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어처구니 /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석전碩田,제임스 2020. 3. 18. 06:42

어처구니

 

                                  - 이덕규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마늘밭에 덮어 놓았던 비닐을

겨울 속치마 벗기듯 확 걷어버렸는데요

거기, 아주 예민한

숫처녀 성감대 같은 노란 마늘 싹들이

이제 막 눈을 뜨기 시작했는데요

나도 모르게 그걸 살짝 건드려 보고는

갑자기 손끝이 후끈거려서 또

그 옆, 어떤 싹눈에 오롯이 맺여 있는

물방울을 두근두근 만져보려는데요

세상에나! 맑고 깨끗해서

속이 환히 다 비치는 그 물방울이요

아 글쎄 탱탱한 알몸의 그 잡년이요

내 손가락 끝이 닿기도 전에 그냥 와락,

단번에 앵겨붙는 거였습니다

 

어쩝니까 벌건 대낮에

한바탕 잘 젖었다 싶었는데요

근데요 이를 또 어쩌지요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

 

- 시집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 감상 : 이덕규 시인. 19615월 경기도 화성에서 태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난 여느 아이들처럼 평범하게 성장하던 그에게 고등학교 2학년 사춘기 무렵, 사이좋게 지내던 친 누나가 갑자기 세상을 뜨면서 말할 수 없는 슬픔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그 슬픔의 막다른 골목에서 그는 를 만났습니다. 그 이후, 그는 무슨 일을 하든 시에 대한 열망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대학에 진학할 때에도 그는 시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토목공학과에 입학했고 또 졸업 후 건설 현장에서 토목기사로 일을 했지만 한번 찾아온 시마(詩魔)는 쉽게 그를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1996년 돌연 직장을 그만 둔 그는 고향 화성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며 시 작업에 전념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의 나이 서른 일곱이 되는 해인 1998<현대시학>양수기4 편의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시집으로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문학동네, 2003), <밥그릇 경전>(실천문학사, 2009), <놈이었습니다>(문학동네, 2015) 등이 있으며 현대시학 작품상(2004), 시작문학상(2010), 그리고 오장환문학상(2016)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지난 달 2020219, 경기민예총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동탄이 개발될 때 개발비용으로 건설사에서 무엇을 해 줄지 논의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노작 홍사용문학관의 명예관장과 선임연구원으로 지역 사회에 봉사하고 있습니다. 


촌에서 나고 자랐으니 그의 시적 상상력이 농사짓는 일과 연관이 있음은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도 그가 농사를 지으면서 얻은 작품입니다. 요즘과 같이 이른 봄날 마늘밭 비닐을 걷다가 노란 어린 마늘 싹에 맺힌 이슬을 손끝으로 건드리면서 느낀 것을 걸쭉한 표현으로 노래한 시인데, ‘어처구니없게도 시적 표현이 상당히 성적이고도 속됩니다. 그리고 좋게 말하면 생명력을 느끼게 하는 시입니다. 마지막 행의 손가락이, 손가락이 굽어지질 않습니다요라는 엄살 섞인 너스레가 야하다기 보다는 빙그레 웃음이 지어지면서 그저 재미난 시에 한바탕 잘 젖었다는 생각이 들게 합니다.

 

, 그의 이런 시적인 재능은 첫 시집인 <다국적 구름공장 안을 엿보다>가 출간될 때 그가 서문으로 쓴 자서(自序)를 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이 글을 읽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떨렸다는 표현을 했고, 또 어느 평론가는 그는 지금 고향에 안착하여 땅을 일구고 시의 영지를 일구는 농사꾼/시인으로 산다. 그의 시에서는 근육의 힘이 느껴지는데, 그 근육은 '삽질 가래질 쟁기질 써래질 호미질 낫질'(연애질) 따위의 온갖 로 단단하게 다져진 근육이다라고 극찬했습니다.

 

自序

 

[스무 살 가을밤이었다. 어느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깜박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어떤 서늘한 손 하나가 내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왔다. 순간 섬뜩했으나, 나는 잠자코 있었다. 그때 내가 가진 거라곤 날선 칼 한 자루와 맑은 눈물과 제목 없는 책 따위의 무량한 허기뿐이었으므로.

 

그리고, 이른 아침 호주머니 속에선 뜻밖에 오천 원 권 지폐 한 장이 나왔는데, 그게 여비가 되어 그만 놓칠 뻔한 청춘의 막차를 끊었고, 그게 밑천이 되어 지금껏 잘 먹고 잘 산다.

 

그때 다녀가셨던 그 어른의 주소를 알 길이 없어......, 그간의 행적을 묶어 소지하듯 태워 올린다. 화성에서, 이덕규]

 

의 자서에 등장하는 낯선 간이역이 어떤 이는 섬진강변의 압록역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고 또 다른 역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글은 정련된 사유와 야생의 정서가 잘 버무려져 탄생된, 그야말로 건강한 근육이 만져진다는 것입니다. 삶의 대부분을 대지에 굳게 발을 딛고 서서 땅의 기운을 전신으로 호흡하며 건져 올린 시어들을 강약과 완급의 조절에 탁월한 그가 버무려 내면 농후한 표현도 이내 투명한 물방울처럼 탁월한 상상력이 되니 가히 언어의 연금술사임에 분명합니다.

 

성시 정남면에 있는 보통 저수지 근처에서 시인은 1 년여에 걸쳐 손수 지은 흙집에서 살고 있습니다. 집을 토우방(土愚房)’이라 이름지었습니다. 농사, 그것도 유기농법을 고집하며 환경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는 그와 딱 어울리는 집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1065, 종로구 사간동에 있는 대한출판문화회관 4층 강당에서는 특별한 시상식이 하나 거행되었습니다. 이덕규 시인의 두 번째 시집인 <밥그릇 경전>이 제4회 시작(時作)문학상을 타게 된 것입니다. 실천문학이 그동안 시집 디자인을 안상수 교수(파주 타이포그라피 학교 PaTi 교장, 전 홍익대 교수)에게 맡기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었는데, 시집 내기를 한사코 반대하는 이덕규 시인을 설득하는데, 디자인을 안 교수가 한다는 말에 그가 시집을 내기로 용기를 냈다는 후문을 들었습니다. 예술가들은 일면식도 없지만 서로 이렇게 통하는 것일까요. 그 날 시상식에 참가한 시집의 디자이너 안 상수 교수는 이덕규 시인의 <밥그릇 경전>을 디자인 하면서 시를 알게 되었고 좋아하게 됐다며 본인이 손수 디자인한 LED 꽃다발을 선사하였다고 합니다. 분야는 다르지만 예술하는 사람들이 서로 격려하고 함께 소통하는 모습이 아름답지 않을 수 없습니다.

 

쯤에서 그에게 두 개의 상을 안겨 준 시, ‘밥그릇 경전을 한번 읽어 봐야 할 듯 합니다.

 

밥그릇 경전

 

                               - 이덕규

 

어쩌면 이렇게도

불경스런 생각들을 싹싹 핥아서

깨끗이 비워놨을까요

볕 좋은 절집 뜨락에

가부좌 튼 개밥그릇 하나

고요히 반짝입니다

 

단단하게 박힌

금강(金剛) 말뚝에 묶여 무심히

먼 산을 바라보다가 어슬렁 일어나

앞발로 굴리고 밟고

으르렁 그르렁 물어 뜯다가

끌어안고 뒹굴다 찌그러진,

 

어느 경지에 이르면

저렇게 제 밥그릇을 마음대로

가지고 놀 수 있을까요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 외운

이빨 경전이 시리게 촘촘히

박혀있는 , 그 경전

꼼곰히 읽어내려 가다보면

어느 대목에선가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 그러는

 

*조주선사와 어느 학인과의 선문답   

-2004년 제9<현대시학작품상> 수상작, 시집 <밥그릇 경전>(실천문학, 2009)

 

단하게 박힌 말뚝의 금강(金剛) 줄에 매여 있지만 제 밥그릇 다루는 솜씨 하나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황구에게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그야 말로 경전에 가까운 시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시인이 시어를 다루는 수준이 거의 '도가 턴 경지'라고나 할까요. 시의 마지막에 슬쩍 집어 넣은 그러는이라는 한 단어 때문에 자칫 종교적인 가르침을 이야기하는 듯한 아슬 아슬한 낭떠러지에서 시를 극적으로 건져올리는 묘미가 있으니, 이 경지야 말로 경전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아침마다 '오늘의 1분 묵상'을 나누면서 성경의 경전을 묵상하고 있다지만, 이덕규 시인의 툭툭 던지는 듯한 시 두 편을 읽으면서 그저 부끄러움을 느낄 뿐입니다.

 

그릇 테두리에 잘근잘근 씹어서 외운 이빨 자국들을 꼼꼼히 읽어 내려가다 할 일 없으면 가서 밥 그릇이나 씻어라는 조주 선사의 말이 생각났다는 시인과 같이 제 마음 속에서는 이 시를 읽으면서 자꾸 이 말이 들려옵니다.

 

니나 잘 해라, 그러는-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