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사랑 / 감자 / 꼭 한 번은 - 박형진

석전碩田,제임스 2024. 6. 26. 06:00

사랑

 

- 박형진

 

풀 여치 한 마리 길을 가는데

내 옷에 앉아 함께 간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언제 왔는지

갑자기 그 파란 날개 숨결을 느끼면서

나는

모든 살아 있음의 제 자리를 생각했다

 

풀 여치 앉은 나는 한 포기 풀잎

내가 풀잎이라고 생각할 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 여치

하늘은 맑고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

나는 나를 잊고 한없이 걸었다

 

풀은 점점 작아져서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나는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오늘 알았다.

 

- 시집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 가고>(창작과 비평, 1994)

 

* 감상 : 박형진 시인.

1958년 전라북도 부안군 도청리 모항 마을에서 7남매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아홉 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졸업하자마자 변산 중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기를 마친 후 가출, 서울로 상경하여 서울에 한 달 정도 지내다가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으니, 그의 공식적인 학력은 중학교 한 학기 중퇴가 전부입니다.

 

러다가 다시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때가 그의 나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중학교 강의록을 사서 독학으로 검정고시를 준비하며 공부하려 했지만 영어, 수학이 그의 발목을 잡았습니다. 또 서울로 올라가 그즈음 각 공간에서 운영되던 교양강좌를 찾아다니며 나름 지식을 넓혔습니다. 그리고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알게 된 운동권 누님 덕분에 자신을 시인으로 이끈 신동엽 시인의 시 ‘금강’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시를 필사하면서 문학에 대한 눈을 뜬 그는, 수원의 아카데미 하우스에서 농민 교육, 농촌문제 등에 대한 강의를 듣고, ‘지금 네가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다, 농촌이다. 농촌을 바꾸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채 일 년도 되지 않았던 서울 생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시인이 고향을 떠나 살았던 이력의 전부가 되었습니다.

 

후 시인은 고향에서 유치원 교사였던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고 카톨릭 농민회와 함께 농민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 후 전국농민총연맹(이하 ‘전농’)이 결성되자 전농(全農)에서 활동하기도 했지만, 이미 그의 마음속 깊숙이 자리 잡은 ‘문학을 향한 열정’은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1992년 전농 부안지부의 사무국장직을 그만두던 해, 그의 열정은 시와 산문으로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1992년 <창작과 비평>(봄호)에 ‘봄편지’ 외 6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등단한 그는, 농촌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글로 옮겨 놓기 시작했습니다. 농사꾼으로 살아가면서 그 속에서 살아가는 농촌의 삶과 모습을 그의 표현대로 ‘울퉁불퉁한 그릇에 담아’ 내기 시작했습니다. 농촌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글’이라는 형태로 옮겨 놓은 것이 그의 시가 되었고, 그의 산문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가 지금까지 펴낸 시집으로는 첫 시집인 <바구니 속 감자 싹은 시들어 가고>(창작과 비평, 1994)을 비롯해서, <다시 들판에 서서>(당그레, 2001), <콩밭에서 : 가난한 농사꾼의 노래>(보리, 2011), <밥값도 못하면서 무슨 짓이람>(천년의 시작, 2019), <내 왼쪽 가슴속의 밭>(천년의 시작, 2022) 등이 있습니다. 산문집으로 <호박국에 밥 말아 먹고 바다에 나가 별을 헤던>(내일을 여는 책, 1996), <모항 사람 술안주는 사람 씹는 맛이제>(디새집, 2003), <변산 바다 쭈꾸미 통신>(소나무, 2005), <농사짓는 시인 박형진의 연장 부리던 이야기>(열화당, 2015) 등이 있으며, 어린이책으로 <갯마을 하진이>(보리, 2011), <벌레 먹은 상추가 최고야> 등이 있습니다. 특히, 2015년에 펴낸 <연장 부리던 이야기>는 ‘조선 농기구 산책’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농사 현장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우리 농기구 이야기를 통해 그 안에 깃들어 있는 가치와 생활양식을 일깨워 주는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학자 윤구병 교수가 주도했던 변산 공동체를 만드는데도 참여했던 그는 세 딸(푸짐, 꽃님, 아루)과 아들(보리) 모두 변산 공동체 학교에서 공부시켰으며, 2017년에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변산 공동체 대안학교의 교장이 되어 2021년까지 봉사했습니다. 지금은 전북 부안 지역의 문인들과 함께 교류하며 유기농 농사짓고, 시 짓고, 글 짓는 ‘농사꾼 문학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 ‘사랑’은 설명이 특별히 필요 없을 정도로 그저 평범한 일상의 사건을 한 편의 시로 노래했습니다. 시인이 길을 가는데 여치 한 마리가 날아와 자신의 옷에 앉은 것을 보고 모든 생명의 제자리가 어떤 것인지 특별한 깨달음을 얻었다고 노래한 단순한 내용입니다.

 

제 날아왔는지 모르지만 풀 여치 한 마리가 날아와 내 위에 앉았으니 시인 자신이 풀이되었다는 발상이 이 시의 ‘시적 은유’가 되어 시 전체의 밑바닥에 흐르고 있습니다. 풀잎이 된 시적 화자인 ‘나’는 ‘하늘은 맑고 / 들은 햇살로 물결치는 속 바람 속’을 나를 잊고 한없이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점점 작아져서 / 새가 되고 흐르는 물이 되고 / 다시 저 뛰노는 아이들이 되어서’ 비로소 ‘이 세상 속에서의 나를 알았다 / 어떤 사랑이어야 하는가를 / 오늘 알았다.’고 외치며 큰 깨달음의 세계에 도달하게 되었음을 큰 소리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작은 한 마리 풀 여치를 통해서 이 땅에 있는 만물이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함께’ 길을 가는 상상력으로 확장해 가는 시인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그때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눕고 송아지와 사자 새끼가 함께 먹으며 어린아이들이 그것들을 돌볼 것’(이사야서 11장 6절)이라고 노래했던 이사야 선지자의 노래가 불현듯 생각나기도 합니다.

 

여치가 시인을 풀잎으로 생각하여 앉았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을 해치는 적(敵)이 아니라 그저 풀잎으로 여겼기에 무서움과 공포에 떠는 존재가 아닌, ‘그도 온전한 한 마리 풀 여치’가 될 수 있었다는 표현이, 3연에서 그가 노래한 ‘이 세상 속에서’ ‘어떤 사랑’을 해야 하는지를 깨달았던 내용과 상관(相關)을 이루며 전체적으로 시의 긴장감을 받쳐주고 있습니다.

 

족하지는 않지만 농사 일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는 그의 시 몇 편을 더 감상하려고 합니다. 그의 시에는 흙냄새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비록 몸은 고되고 힘들지만 꾸밈없는 시어와 푸진 고향 맛 나는 어투로 삶의 여유가 묻어나는 노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감자를 심다 말고 ‘그 자리 뻗대고 서서’ 오줌 누는 모습을 바로 앞 개나리가 활짝 웃으며 보고 있는 광경이 수채화의 한 장면처럼 스쳐 지나가는 익살스러운 시입니다.

 

감자 2

 

- 박형진

 

감자 심다 말고 뭉기적뭉기적

마누라

엉덩이 내리고 오줌을 눈다

 

어이, 어이 이봐

저 산 우에서 누가 보면 어쩔려고 그래?

 

나는 호들갑 손가락질을 하는데

낯 두꺼워진 마누라 한다는 소릴 봐라

아, 내 밭에다 내가 거름도 못 줘?

 

그래 맞다 맞아!

누가 보든 말든

내 밭에다 눈다는데 언놈이 상관이람

 

골마리 부시럭부시럭

나도 그 자리 뻗대고 서서

오줌을 눈다

 

개나리 피어서 웃든 말든

 

- 시집 <콩밭에서>(도서출판 보리, 2011)

 

‘콩밭’이라는 시적 은유를 원초적인 본능과 연결하여 노래한 ‘꼭 한 번은’이라는 시는 시인이 그저 농사만 짓는 꽉 막힌 ‘꼰대’가 아니라, 삶을 해학과 유머를 즐기면서 살아갈 줄 아는 ‘생활인’임을 잘 보여주는 시입니다. 직장(?)의 동료인 아내와 근무 현장인 밭이랑에서 할 수 있는 유머 넘치는 대화를 소개하는 이 시는 읽는 이로 하여금 빙그레 미소를 짓게 합니다.

 

꼭 한 번은

 

- 박형진​

 

꼭 한 번은 콩밭에서 하고 싶어

칠칠이 우거진 콩밭 고랑

아내와 내가 김을 매다가

꼭 한 번은 콩밭에서 하고 싶어

나는 장난스레 옆구리를 찔렀네

우리 한번 하고 하자 응?

아내는 뚱한 표정

뭔 소린지 처음에는 몰랐나 봐

보는 사람 없을 때 한 번만 응?

그제사 내 등을 꼬집으며 이 사람

미쳤어 미쳤어 한 마디

하지만 나 어릴 적 어머니

저 밭둑 감나무 그늘 밑 콩밭 매다 땀 들이실 때

아버지 옆에 앉아 다정하게 구셨다네

그래서 내가 생겼는지도 몰라

아마 그런 건지도 몰라

콩들도 낯 붉히며

우리도 어서 익자 어서 익자

지들끼리 속삭였는지도 몰라

 

- 시집 <콩밭에서>(도서출판 보리, 2011)

 

‘나 어릴 적 어머니 / 저 밭둑 감나무 그늘 밑 콩밭 매다 땀 들이실 때 / 아버지 옆에 앉아 다정하게 구셨다네 / 그래서 내가 생겼는지도 몰라 / 아마 그런 건지도 몰라’ 반복되는 리듬이 정겹고 맛깔스럽습니다. 콩밭에서 김을 매다가 엉뚱한 장난을 치면서 고된 순간을 즐거움으로, 또 먼저 간 부모님의 모습을 생각하며 그리움으로 승화시키는 시인의 시적 재능이 엿보이는 멋진 시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콩들을 ‘한 가족’으로 지칭하며 ‘함께 하는 존재’로 받아들이는 노래가 외설스럽다기보다 경건한 감동을 주기까지 합니다.

 

‘흙과 물을 살리는 일이 곧 나를 살리고 이웃을 살리는 일’이라고 말하며 건강한 먹거리 생산을 위해 유기농법을 고집하고 있는 그가, 팍팍한 농촌의 삶에서 건져 올리는 주옥같은 시편들이 거대 공룡 맘몬 주의에 빠져 허우적대는 현대인들에게 한 줄기 시원한 소나기처럼 다가가 참 안식을 줄 수 있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