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식물이 되어 바라보다 / 사람 - 박찬

석전碩田,제임스 2020. 4. 29. 06:39

식물이 되어 바라보다

 

                            -박찬

 

어제는 참 힘든 날이었네. 계곡을 휘돌아 세찬 바람 불고 비 내려 나는 온통 젖어 흔들리고 있었네. 한 자리에서 근 백 년을 살아온, 이를테면 어지간한 비도, 바람도 견딜 수 있을 만큼 튼튼한 뿌리를 가졌지만, 어제 같은 비바람에는 그래도 뿌리가 흔들릴 지경이었네.

 

움직이는 것들은 세상을 가만히 놔두지 않네.

바람도, 비도, 생각도······.

 

용케 견디어낸 밤이 지나고 햇살 반짝이면 언제 무슨 일 있었냐는 듯, 태연자약하네. 태연자약! 나의 원래 표정이네. 아직도 몸을 타고 물이 흐르네. 그러나 이미 젖을 대로 젖어 더이상 차갑지 않네. 그것은 차라리 등걸 구석구석, 묵은 때를 씻어주는 아버지 손길 같으네.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으면 다 보이네. 바람도 비도 새도 찰나의 생각까지도. 움직이는 것들은 결코 볼 수 없는 세상 모든 것. 물 무늬 지는 노을빛 하늘, 또는 소리의 향기까지도.

 

- 시집, <먼지 속 이슬>(문학동네, 2000)

 

* 감상 : 박찬 시인

 

1948 11월 전북 정읍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3년 월간 <시문학>상리마을에 내리는 안개는을 발표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습니다. 대학 졸업 후 스포츠서울 기자, 서울신문 문화생활팀장과 편집부국장, 논설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영상물등급위원회 부위원장,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한국문학평화포럼 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지병인 간암을 이기지 못하고 환갑도 넘기기 전인 20071월 작고하였습니다 

 

 

집으로는 <수도곶 이야기>(1985), <그리운 잠>(1989), <화염길>(1995), <먼지 속 이슬>(문학동네, 2000), <외로운 식량>(문학동네, 2008, 유고시집), 그리고 실크로드 문화기행집 <우는 낙타의 푸른 눈썹을 보았는가>(1997) 등을 펴냈습니다.

 

를 기억하는 문인들은 그를 문단의 여러 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도 단 한번도 우쭐거리지 않고 늘 그림자처럼 조용하게 서 있던 시인 박찬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모임에 참석할 때에도 자기가 근무하는 언론사의 직함을 들고 참석하는 게 아니라, 늘 그저 시인으로서 당당하게 여러 문인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고 싶어 했던 박찬 시인.

 

늘 감상하는 시는 이런 박찬 시인의 이력을 조금 알고 나면 훨씬 더 빨리 다가오는 뭔가가 있습니다. 소위, 언론 고시를 뚫고 일간신문의 기자가 되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취재하면서 그는 다양한 모습의 군상들을 목격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시에서 그들을 움직이는 것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불나방처럼 권력의 주변을 쉴새없이 날아다니며 아부하며 출세를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 아마도 이 시가 씌여졌을 때가 그가 큰 중대한 결심을 했는 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느 날 그가 갑자기 사표를 내고 아무 대책없이 남들이 다 부러워하는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두었을 때가 바로 참기 힘든 세찬 바람이 부는 날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온통 젖어 흔들렸고 백년을 버텨오면서 웬만한 바람에는 거뜩도 하지 않을 정도로 튼튼한 뿌리를 내려 견뎌 왔지만, 어제 그 바람에는 뿌리가 흔들릴 지경이었으니까요.

 

직이는 것들’, 그들은 세상을 가만히 놔두지 않는 다는 말에 시인의 절망감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가만히 서 있는 나무가 되어 나를 흔들고 있는 움직이는 그들을 다시 한번 찬찬히 바라봅니다. 바람도, 비도, 생각도. 그리고 눈부신 아침 햇살이 비치는 오늘 아침, ‘태연자약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반문하는 표정인 나무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아직도 어젯밤 세차게 흔들어 대던 바람과 빗물의 여운이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내 몸을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구석구석 몸의 묵은 때를 씻어주는 아버지의 손길같다고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울컥, 진정으로 나를 이해해 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의 그리움에 목구멍에 서러운 눈물이 넘어갈 때 느낄 수 있는 그런 설움이 북받치는 듯 합니다.

 

약에 이 시가 이곳 3연으로 끝이 난다면 그저 패배 의식에 사로잡힌 글이 되고 말았겠지만, 마지막 연 첫 문장이 한 편의 시가 되도록 극적인 반전으로 이끕니다.

 

한 곳에 가만히 서 있으면 다 보이네

 

로 이 표현이 이 시의 핵심이자 정수(精髓)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움직이는 것들은 결코 볼 수 없는 그것을 가만히 한 곳에 서 있으면 다 보인다는 표현은 이 시를 통해서 시인이 하고 싶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온갖 욕심을 다 버리고, 마음을 비운 상태로 바라보면 갖가지 권모술수를 써서 아등바등 대는 군상들의 모습이 다 보인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군상들의 추악한 모습들이 다 보일 뿐 아니라, 이제는 어떻게 살아가는 게 정도(正道)인지도 함께 보이고 그리고 나는 이제 그 길을 가겠노라는 결단의 마음까지도 엿보인다는 것입니다. 알량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몸부림치는 것이 결국은 내 속에 있는 욕심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이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에도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마치 물무늬 지는 멋진 하늘에서 천사들의 합창 소리와 함께 향기가 가득 퍼지게 될 것입니다.

 

찬 시인을 한 마디로 소개하라고 하면 사람을 그리워 한 사람, 사람 냄새를 그리워 한 사람, 그리고 진정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그런 사람을 그리워 한 시인이라고 하면 될 듯 합니다. 그의 유고 시집 제일 첫 페이지에 수록된 사람이라는 제목의 시를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

 

                        - 박찬

 

사람 하나 만나고 싶다

 

생각이 무슨 솔굉이 처럼 뭉쳐

팍팍한 사람 말고

새참 무렵

또랑에 휘휘 손 씻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 나눌

낯 모를 순한 사람

 

그런 사람 하나쯤 만나고 싶다

 

- 박찬 유고시집 <외로운 식량>(문학동네, 2008)

 

인이 자신이 노래한 사람다운 사람을 만나고 이 세상을 떠났는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유족으로 남은 그의 부인(김매심)이 가까이에 있는 경성고등학교에서 국어교사(한문)로 근무했는데, 마침 지금 그 학교의 교장으로 있는 동기 친구에게 어제 근황을 물었더니 2년 전에 정년퇴임을 하였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기야, 만약에 그런 사람을 만나고 싶은데 만나지 못했다면 생각을 바꿔 내가 누군가에게 그런 사람이 되어 준다면 되는 일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몇 년 전, 먼 길을 먼저 떠난 한 동료가 생각이 납니다. 누구보다도 생각이 무슨 솔굉이 처럼 뭉쳐져서 팍팍한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러나 그도 죽기 전에는, ‘삶의 비결을 내가 알게 되었다면서 저에게 일부러 찾아 와 그 정답을 알려 주었는데 그것은, ‘그저 다 내려 놓고 쉰내 나는 보리밥 한 사발 찬물에 말아서 나눠 먹어도 서로 흉 보지 않을 순한 사람이 되면 된다고 말했습니다.

 

가 황망히 이 세상을 하직하는 날, 부고 소식에 기우뚱 거리는 몸을 지탱하며 그의 떠남을 슬퍼해 주는 동료가 있으니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의 장례식에서 '영전에 바치는 시', 저와 동향인 경북 성주 출신 문인수 시인이 쓴 시를 소개해 봅니다. 두 시인은 살아생전 절친으로 지냈던 막역한 사이였는데, 아마도 비슷한 연배에, 같은 동국대학교에서 공부했고 또 느지막하게 시업의 길을 걷는 인연 때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오후 다섯 시

-() 박찬 시인 영전에

 

                                     - 문인수

 

내가 한쪽으로 기우뚱, 할 때가 있다.

부음을 듣는 순간 더러 그렇다.

그에게 내가 지긋이 기대고 있었다는 것 아닌가, 그가 갑자기

밑돌처럼 빠져나갔다. 나는 지금

오랜 세월 낡은 읍성 같다.

 

"조금 전, 오후 다섯시에 운명했습니다."

2007119.

그의 이마 쪽 초록 머리카락 한줌,

염색이 아니라 섣달

시린 바람 아래 웬 생풀 나부끼는 것 같은 날.

 

도대체, 인생이 어디 있나,

있긴 있었나 싶을 때가 있다.

나 허물어지는 중에 장난치듯

한 죽음이 오히려 생생할 때 그렇다.

 

- 시집, <배꼽>(창작과 비평사, 2008)

 

구름 잡으려고 공자망(空自忙)하고 있는 부생(浮生)들은 절대로 들을 수 없는 정답을 이 아침 함께 나눌 수 있어 행복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