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꽃씨를 품은 서랍 / 우포 연수원 - 박동덕

석전碩田,제임스 2020. 4. 22. 06:48

꽃씨를 품은 서랍

 

                                       - 박동덕

 

농기구 창고에 턱 버티고 앉은

헌 책상서랍 입이 무겁다

내가 먼저 열지 않으면

一 자로 다문 입 절대 열지 않는다.

눈치도 없이 자리나 차지하는 미련퉁이

서랍을 뜯어내어 개집을 만들까

날도 추운데 확 군불이나 지펴버릴까

중얼거리며 바깥으로 끌어내려 하자

말에도 씨가 있다며

무뚝뚝한 사내 입을 열었다

종알종알 지껄이던 말이 씨가 되어

후회해 본 일 한 두 번이겠냐고

지난 해 모아두었던 꽃씨를

탁 뱉어 낸다

오래 삭힌 말에는 기다림의 미학이 숨어있다.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저 입은 세상을 지키는 힘이다

시골에 살고 싶다는 말이 씨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붙박은 이 집까지

따라온 저 책상

서랍은 씨앗을 쓸어 담으며

꽃 피우고 싶다 말하고는

입을 꾹 다문다

처마 밑에서 웅성거리던 겨울 바람

슬그머니 달아나고 있다.

 

- 시집, <나의 솟대에게>(지혜, 2016)

 

* 감상 : 박동덕 시인.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고 지금도 우포늪에서 자연과 벗하며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시인입니다. 2004<시인정신>으로 등단했습니다. 현재는 <시하늘> 동인이며, <시와 여백 작가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 <나의 솟대에게>(2016), <유랑의 날들>(현대시, 2019) 등이 있습니다.

 

동덕 시인은 그가 태어 난 창녕이 그의 고향이지만 고향을 떠나 풍찬노숙의 삶을 살다가 시골에서 살고 싶다고 늘 해오던 말이 씨가 되어 어느 날 문득 우포늪이 있는 고향으로 돌아와 우포의 아름다움을 시로 노래하며 살고 있는, 아니 그의 표현을 빌면 우포늪의 풍경 자체가 되어버린 인간이 되었습니다. 우포늪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자연내륙 습지로, 1997년 환경부에 의해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지정된 곳이고, 1998년에는 환경 올림픽이라고 할 수 있는 람사르 총회에서 수억 년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공식 보전습지로 지정받았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어렵게 시골 살이 결정을 하고 귀농이든 귀촌을 한 시인과 함께 옮겨져 온 책상을 보면서 시인이 느낀 소회를 쓴 소박한 시입니다. 도회지 생활을 할 때 사용하던 책상이라 갖고 오긴 했지만 딱히 자리 잡을 곳이 없어 여러 해 동안 농기구 보관 창고에 쳐 박아 놓았던 모양입니다. 자주 들락거리게 되는 창고 가장 자리에 넓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헌 책상을 이제는 해체하여 개집으로 재활용을 하든지, 그냥 부셔서 땔감으로 쓸지 궁리하다가 일단은 밖으로 끌어내고 보자며 책상을 움직이는데 그동안 굳게 닫혀있던 서랍이 열리면서, 그 속에 넣어 두었던 꽃씨들이 와르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상황을 시인은 놓치지 않고 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의 시적 은유가 된 것은 외로운 시골 살이에서 그 무엇이 되었든 대화의 상대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책상과 서랍, 그리고 그 속에 있던 씨앗 등을 의인화하여 대화를 주고 받는 형식으로 시적 은유를 삼았기에 산문 글이 아니라 가 될 수 있는 이유입니다. 농기구 창고에 턱 버티고 앉아 있는책상은 무뚝뚝한 사내이고 이 사내의 입이 된 서랍은 끝끝내 무거운 입을 다물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꽃씨를 품은 서랍이 모처럼 입을 열어 시인에게 건넨 말이 참 귀엽기도 하고 재미있습니다. ‘꽃을 피우고 싶다한마디 하고 다시 묵직한 입을 다물어 버리는 서랍의 음성을 들으며, 그 옛날 서랍에 씨앗을 넣었던 시인 자신의 마음과 말이 씨가 되어 이곳 고향으로 돌아 온 자신의 처지를 감정이입, 동일시하는 한 편의 시를 완성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서랍이 꽃을 피우고 싶다고 한 말은 서랍의 말이라기보다는, 씨앗을 뱉아 낸 서랍의 입을 빌어, 시인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입니다. 그 서랍의 말을 세심하게 들을 줄 아는 '시인의 귀와 마음'이 곧 이 시의 시적 은유입니다. 처마 밑에 웅성거리며 불던 겨울바람이 가시고 나면 올 봄에는 반드시 서랍이 뱉어 놓은 씨앗들을 심어 꽃을 피우게 하리라는 시인의 마음까지 엿보이는 결론도 참으로 돋보이는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씨가 된다는 말은 우리 말 뿐 아니라 성경에서도 말씀의 씨앗을 뿌리는 비유가 있을 정도로 온 세계의 문화적인 공통 코드인 것 같습니다. 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운명도 그 말대로 된다는 것인데, 살아가면서 점점 수긍이 가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어떤 분은 우스개 소리로, 우리 대한민국이 이만큼 잘 살게 된 것은 우리들의 어머님 덕분이라고 하더군요. 코 흘리개 아이들을 키우면서 코에 휴지를 대고 !해라!’라고 했기 때문에 오늘 날의 대한민국이 흥하게 되었다는 아재 개그말입니다.

 

마도 시인은 지금의 시골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누구라도 그렇게 말 할 수 있듯이 '시골에 살고 싶다'고 수시로 노래를 불렀던 모양입니다. 그 말이 씨가 된 덕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살고 있는 그가 도회지 사람들에게 보내는 초대장 같은 시 한 편을 이즈음에서 같이 한번 읽고 이야기를 계속해 나갔으면 좋을 듯 합니다.

 

우포 연수원

    

                                - 박동덕

 

수억 년 역사를 이어오는

그 나라에 가면 모두 주인입니다

얼굴 살짝 붉히는 당신도 주인이 될 수 있답니다

제각기 핏줄은 다르지만 화음을 이루며

햇빛 부스러기도 나누어 먹고

이슬 한 방울도 나누어 마신답니다

꼬물거리는 새순의 움직임에

바람도 조용히 길을 비켜 돌아가는, 산모퉁이

길 끝에 삶의 의미가 진득하게 배인 늪이 있어요

물오리들이 수면에 떠다니는 얼음조각 밀어내고

봄이 오는 마당을 쓸고 있어요

새들의 풀피리소리 늦잠 깨우는 언덕

햇살이 연초록 카펫을 짜고 있네요

여기는 능력껏 일하고 먹을 만큼 가져가요

많이 가지려는 몸싸움 따위 하지 않아요

대대로 전통을 지키며

자신의 색깔대로 살아가는 나라

고맙다는 말보다 즐거웠다는 편지 한 장 남기고

소리 없이 왔던 길 되돌아가는, 왠지 부끄러워지는

그런 곳, 궁금하지 않으세요

흉내 내기에 급급한 당신

그런 나라에 가고 싶지 않으세요

그럴 여유 없다고요

나른한 몸을 이끌고 종종걸음치는 골목

초인종 누르기 전 잠깐 하늘을 올려다봐요

가로등보다 밝은 달빛 아래

기러기들의 날갯짓 당신을 부르고 있을 거에요

미루나무 꼭대기에 망루가 있어요

예의바른 까치의 안내를 받아

땅 속 저 깊은 곳에서 징소리처럼 울리는 말씀

잠시 만이라도 귀 기울여 봐요

할머니 옛날 얘기, 어머니 치마폭을

그리워하는 당신 

 

- 인터넷 <시하늘> 1999년 봄, [회원 자작시 게시판]에서

 

시을 읽으면, 그가 시골로 내려오기로 결정하고 지금과 같이 살아가고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습니다. 그리고 아직도 많이 가지려고 몸싸움하며, 다른 사람 흉내 열심히 내면서 날마다 나른한 몸으로 종종 걸음치며 도회지 골목길을 누비며,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초대장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초대장는 그의 최근 시집에 문명 당신에게라는 편지 형식의 제목으로 아주 근사한 한 편의 시가 되어 수록되어 있습니다.

 

문명 당신에게

 

                          - 박동덕

 

삭막한 당신의 울타리를 벗어난 나는 새끼염소처럼 천방지축 풀을 뜯습니다 메마른 가뭄 끝에 장마를 맞이한 나의 식탁엔 시기도 질투도 미움도 욕심도 없습니다 새소리와 풀벌레소리 바람소리 빗소리가 공존하는 나의 창은 너무 맑습니다

 

산 아래 사람들은 축 처진 어깨를 자동차에 밀어 넣고 퇴근을 서두르겠지요 내가 빠져나온 개구멍 같은 들창 가에 하얀 꽃이 춤추듯 일렁거리고 제멋대로 자란 망초 꽃향기가 방안 가득 퍼집니다

 

비가 오면 푸르게 자라는 원시의 새 삶. 나는 푸른 식탁에서 오래도록 식사를 즐깁니다 승리한 경주마처럼 월계관을 만들어 쓰고 천천히 되새김질 합니다 당신과 함께라면 더욱 좋겠지만 삶의 방식이 다른 당신의 문명을 원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미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이 비가 그칠 때면 당신은 이 편지를 보며 여전히 쳇바퀴 돌겠지요

그 시간 나는 유유히 산속을 거닐며 풀을 뜯고 있을게요

    

행복을 빌어요 안녕!

(2018. 7.1)

 

- 시집, <유랑의 날들>(현대시, 2019)

 

년 후, 복잡한 도시를 떠나 강화도 먼 바다가 보이는 곳에 집을 하나 마련하여 귀촌하겠다는 말을 내뱉고 몇 년 전부터 열심히 강화를 드나들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거창한(?) 꿈과 계획을 가지고 시작했으나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꿈이 소박하게 되는 건지, 자신감이 없어지는 건지 의기소침해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괜히 쓸데 없은 짓을 하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 때 박동덕 시인이 보낸 '초대장'이 내 가슴을 또다시 쿵덕쿵덕 뛰게 하네요. - 석전(碩田)

 

* p.s. : 얼떨결에, 세 편의 시를 읽고 말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