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아배 생각 / 얼굴 - 안상학

석전碩田,제임스 2020. 5. 20. 06:36

아배 생각

 - 안상학

뻔질나게 돌아다니며
외박을 밥 먹듯 하던 젊은 날
어쩌다 집에 가면
씻어도 씻어도 가시지 않는 아배 발고랑내 나는 밥상머리에 앉아
저녁을 먹는 중에도 아배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 니, 오늘 외박하냐?
- 아뇨, 올은 집에서 잘 건데요.
- 그케, 니가 집에서 자는 게 외박 아이라?

집을 자주 비우던 내가
어느 노을 좋은 저녁에 또 집을 나서자
퇴근길에 마주친 아배는
자전거를 한 발로 받쳐 선 채 짐짓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 야야, 어디 가노?
- 예……, 바람 좀 쐬려고요.
- 왜, 집에는 바람이 안 불다?

그런 아배도 오래 전에 집을 나서 저기 가신 뒤로는 감감무소식이다.

― <문학과경계> 2005년 여름호 / 시집 <아배 생각>(애지, 2008)

* 감상 : 안상학 시인. 1962년 6월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습니다. 198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1987년 11

월의 新川’이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첫 시집으로 <그대 무사한가>(한길사, 1991)를 냈고, <안동소주>(실천문학, 1999), <오래된 엽서>(천년의시작, 2003), <아배 생각>(애지, 2008),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 2014), 한영대역 시선집 <안상학 시선> 등과 동시집 <지구를 운전하는 엄마>, 인물평전 <권종대-통일걷이를 꿈꾼 농투성이>, 서화집 <시의 꽃말을 읽다>를 펴냈습니다. 한국작가회의 사무처장을 역임했고 권정생 사후에 설립된 어린이 문화재단의 사무처장을 맡기도 했습니다.

상학 시인의 시를 소개하려는 마음을 먹고 어떤 시를 선택할까 고민이 있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아배 생각’은 그의 네 번째 시집 표제작으로 많이 알려 진 시입니다. 매년 5월이면 생각나는 사람 중 한 사람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노래한 시이기도 하고, 또 경상도 방언으로 아버지를 부르는 용어인 ‘아배’라는 말에 정겨움을 느끼게 만드는 토속적인 시여서 선뜻 선택은 했지만 처음에는 그의 시 ‘얼굴’을 소개하려고 했습니다. 자연을 보고 늘 변하지 않는 모습으로 ‘자연스럽게’ 자신의 얼굴을 보여주는 나무와 풀과 꽃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보는 시입니다.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 속절없는 수 만 가지 카멜레온 같은 얼굴로 살아가는 자신을 성찰하는 시가 더 묵직하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진하게 담겨 있는 ‘아배 생각’을 읽는 순간, 평소 애써 꾸민 흔적은 없지만 무게와 깊은 울림을 주는 시를 쓰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고, 또 비슷한 년배의 경상도 출신인 ‘안동소주 시인‘이라는 별칭이 붙은 그를 소개하는 시로는 이 '아배 생각'이 제격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렇지만 이쯤에서 선택을 하는데 많이 망설이게 했던 다른 시, ‘얼굴’도 함께 읽어 보는 것도 좋을 듯 합니다.

얼굴

 - 안상학 
 
세상 모든 나무와 풀과 꽃은
그 얼굴 말고는 다른 얼굴이 없는 것처럼
늘 그 얼굴에 그 얼굴로 살아가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닌 때가 많다는 것을 알고 있다
 
꽃은 어떤 나비가 와도 그 얼굴에 그 얼굴
나무는 어떤 새가 앉아도 그 얼굴에 그 얼굴
 
어쩔 때 나는 속없는 얼굴을 굴기도 하고
때로는 어떤 과장된 얼굴을 만들기도 한다
진짜 내 얼굴은 껍질 속에 뼈처럼 숨겨두기 일쑤다
 
내가 보기에 세상 모든 길짐승, 날짐승, 물짐승도
그저 별다른 얼굴 없다는 듯
늘 그렇고 그런 얼굴로 씩씩하게 살아가는데
나는, 아니래도 그런 것처럼, 그래도 아닌 것처럼
진짜 내 얼굴을 하지 않을 때가 많다
 
나는 오늘도
쪼그리고 앉아야만 볼 수 있는 꽃의 얼굴과
아주 오래 아득해야만 볼 수 있는 나무의 얼굴에 눈독을 들이며
제 얼굴로 사는 법을 배우는 중이다 
 
-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실천문학사, 2014)

저 주변에 있는 평범한 삶 속의 소재들이 꾸밈이나 장식의 언어가 전혀 없지만 큰 감동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그의 대표적인 시들입니다. 그의 표현대로 그의 시는 오래 묵힐수록 깊은 맛이 나는 '안동 소주'와 같다고나 할까요. 굳이 시 해설을 하지 않아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이지만, 읽고 나면 뭔가 여운이 진하게 남는 것이 특징입니다. 오래 전, 집을 나선 후로는 감감 무소식이신 아버지를 포함해서 그리운 사람들이 많이도 시인의 곁을 떠난 이 5월에 읽기에는 더 없이 좋은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특히 청년기의 방황과 아픔, 그리고 아버지가 떠난 후 뒤늦게 알게 된 삶과 인생의 의미들을 깊은 성찰을 통해 시로 녹여낸 두 편의 시를 감상하는 아침이 행복합니다.

인에게 있어서 5월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시간인 것 같습니다. 늘 소소한 것까지도 나누며 지냈던 사랑하는 누이가 떠난 때도 5월이었고, 평생 뉘우치며 살아도 모자를 정도로 가슴에 피 눈물을 흘리게 했던 ‘아배’가 떠난 것도 5월이었습니다. 그리고 5월 23일, 마음속으로 늘 존경하고 배우며 따르려고 했던 안동 출신 권정생 시인이 황망히 이 땅을 떠난 날도 5월이었습니다. 권정생 시인이 떠난 날을 생각하면서 쓴 그의 시 ‘5월’에서 그는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해는 또 한 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5.18은 이제 어느 달력에나 있으니 안심하지만/ 내년 달력이 생기면/ 5월 23일에 동드라미를 하나 더 그려야겠습니다.// 오래 지날수록 더 그리워질 사람들의 오월/흰 꽃송이 더미 더미 조문하는 오월입니다. (시집, <그 사람은 돌아오고 나는 거기 없었네>)

난히도 흰 꽃들이 많이 피는 계절 5월입니다. 아카시아, 찔레꽃, 이팝나무, 불두화, 감나무꽃, 그리고 이맘 때 쯤 우리 들녘에 지천으로 피는 개망초도 흰 꽃입니다.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이런 흰 꽃이 피는 5월을 ‘오래 전에 죽은 자를 생각하는 달’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난 주 일요일 아침, 안산 둘레길을 한 바퀴 도는 산책을 하면서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아카시아와 찔레꽃, 그리고 그들의 향기에 취해 그냥 보내기엔 아쉬울 뻔한 ‘5월’의 신록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2002년 어느 날, 폐암으로 숨쉬기가 쉽지 않아 힘겨운 사투를 하시며 하루 하루 버텨오셨던 아배가 이 땅을 떠나던 날 마지막 순간을 기억합니다. 숨이 끊어지신 후이지만 끝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으셨는지 계기판의 수치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염려하고 계셨던 일이 있었는데, '그 듣고 싶은 말'을 아버지의 귀에 큰 소리로 ‘아버지 걱정 마세요. 제가 알아서 할께요’라고 외쳤더니 그제서야 마음 편히 떠나셨던 그 순간을 말입니다.

마다 연희동 104 고지에 하얀 아카시아 꽃이 만발하여 짙은 향기 흩날리는 요즘 같은 때가 되면, 그 아배가 금방이라도 '그케, 내 말이 그 말이다.'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실 것 같은 그리움이 사무칩니다. - 석전(碩田)

안산 둘레길에서 안상수, 홍기택 선배와 함께 트레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