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위대한 스승 - 자연에 바치는 노래 / 문병란

석전碩田,제임스 2020. 5. 13. 07:35

위대한 스승

자연에 바치는 노래

 

                                          - 문병란

 

거리에 나서면

서로 다투어 서있는 드높은 빌딩과 간판들

술집, 다방, 당구장, 호텔, 오락장, 목욕탕,

약방, 병원, 성당, 교회, 학교, 경찰서.

 

문명 사회의 통계를 보면

수천 배 수만 배 늘어난 온갖 범죄와 질병들

구석구석 병든 지구 위에

굶주림과 전쟁의 상처 낭자하다.

 

노는 문화가 건강을 좀먹고

약과 병원이 병을 키우고

성당과 교회가 사랑을 가두고

경찰서와 법원이 범죄를 보호하고

 

마침내 지구는 거대한 정신병동

온갖 문명의 쓰레기 넘치는 곳에서

반생명의 과학, 자연을 파괴하고 죽이는

살인의 지식이 생명을 모독하고 있다.

 

자연은 말없는 위대한 스승

한 잎 풀잎의 속삭임 앞에

가만히 무릎 꿇고 귀 기울일 때

병은 절로 낫는다

흙은 생명의 자양,

햇살과 공기와 물은 생명의 보약,

병은 낫는 게 아니라 지니고 산다.

 

3백 개 뼈마디 속마다

구절양장 오장육부 구석구석마다

은밀한 속삭임 있어 귀 기울이면

동맥을 타고 피가 흐른다

경락을 타고 우주가 속삭인다.

 

병은 생명의 스승

수억 개 세포와 온갖 세균의 공존공생까지도

사람을 숨 쉬게 한다.

스스로 치료하는 명의가 되게 한다.

 

오 위대한 화타여 자연이여.

 

- 시집, <새벽의 차이코프스키>(계몽사, 1997)

 

* 감상 서은(瑞隱) 문병란 시인. 193

 

5년 전남 화순에서 태어났습니다. 조선대학교 문학과를 졸업한 후 명문 순천고, 광주 제일고, 전남고 등에서 교사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때 민중과 통일을 노래하는 참여시를 썼다는 이유로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배후 조종자로 수배당하고 투옥되는 등 고초를 치르면서 해직의 아픔을 겪었습니다. 육군 77병원에서 수감 형태의 병상 생활 중 사면이 되었습니다. 1988년 모교인 조선대학교에 조교수로 임명되었고, 평생을 교수로 재직하다가 지난 2000년 정년 퇴임하였으며, 2015925일 향년 80세의 일기로 작고하였습니다. 1963<현대문학>에 시 가로수가 추천되었고, ‘꽃밭’ ‘무등산’ ‘밤의 호흡등의 시가 당시 조선대학교에서 가르쳤던 김현승 시인이 추천을 3회 받아들여 추천 완료로 등단하였습니다. 1970년 첫 시집인 <문병란 시집>을 시작으로 <정당성>(1973), <죽순밭에서>(1977), <호롱불의 역사>(1978), <벼들의 속삭임>(1980), <땅의 연가>(1981), <새벽의 서>(1983), <동소산의 머슴새>(일월서각, 1984), <아직은 슬퍼할 때가 아니다>(1984), <5월의 연가>(1986), <무등산>(1986), <견우와 직녀>(1991), <새벽의 차이코프스키>(1997), <인연서설>(1999),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2001) 등의 시집을 냈습니다. 마지막 시집은 그동안의 시들을 골라 엮어낸 시선집, <장난감이 없는 아이들>(2015)이 있습니다.

 

사 독재정권의 탄압에 맞서 저항하며 현실의 부조리를 형상화하거나 의식의 내면을 탐구하는 지극히 참여적인 시를 써 온 시인의 시 중 직녀에게라는 시는 민주화 세대들은 대부분 기억할 정도로 남과 북을 견우와 직녀로 비유하여 노래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특히 이 시는 가수 김원중이 노랫말을 붙여 곡으로 부르면서 세대를 아우르는 노래가 될 정도였습니다.

 

인이 달려 온 삶은 어쩌면 슬픈 나라, 슬픈 시절을 온 몸으로 관통해야 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의 일화 중에는 강연 약속을 어기지 않기 위해 눈 내리는 충청도 어느 골짜기까지 달려가서 청중이 열 명도 채 되지 않는 시골 마을 사람들 앞에 섰던 일이 전해집니다. 어렵게 도착해서 농민의 문제, 민족의 문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역설하면서 시 강연을 하고 있는데, 몇 안 되는 청중들 틈에 과거 광주에서 시인을 연행해 갔던 광주 경찰서 정보과 소속 형사도 앉아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모습이라 하기엔 너무도 슬픈 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2000년을 전후하여 시인의 시는 참여시에서 서정시로 바뀌면서 삶의 질곡을 승화하는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였습니다. 물론 그저 서정적이기만 한 시가 아니라 서정과 서사가 한 숨결로 만나서 도도하게 흘러가는 깊은 강물처럼 사람들의 가슴 속에 울림을 주는 서정시를 썼습니다. 정년퇴임 후에는 서은문화연구소를 개원하여 지역 사회에서 삶에 녹아드는 문화교류 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광주문학관 개관, 시온고등학교의 이사장, 서은 문학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지역 문학의 현안에도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문단의 어른으로서 힘을 쏟았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평생 교단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사도의 길을 걸은 사람으로서, ‘위대한 스승은 결국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깨달음을 자신의 아픈 몸으로 몸소 느끼며 절절하게 노래한 시입니다. 그는 병든 몸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자연으로 돌아가 조용하게 한 잎 풀잎의 속삭임에 무릎을 꿇고 귀 기울일 때 저절로 낫는다고 노래합니다. 햇살과 공기 물이 어울어져 한 잎 우주를 만들었으니 그 우주의 속삭임을 들을 수만 있다면 절로 병이 나을 뿐 아니라 낫는 것보다 더 큰 축복인, 그 병을 지니고 함께 살아갈 수 있다는 역설도 이야기합니다. 왜냐하면 병은 곧 말없는 생명의 위대한 스승이기 때문입니다.

    

시를 읽으면서 인간이 정복하려고 하는 이라는 실체를 통해서 오히려 배우는 게 많다는 것을 깨닫는 시인의 깨달음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또 한편으로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거대한 정신병동 같이 변한 것이 바로, 우리 인간의 욕심과 무지 때문이므로 이제는 자연의 숨결을 들으며 살아가자고 목소리를 높이는 시인의 노래에 응원의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지 않는 바이러스 때문에 21세기 초과학 문명을 자랑하던 온 세계가 우왕좌왕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는 요즘과 같은 상황을 보면서 이 시가 더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동안 사람이 하지 못했던 것을 아주 작은 자연의 실체인 바이러스는 일시에 모든 것을 해냈으니까 말입니다. 얼마 전 SNS 공간에 아프리카 오지의 나라 <차드>의 한 문인이 쓴 글이라고 소개된 글이 갑자기 생각이 납니다. 그 글의 일부를 한번 인용해 보겠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 하찮은 것'에 의해 흔들리는 인류. 그리고 무너지는 사회...

 

코로나 바이러스라 불리우는 작은 미생물이 지구를 뒤집고 있다.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인가가 나타나서는 자신의 법칙을 고집한다. 그것은 모든 것에 새로운 의문을 던지고 이미 안착된 규칙들을 다시 재배치한다. 다르게.. 새롭게..

    

서방의 강국들이 시리아, 리비아, 예멘에서 얻어내지 못한(휴전. 전투 중지) 것들을 이 조그만 미생물은 해냈다. 알제리 군대가 못 막아내던 리프지역 시위에 종지부를 찍게 만들었다. 기업들이 못해내던 일도 해냈다. 세금 낮추기 혹은 면제, 무이자, 투자기금 끌어오기, 전략적 원료가격 낮추기 등..시위대와 조합들이 못 얻어낸 유류가격 낮추기, 사회보장강화 등등도(프랑스 경우) 이 작은 미생물이 성취해 내었다. 순식간에 우리는 매연, 공기오염이 줄었음을 깨닫게 되었고 시간이 갑자기 생겨 뭘 할지 모르는 정도가 되었다.

 

부모들은 자신의 아이들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고, 아이들은 집에서 가족과 함께 하는 시간에 대해 배우기 시작했으며 일은 이제 더 이상 삶에서 우선이 아니고, 여행, 여가도 성공한 삶의 척도가 아님을 깨닫기 시작했다.

 

우리는 곧 침묵 속에서 스스로를 돌아보기 시작했으며 '약함''연대성'이란 단어의 가치에 대해 이해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가난하거나 부자거나 모두 한 배에 타고 있음을.. 시장의 모든 물건들을 맘껏 살 수도 없으며 병원은 만원으로 들어차 있고 더 이상 돈으로 해결되는 문제들이 아님을 깨닫게 되었다. 코로나 바이러스 앞에서는 우린 모두 똑같이 연약한 존재일 뿐이라는 것도.. 외출할 수 없는 주인들 때문에 차고 안에서 최고급차들이 잠자고 있으며 그런식으로 단 며칠만으로 세상에는 사회적 평등(이전에는 실현 불가능해 보였던)이 이루어졌다.

 

공포가 모든 사람을 사로잡았다.(중략)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확신이 불확실로.. 힘이 연약함으로, 권력이 연대감과 협조로 변하는데에는.. 아프리카가 (코로나에) 안전한 대륙이 되는 것, 많은 헛된 꿈들이 거짓말들로 변하는 데에는 단 며칠이면 충분했다.

 

인간은 그저 숨 하나, 먼지일 뿐임을 깨닫는 것도..(후략)]

 

으로 위대한 스승, 자연으로부터 배운 게 엄청난 역사적인 순간을 우리는 지금 실시간으로 경험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글과 오늘 우리가 감상하는 시를 나란히 놓고 보면 그 형식은 다를지 몰라도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와 내용은 본질적으로 동일합니다. 20년 전에 씌여진 시인데도 바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오늘도 혹시 내가 코로나19에 노출되지는 않았을까 전전긍긍하고 있는 나에게 하는 말 같다는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아침, 시의 마지막 연을 마치 주문처럼 다시한번 읽어 봅니다.

    

병은 생명의 스승/ 수억 개 세포와 온갖 세균의 공존공생까지도 /사람을 숨 쉬게 한다. /스스로 치료하는 명의가 되게 한다. // 오 위대한 화타여 자연이여.’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