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정지의 힘 / 지켜지지 못한 약속 - 백무산

석전碩田,제임스 2024. 7. 10. 06:00

정지의 힘 

 

– 백무산

 

기차를 세우는 힘, 그 힘으로 기차는 달린다

시간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미래로 간다

무엇을 하지 않을 자유, 그로 인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안다

무엇이 되지 않을 자유, 그 힘으로 나는 내가 된다

세상을 멈추는 힘, 그 힘으로 우리는 달린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는 달리는 이유를 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

 

- 시집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시선, 2020)

 

* 감상 : 백무산 시인. 본명은 백봉석.

1955년 경북 영천에서 태어났습니다. 1974년 현대중공업에 노동자로 입사해 노동을 하다가 1984년 무크지 <민중시> 제1 집에 ‘지옥선’을 발표하면서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노동해방문학> 편집위원을 지냈고, 1992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적도 있습니다.

 

1984년 등단 이후, 대기업 공장 노동자 출신 시인으로 크게 관심을 받아 왔으며 박노해 시인과 함께 80년대 노동을 주제로 하는 시를 발표하며 노동자들의 삶과 생각을 대변해 온 시인으로 이름을 알렸습니다. 90년대 이후에도 꾸준히 노동 시를 써왔지만, 자본의 폭력성을 고발하고 폭넓고 근원적인 문제로 관심의 폭을 넓혀가며 생태 문제는 물론 인간 삶의 근원을 파헤치는 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시집으로는 <만국의 노동자여>(청사, 1988), <동트는 미포만의 새벽을 딛고>(노동문학사, 1990), <인간의 시간>(창비, 1996), <길은 광야의 것이다>(창비, 1999), <초심>(실천문학사, 2003), <길 밖의 길>(갈무리, 2004), <거대한 일상>(창비, 2008), <그 모든 가장자리>(창비, 2012), <그대 없이 저녁은 오고>(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폐허를 인양하다>(창비, 2015),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비, 2020) 등이 있습니다.

 

1989년 이산문학상, 1997년 만해 문학상, 2007년 아름다운 작가상, 2009년 오장환 문학상과 임화 문학상, 2012년 대산문학상(시 부문), 2015년 백석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현재, 그는 여전히 글을 읽고 쓰면서 문학을 가까이하며 그가 스스로 표현했듯이, ‘처음처럼 같은 공간’에서 ‘별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지난 2020년 6월, 코로나19가 한창 창궐하여 모든 사람의 일상이 멈춰버렸을 때,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 있는 [광화문 글판]에는 백무산 시인의 ‘정지의 힘’에 실린 ‘씨앗처럼 정지하라 /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는 시어가 걸렸습니다. 당시 비록 불안과 혼돈, 공포와 절망의 현실이 휩쓸고 있었지만 ‘잠시 쉬어가며 자신을 돌아보고, 또 정지의 시간을 통해서 일보(一步) 전진을 향한 성찰의 기회로 생각해 보자는, 위로의 메시지를 나누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세계인이 열광하는 올림픽 경기의 모토가 ‘더 빨리, 더 높이, 더 강하게’였던가요. 온통 앞으로만 나가며 멈출 줄 모르는 우리네 삶이 마치 무엇인가에 미쳐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멈추면 그대로 쓰러지고 마는 달리는 자전거처럼, 계속해서 페달을 밟아야 안정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현대인들은, 어쩌면 시지포스(Sisyphus)의 돌을 굴리는 운명의 멍에를 지고 있는 존재이기도 한듯합니다. 아마도 시인은 이런 우리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이 시를 노래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달리던 것을 멈추고 잠시 멈춰 서보자는 것, 무언가를 해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자유를 가져보자는 것, 희망찬 미래로만 내몰 것이 아니라 잠시 시간을 멈춰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한번 생각 해보자는 것. 그것이 바로 시인이 목소리 높여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삶의 꽃을 피우는 일, 그것은 바로 그 ‘정지된 씨앗’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말하고 싶었다는 말입니다. ‘씨앗처럼 정지하라, 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는 마지막 문장이 큰 우레 소리로 들려오는 시편입니다.

 

어제는 양재동에 있는 도로교통공단 교육실에 가서 하루 종일 교통법규 교육을 받았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고요? 36년 전에 취득했던 ‘운전면허’가 갑자기 정지되었다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제가 늘 이용하는 동네의 한적한 2차선 이면 도로에 신호와 과속을 단속하는 CC 카메라가 설치되었습니다. 지난 6월 초, 그 길 위에서 3일 연속으로 똑같은 새벽 시간에 30 키로미터 과속 단속에 적발되었습니다. 연거푸 3장의 위반 딱지를 우편으로 통보받고 속상해하다가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벌금 6만원과 과태료 7만원’ 중에서 한 푼이라도 싼값에 빨리 해결하려고 벌금으로 납부했습니다. 홀가분(?)하게 지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또 한 장의 우편물이 날아왔습니다. ‘또 내가 과속했나?’하는 짜증 섞인 마음으로 뜯어보니, 이번에는 ‘귀하의 면허가 정지되었으므로 속히 경찰서로 출두하라’는, 삼십여 년 운전했지만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무시무시한 통보’였습니다. 경찰서에 가서 알아본 결과, 과태료로 내면 벌점이 없는데, 벌금으로 낸 순간 운전자가 본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1회당 벌점 15점도 부과되어, 합산 45점의 벌점이 부과되어 벌점 40점이면 처분되는 ‘면허 정지’가 되었다는 설명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갖고 있던 운전 면허증은 빼앗겼고, 한 달간의 임시 운전 면허증을 발급받았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내에, 면허 정지된 45일의 정지 일수를 차감해 주는 교육을 받으면 난감한 상황 없이 면허증을 되돌려 받을 수 있다는, 전혀 친절하지 않은 ‘친절한 안내’를 받은 후 돌아왔습니다. 어제 받았던 ‘기본 법규 교육’을 통해 20일, 그리고 또 한 번의 ‘법규 교육’을 받으면 추가 30일, 면허 정지 일수가 차감된다는 것입니다.

 

투덜대면서 불만스러운 마음으로 교육에 임했지만, 가만히 앉아서 까마득한 옛날에 들었던 운전 기본 소양 교육을 들으며 느끼는 게 참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백무산 시인의 이 시가 바로 생각이 났습니다. 면허가  정지되었을 때, 비로소 그동안 내가 어떻게 운전했는지 그 실상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지에 이르렀을 때, 우리가 달리는 이유를 안다’는 시인의 말이 조용한 위로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종일 강의를 들으며, 백무산 시인이 최근 발표한 또 다른 시도 검색해서 읽을 수 있는 행복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으니, 만약 면허가 정지되는 이런 일을 겪지 않았다면 결코 이 시를 만나지 못했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지켜지지 못한 약속

 

- 백무산

 

그 약속이 지켜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세월이 까마득 흐른 뒤에 그 사실을 알고

감전된 듯 눈앞에 번쩍 그려지던 그 길

 

열아홉 살, 모든 것이 시작되던 나이

우린 모두 어디론가 떠나야만 했던 나이

멀리서 내게 연락을 주기로 한 곳이 있었지

모두 부러워하던 그곳

하지만 나는 마냥 기다릴 수가 없어

전화가 있는 친구에게 부탁을 하고 동해남부선을 탔지

남포가 터지고 철골들이 비명을 지르고

쇳가루 먼지 두껍게 뒤덮던 바닷가 철강 공단으로

 

소식은 오지 않았고 친구는 떠나고 없고

그리고 모든 걸 잊었네 까맣게 잊어버린 일

사십 년도 더 지난 뒤에 알게 되었다네

내게 연락 않고 그 친구가 대신 갔다는 사실을

나는 청량리행 완행열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지만

발이 묶였네 그 친구와 나는 반대의 길을

걸었네 모든 게 반대인 삶을

 

내게 왔어야 할 그 소식 놓친 일로

얼마나 달라졌을까 지나온 날들 기억에서 다 풀려나오면

어쩌자는 건가 원망해야 할까 고마워해야 할까

지난날 고통스런 시간들 새삼 밀려오지만

마치 누명 쓰고 옥에 갇힌 듯

아니 어쩌면 그 감옥이 나의 행운인 듯

 

줄을 잘못 선 건 맞지만

내 줄이 꼭 어디라고 할 순 없으니

어떻게 살았건 안타까운 생은 매한가지

오지 않은 날들이여 잘 가라 작별할 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길 위에 선 존재인가

 

그래도 꼭 한 가지 궁금한 건

그곳에서 누굴 만나서

사랑하고 미워하며 눈물 흘렸을까?

그 사람 어디선가 한 번은 스쳐 지나간 적 있던 사람일까?

 

- 계간 <시에>(2024년 여름호, 통권 74호)

 

이 시를 읽으면, 까마득한 옛날 시인 자신이 가야 할 그 자리에 친구가 대신해서 갔고 시인은 다른 곳에 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자기 대신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가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소식을 듣고 그의 주검 앞에서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친구를 슬퍼하면서 부른 노래로 추정됩니다. 그리고 친구였지만, 이생에서는 서로 한번 스쳐지났을까 싶을 정도로 정반대의 삶을 살았던 친구와 나, 그 삶이 바뀌었으면 지금 얼마나 달라졌을지 ‘줄을 잘못 선 건 맞지만 / 내 줄이 꼭 어디라고 할 순 없으니 / 어떻게 살았건 안타까운 생은 매한가지’라고 노래하며, ‘그래도 꼭 한 가지 궁금한 건 / 그곳에서 누굴 만나서 / 사랑하고 미워하며 눈물 흘렸을까?’ 묻는 시인의 목소리가 우울하게 들려옵니다.

 

잠시 삶의 길을 멈추어 서서, 시인의 이 질문에 진솔하게 답하는 시간을 가져 볼 일입니다. 나는 ‘누굴 만나서 / 사랑하고 미워하며 눈물 흘렸을까?’ 정지에 이르렀을 때야 비로소 알 수 있는 그 대답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