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세상의 등뼈 - 정끝별

석전碩田,제임스 2020. 5. 6. 06:35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 시집, <삼천갑자 복사빛> (민음사, 2005)

 

* 감상 : 정끝별 시인. 196411, 전남 나주에서 태어났습니다. 명지여고를 졸업하고 이화여자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학··박사를 취득, 명지대학교 교수를 거쳐 2014년부터는 모교인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1988<문학사상>칼레의 바다6 편의 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44년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서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는 <자작나무 내 인생>(1996), <흰 책>(2000), <삼천갑자의 복사빛>(2005), <와락>(2008), <은는이가>(문학동네, 2014), <봄이고 첨이고 덤입니다>(문학동네, 2019) 등이 있으며 시론·평론집으로 <패러디 시학>(1997), <천 개의 혀를 가진 시의 언어>(1999), <오록의 노래>, <파이의 시학>, <시심전심>,<>(마음의 숲, 2014), <삶은 소금처럼 그대 앞에 하얗게 쌓인다> 등이 있습니다.

 

끝별 시인은 리듬과 이미지가 충만한 시정으로 독특한 시 세계를 보여주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또한 그녀는 패러디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하고 우리 현대시에 접목하고 해석하여 그 문학적 역할과 의의를 정립하기도 하였고, 시 자체가 가진 무한한 언어의 가능성을 발견하여 평론 자체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시를 써서 그것을 증명해 낸 시인으로도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2014년 그녀의 다섯 번째 시집인 <은는이가>를 펴낼 때, 책의 서문에 <시인의 말>을 이렇게 썼습니다.

 

다섯 번째 패를 돌린다// 이렇다 할 도박력도 없이 / 이렇다 할 판돈도 없이//

발바닥에 젖꼭지가 돋거나/ 손바닥에 닭살이 돋거나/(201410/ 정끝별)

 

치 대중 앞에 보잘 것 없는 시집을 내는 겸양을 나타내는 듯 하지만, 다 읽고 나면 표현 하나하나가 돈을 걸고 치는 타자들의 고스톱 판을 연상하는 듯한 탁월한 패러디에 감탄하게 되는 짧은 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끝별의 시 읽기 一笑一老]라는 일간 신문 고정 코너에 오랫동안 시를 소개한 이력 덕분에, 그리고 그 글들을 모아 <>라는 시평집을 내기도 했기 때문에 정끝별이라는 이름이 눈에 익은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시인의 이름 끝별은 예명이 아니라 본명입니다. 그녀의 부모는 출산의 고통 끝에 얻은 어린 생명이 뿌듯했을 것입니다. 그 뿌듯함으로 갓난아기에게 끝별이라는 이름을 지어 준 그들은 아기가 자라서 끝내는 빛나는 별이 되리라는 기대와 열망을 굳이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 기대와 열망대로 그녀는 나라 안에서 가장 유명한 여자대학교를 나와 박사가 되고 드디어 그 대학의 교수가 되었습니다. 시와 평론을 종횡으로 누비며 이름을 내고 문단에서는 제 자리를 찾아 우뚝 섰습니다. 이런 이름을 가진 그녀의 꿈은 본디 크지 않았습니다.

 

어릴 적 꿈은 한적한 종점에 떠 있는/집어등 같은 수예점 하나 갖는 것이었는데/배갯모마다 한 배 병아리를 거느린 암탉과/크낙한 떡갈나무 그늘을 수놓는 것이었는데/삐끗했으리라 먹물길 한가운데 들어/시시로 곤한 몸이 앉지도 서지도 못한다/.........

    

(토정비결을 보다일부 발췌, 시집 <흰책> 중에서)

 

늘 감상하는 시는 담장을 스멀스멀 넘어서 자라고 있는 담쟁이라든지, 줄 장미, 그리고 가지가 휘 늘어지는 수양버들과 같은 넝쿨 식물이 경계를 넘는 것이 소재가 된 시이지만, 그저 그런 보이는 풍경에만 머물지 않고 넘어 가는 것에 시적 은유를 실어 아슬아슬 삶의 모습과 그 현상 이면에 있는 더불어 사는 삶의 지혜를 탐구한 절묘한 시입니다.

 

양버들의 긴 가지가 담을 넘어 간 단순한 상황도 그 이면을 들여다보면 얼굴 한번 마주친 적이 없는 뿌리와 그리고 꽃과 잎 등이 서로 얽히고 설켜 굳건한 믿음으로 가지와 하나가 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깨달음에서부터 이 시는 시작됩니다. 혼자 독불장군으로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시적 은유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야장창 내리는 빗줄기나 밤 새 속절없이 내린 폭설도 함께 어울렸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저 말없이 서 있는 담벼락도 그곳에 그렇게 서 있지 않았다면 담 저 쪽에 새로운 세계가 있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기에, 결국 그 담 자체도 공범(?)이라는 데까지 사유를 확장해 나갑니다.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하고 또 담 바깥을 꿈도 꾸지 못할 처지였지만 하얀 무명 천 위에 큰 붓으로 획을 긋는 것과 같이 함께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지에게 담은 도박이자 도반(道伴)이라는 마지막 표현이 그저 말의 유희가 아닌 극적인 반전이 됩니다.

    

인은 이 시를 통해서 아마도 자신은 금단의 벽이어서 넘어가지 못했고 또 지금도 못하고 있지만, 나무 가지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뿌리와 꽃, 잎과 밤새 내리는 비, 폭설 등과 함께 맘껏 넘나들고 싶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시인의 다른 시 하나를 읽으면, ‘더불어 함께하는이런 시적 은유를 시인이 즐겨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의 등뼈

 

                          - 정끝별

 

누군가는 내게 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돈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입술을 대주고

누군가는 내게 어깨를 대주고

 

대준다는 것, 그것은

무작정 내 전부를 들이밀며

무주공산 떨고 있는 너의 가지 끝을 어루만져

더 높은 곳으로 너를 올려준다는 것

혈혈단신 땅에 묻힌 너의 뿌리 끝을 일깨우며

배를 대고 내려앉아 너를 기다려준다는 것

 

논에 물을 대주듯

상처에 눈물을 대주듯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

한 생을 뿌리고 거두어

벌린 입에 거룩한 밥이 되어준다는 것, 그것은

 

사랑한다는 말 대신

 

- 시집 <와락> (창비, 2008)

 

준다는 말은 어찌 보면 야한 표현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대주는행위가 누군가를 더 높은 곳으로, 더 깊은 곳으로 일깨워 줄 수 있다면 그래서 대주는것의 극적인 이미지인 누군가의 밥이 되어 줌으로써 사랑을 대신 할 수 있다면 기꺼이 세상의 등뼈가 되어 주리라 다짐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보게 되는 것입니다.

 

탄한 미래가 보장되지 않은 도박같은 인생길 일지라도 같은 방향으로 걸어가는 도반이 함께 한다면, 신명나게 담을 넘는 수양버들의 가지처럼 용기를 내 볼 일입니다. 그리고 끝 모를 바닥에 밑을 대주듯이 한 생을 밥이 되어 주는 일’, 그것이 사랑이라면 더욱더 그 사랑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그 담장을, 떨지않고 또 머뭇거리지 않고 넘어볼 일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