 차 있는데 섬 제주의 어디에선가 매화꽃이 피었다는 거짓말 같은 뉴스가 들려오지요. 제주의 동백과 겨울 수선화, 유채꽃이 이미 피었다는 소식들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한겨울 육지 사람들에게는 그림의 떡과 같은 소식일 뿐입니다. 그러나 금새 그 소식은 김선태 시인이 시에서 묘사한대로 이내 반도의 남쪽 끝에 상륙하여 마치 전쟁의 포화가 터지는 듯 연일 북쪽을 향해서 일제히 올라옵니다. 남도의 시인 답게 이 시를 읽으면 지리산 등산로를 한 눈에 간파하는 안목이 탁월합니다. 세석평전을 거쳐 지리산 천왕봉에 이르는 그 긴 코스를 마치 각개전투 코스를 상상하듯 표현해 내는 그의 글 솜씨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소대, 연대, 연막탄, 집결, 군단, 사격, 자욱한 포연, 진격, 포대, 파상공세, 군단, 마지막 일전, 고지, 그리고 마지막 깃발을 꼽는 일까지 여성 독자들은 잘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겠지만, 군대 생활을 해 본 남자들은 그가 사용하는 단어들이 모두 군대에서 쓰는 용어들임을 직감적으로 알게 됩니다. 꽃의 전쟁, 즉 화투(花鬪)가 제대로 시작되었다는 말인데 온통 전투 용어뿐이지만 ‘살벌함’ 대신에 마음의 봄 정원에 꽃들이 화사하게 연신 피는 장면이 연상되니 이 또한 오묘합니다.
이 시에서 시인이 파악한 꽃 피는 순서에 의하면, 아마도 지난 주말까지 산수유, 매화, 그리고 섬진강변 쌍계사의 벚꽃이 그 임무를 다 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파상공세로 이어진 봄꽃의 진격은 그 다음, 지리산 중턱 쯤의 산벚꽃이 바톤을 이어받을 것이고 그 차례가 지나면 지리산 곳곳을 뒤덮을 철쭉 군단이 천왕봉 꼭대기에서 대미를 장식하며 봄 꽃 전쟁은 마무리될 것입니다.
김선태 시인의 시의 특징은 리듬감과 청각적인 감성을 깨어나게 하는 탁월성에 있다는 평을 받고 있는데, 이런 특징이 묻어나는 그의 또 다른 봄꽃 시 하나를 더 읽으면서 오늘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그의 시는 그냥 눈으로 읽기 보다는 소리를 내서 읽을 때 그 감동이 더 배가 된다는 말이 실감이 나는 시입니다.
봄의 오르가슴
- 김선태
나주 배꽃 흰 가슴 확 풀어헤친 봄이 아니겠나. 그것들, 그 요망한 것들 벌이란 벌과 나비들 모조리 불러들여 한바탕 애애한 사랑냄새로 천지가 진동터니. 으음, 내 조로의 몸과 마음 어디에서도 꽃이 피는지 신음소리 절로 터져나오고.
담양 대나무숲 죽순들 발기의 팔뚝 하늘로 내지르는 봄이 아니겠나. 처녀 유방처럼 반남고분도 탱탱하게 부푸는 봄이 아니겠나. 그리하여 해남 부근의 땅들 더욱 벌겋게 달아오르고, 무수하다는 다도해 섬들도 저마다 새 몸단장으로 뭍 가까이 올라오나니.
어디 그뿐이리, 이름 없는 들꽃들도 즈이들끼리 귓속말로 뭐라뭐라 속삭이고 깔깔거리고, 산이란 산들도 겹겹 몸을 포개고 어디로들 유장하게 잦아들고, 거대한 구렁이마냥 꿈틀대던 영산강이야 마침내 기진하여 나자빠졌구나.
오호라, 지천으로 지천으로 물이 올라, 어디를 가도 한참은 정신이 몽롱한 남도의 봄 연애사태여. 그리하여 나도 대지 위에 벌러덩 누워 뒹굴고 싶은 아흐, 더는 참을 수 없는 봄의 오르가슴이여.
ㅡ시집 <동백숲에 길을 묻다>(세계사, 2003)
매년 청명 한식일이면 경북 성주에 있는 고향 마을 뒷 산에 있는 가족 선영을 찾곤 했는데, 올 해는 코로나19 때문에 다녀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시를 읽으면서 더 많이 아쉬움이 남는 이 봄이기도 합니다. 지금 쯤 그 선영 주변에는 할미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을 것이고 고향 마을 입구에도 벚꽃이 절정을 다 하고 지금 쯤에는 꽃 잎을 비처럼 흩날리고 있을 것입니다. 동네 어귀에서, 제일 높은 데 있는 우리 집을 올려다 보면 그 집 뒤로 울창하게 서 있는 대나무 밭 중간 중간 복숭아 꽃이 만발하여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는 때도 바로 이 즈음인데, 그 모습을 올해는 보지 못하고 지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저 마음이 허허로울 뿐입니다.
오호라, 지천으로 지천으로 물이 올라 어디를 가도 한참은 정신이 몽롱한 봄 향연이여! 그리하여 나도 이 주말에는 참을 수 없는 봄의 향기 좇아 어디론가 나서야겠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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