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399

입추에 여지없다 할 세네갈産 - 김민정

입추에 여지없다 할 세네갈産 - 김민정 구운 갈치를 보면 일단 우리 갈치 같지 그런데 제주 아니고는 대부분이 세네갈産 갈치는 낚는 거라지 은빛 비늘에 상처나면 사가지를 않는다지 그보다는 잡히지를 않는다지 갈치가 즐기는 물 온도가 18도라니 우아하기도 하지 즐기는 물 온도를 알기도 하고 팔자 한번 갑인고로 갈치의 원산지를 검은 매직으로 새내갈, 새대가리로 읽게 만든 생선구이집도 두엇 가봤단 말이지 세네갈, 축구 말고 아는 거라곤 시인 레오폴 세다르 상고르가 초대 대통령을 역임했다는 세네갈, 그러니 이명박 대통령도 시 좀 읽으세요 했다가 텔레비전 책 프로그램에서 통편집도 당하게 만들었던 세네갈, 수도는 다카르 국가는 ‘모든 국민이 그대의 코라와 발라폰을 친다네’ 코라와 발라폰을 치며 놀라고 대통령이 권하는 ..

동무 생각 - 이은상 작사 / 박태준 작곡

동무 생각 - 이은상 봄의 교향악(交響樂)이 울려 퍼지는 청라(靑蘿)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靑蘿)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白沙場)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潮水)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潮水)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서리 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진 연당(蓮塘)에서 금어(金魚) 뛸 적에 나는 깊이 물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진 연당(蓮塘)과 같은 내 맘에 금어(金魚)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적에는 모든 슬픔이..

비가 와도 이제는 - 오규원

비가 와도 이제는 - 오규원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 비가 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픈 것은 슬픔도 주지 못하고 저 혼자 내리는 비뿐이다. 슬프지도 않은 비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 들고 오, 그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비가 온다. 슬프지도 않은 비. 저 혼자 슬픈 비.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비에 젖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가면도 없이 맨얼굴로 비 오는 세계에 참가한다. 어느 것이 가면인가. 슬프지도 않은 비. 저 혼자 슬픈 비. - 시집 (민음사, 1975 초판, 1995 개정판) * 감상 : 오규원 시인. 1941년 12월 경남 밀양시(삼랑진읍 용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규옥(圭沃)이며 호적상으로는 1944년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겨울 사랑 - 고정희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편지 10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보이는 것을 바라는 것은 희망이 아니므로 - 마종기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 마종기 봄밤에 혼자 낮은 산에 올라 넓은 하늘을 올려보는 시간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별들의 뜨거운 눈물을 볼 일이다. 상식과 가식과 수식으로 가득 한 내 일상의 남루한 옷을 벗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오늘 밤, 별들의 애잔한 미소를 볼 일이다. 땅이 벌써 어두운 빗장을 닫아걸어 몇 개의 세상이 더 가깝게 보이고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면 느린 춤을 추는 별 밭의 노래를 듣는 침묵의 몸, 멀리 있는 줄만 알았던 당신, 맨발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 신약 빌립비서 2장 12절 - 마종기 시집 (문학과지성, 2002) * 감상 : 마종기(馬鍾基) 시인, 의사. 1939년 1월 17일 대한민국 최초의 동화 작가인 마해송과 현대무용가 박외선의 사이에서 도쿄에서 태어났습니..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 - 장석주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 - 장석주 세상에서 내가 본 것은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들, 살아 있는 것들의 끝없는 괴로움과 죽은 것들의 단단한 침묵들, 새벽하늘에 떠가는 회색의 찢긴 구름 몇 장, 공복과 쓰린 위, 어느 날 찾아오는 죽음뿐이다. 말하라 붕붕거리는 추억이여. 왜 어떤 여자는 웃고, 어떤 여자는 울고 있는가. 왜 햇빛은 그렇게도 쏟아져 내리고 흰 길 위에 검은 개는 어슬렁거리고 있는가. 구두 뒷굽은 왜 빨리 닳는가. 아무 말도 않고 끊는 전화는 왜 자주 걸려 오는가. 왜 늙은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고 공원의 비둘기 떼들은 한꺼번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 시집 (문학과지성사, 1991) * 감상 :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편집인. 1955년 1월 8일, 충남 논산 연무에서 태어났습..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파초우(芭蕉雨) - 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 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어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 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 조지훈 시선집 (1956) * 감상 : 조지훈 시인. 1920년 12월 경북 영양군 일월면 주곡리 주실 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조동탁(趙東卓)이며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혜화전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1939년 4월 지에 ‘고풍의상’이 처음 정지용 시인에 의해 추천 되었고 그해 11월 ‘승무’, 그리고 1940년 ‘봉황수’를 발표함으로써 추천이 완료되어 등단하였습니다. 1941년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의 강사를 역임하기..

'비양도'를 노래한 시 모음

비양도 - 손택수 섬이 외로울까봐 섬이 솟았네 깍지는 끼지 않았으나 손끝 진동이 파르르 전해올 듯, 마주 보는 일 하나만으로도 파도가 치고 물새들이 우는 곳이라네 솟은 섬이 외로울까봐 바짝 당겨 앉다, 그냥 두네 멈춘 자리를 지키기로 하네 팔짱을 끼는 대신 바다가 들어와 살라고 *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남 담양 강쟁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초.중.고교, 그리고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국제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창작과비평, 2003), (창비, 2006), (실천문학사, 2010), (창비, 2014), (창비교육, 2017..

중년에 찾아 온 당신 / 유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중년에 찾아 온 당신 - 이채 당신! 어디서 무얼하다 이제서야 날 찾아 오십니까 짝 잃은 철새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다 아직도 난 둥지가 없습니다 오후의 쓸쓸한 가슴으로 당신이 올 줄 알고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끝없이 외롭고 멀기만 한 여정의 길 이제 중년의 역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리움과 외로움의 세월 속에서도 아무도 자리하지 않던 가슴 이제 당신과 함께 갈등 없이 살겠습니다 당신! 거친 손이지만 내 손을 잡아 주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희망의 손과 나의 인고의 손을 잡고 아늑한 둥지를 틀고 싶습니다 중년에 찾아 온 당신 중년에 찾아 온 소중한 당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 시집 (행복에너지, 2015) * 감상 : 이채, 본명은 정순희. 시인. 패션디자이너. 1961년 7월, 경북 울진에서..

하늘은 지붕 위로 - 폴 베를렌

하늘은 지붕 위로 - 폴 베를렌(Paul Marie Verlaine) 하늘은, 저기, 지붕 위에서, 너무도 푸르고 참으로 조용하구나! 종려나무는, 지붕 위에서, 잎사귀 일렁이고. 하늘 가운데 보이는 종 부드럽게 우는데, 나무 위에 슬피 우짖는 새 한 마리. 아하, 삶은 저기 저렇게 단순하고 평온하게 있는 것을, 시가지에서 들려오는 저 평화로운 웅성거림. -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울고만 있는 너는. 말해 봐, 너는 뭘 했니? 여기 이렇게 있는 너는, 네 젊음을 가지고 뭘 했니? - 시집 (1881) * 감상 : 폴 베를렌 (Paul-Marie Verlaine, 1844 ~ 1896).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 공병장교의 아들로 로렌주 메스에서 태어났습니다. 파리 대학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하였으..

그런 봄날 / 벚꽃 문신 - 박경희

그런 봄날 - 박경희 가수 윤복희 씨가 TV에서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데 담금통에 담아두었던 눈물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파 누운 지 열흘 된 그녀가 살구꽃으로 피었다가 살구꽃으로 지고 벚꽃으로 피었다가 벚꽃으로 졌다 괜스레 가는 봄날 잡아놓고 윤복희 씨 목소리에 쓸쓸해져서 잠든 그녀 얼굴 눈으로 쓰다듬는데, 길눈 어두운 딱새가 집 안으로 들어 퍼덕였다 그 소리에 눈뜬 그녀에게 부은 눈 들킬까 문이란 문 다 열어놓고 온몸으로 휘젓다가 문지방에 발가락 찧어 아파 핑곗김에 운 날 - 시집 (창비, 2019) * 감상 : 박경희 시인. 1974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1년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막막함에 고향에 내려왔다가 ‘생명평화 탁..

내일 말고 오!늘! / 꽃 지기 전에 - 권용석

내일 말고 오!늘! - 권용석 내일은 내 게으른 영혼의 도피처 내 비루한 마음의 가림막 오! 감탄하면서 깊이 기쁘게 오늘 숨쉰다 가벼워진 몸 날개 돋는 영혼 자유롭게 펄럭펄럭 오! 깊이… 늘! 기쁘게 - 에세이 시집, (파람북, 2023) * 감상 : 권용석 변호사. 1963년 인천에서 태어났습니다. 인천 신흥초등학교, 대건중고등학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사법고시에 합격하여 1992년부터 2002년까지 검사로 10년을 근무하였고, 그 이후 변호사로 15년을 살았습니다. 2022년 5월 22일, 오랜 암 투병 끝에 향년 58세의 나이로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지난주 예배 설교에서 목사님께서 잠시 언급했던 시입니다. 교회 절기로 ‘승천 대축일 또는 부활 제 7주간’이..

심야 식당 / 모르는 사이 - 박소란

심야 식당 -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천리향 사태 /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천리향 사태 - 박규리 글쎄 웬 아리동동한 냄새가 절집을 진동하여 차마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어젯밤 산행(山行) 온 젊은 여자 둘 대체 그중 누가 나와 내 방 앞을 서성이나 젊은 사미승 참다못해 문을 여니 법당 뒤로 언뜻 검은 머리 숨는 게 아닌가 콩당콩당 뛰는 가슴 허리 춤에 잡아내리고 살금살금 법당 뒤로 뒤꿈치 들고 접어드니 바람처럼 돌담 밑으로 스며드는 아, 참을 수 없는……내……음……오호라 거기라고, 거기서 기다린다고 이번에는 헛기침으로 짐짓 기별까지 놓았는데 이 환.장.할.봄날 밤, 버선꽃 가지 뒤로 그예 숨어 사라지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걸 피차 마음 다 흘린 걸 밤새 동쪽 종각에서 서쪽 아래 토굴까지 남몰래 돌고 돌다가 저 아래 대밭까지 돌고 돌다가 새 벽 도량석 칠 때까지 돌고 돌다가 온 ..

평화의 기도 - 미상

평화의 기도 - 미상 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용서하며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목케 하며 잘못이 있는 곳에는 진리를 알리고 회의가 가득한 곳에 믿음을 심으며 절망이 드리운 곳에 소망을 심게 하소서. 또한 어두운 곳에는 당신의 빛을 비추며 슬픔이 쌓인 곳에 기쁨을 전하는 사신이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먼저 위로를 베풀고 이해받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 예수 안에서 그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 감상 : 지난 5월 1일 월요일, 특별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합정동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다녀왔습니다. ..

아버지의 나이 / 아버지들 - 정호승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 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 시집 (창작과 비평, 1999) * 감상 : 정호승 시인. 1950년 1월 3일,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 삼덕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계성중학교 1학년..

칼국수 / 사월의 꽃나무 - 이명찬

칼국수 - 이명찬 지금도 그대로인지는 모르지만 부산 서면의 시장통에 가면 진짜 칼국수를 파는 집들이 있다. 밀반죽을 밀어서 날 퍼런 식칼로 슥슥 베어 넘기는 숙련된 노동이 아름다운 곳. 설익은 밀 냄새의 칼국수를 주문하던 우리는 정직했었다, 적어도 그 정확한 2백 원어치의 칼질 앞에서. 명동이나 오장동 근처를 지날 때면 요즘도 가끔 칼국수를 찾곤 하지만 그러나 아무도 수고로이 칼질하지 않는다. 기계로 빼내고도 칼국수라 우기는 공인된 공갈 한 그릇을 앞에 놓고 나는 요령부득 적당히 항복하기로 한다. 그래선지 저래선지 요즘의 칼국수는 흐물흐물 자꾸 퍼져 나오고 시장기와 적당히 타협하고 일어서는 내가 어쩌면 한 그릇 칼국수만 같아 낭패스럽다. 칼치가 갈치가 되기 바쁘게 세련된 장바구니만 좇아가듯 순화된 칼국수..

조사(弔詞) - 이병철

조사弔詞 - 이병철 나의 죽음은 나의 태어남으로 비롯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삶이란 나의 죽어감이었다 내가 살아온 것만큼 나는 죽어간 것이었다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아름답게 죽어간다는 것 그러므로 죽음이란 삶을 경작하여 피워내는 꽃이었다 지금 여기를 오롯이 살아야 하는 것은 오롯한 한 송이 꽃을 피우기 위한 것 너를 향한 내 사랑은 그 꽃의 향기였다 마침내 내 걸음에서 내 숨결이 떠났을 때 내 눈빛이 다해 다시 너를 그릴 수 없을 때 지난 내 삶을 바쳐 가꾼 그 한 송이 꽃을 품고 첫 설렘의 자리로 돌아갔다 돌아오는 자리가 다시 떠나는 자리였으므로 그 길에서 내 사랑으로 피운 그 꽃의 향기는 새로운 문을 여는 열쇠였다 그러므로 하나의 문을 닫는다는 것은 다시 하나의 문을 새롭게 여는 일이었다 나의 삶이 나의..

광야 - 이육사 / 단짝 - 김선태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1945.12.17.) * 감상 : 이육사. 시인, 독립투사. 1904년(고종 41년) 5월 18일에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원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1월 16일 향년 39세로 사망하였습니다. 본관은 진성(眞城, 遠村派).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 호는 육사(陸..

自恨 - 이매창

自恨 자한 스스로 한탄하다 - 이매창(李梅窓) 東風一夜雨(동풍일야우) 동풍에 밤새 비가 오더니 柳與梅爭春(유여맹쟁춘) 버들과 매화가 봄을 다투네. 對此最難堪(대차최난간) 이를 보며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樽前惜別人(준전석별인) 술잔 앞에 두고 애석하게 헤어진 님 생각이네. 含情還不語(함정환불어) 마음속에 품은 정 다시 말하지 못해 如夢復如癡(여몽복여치) 꿈을 꾸는 듯하다가 다시 바보가 된 듯하네. 綠綺江南曲(녹기강남곡) 거문고로 강남곡을 연주 하여도, 無人問所思(무인문소사) 이내 심사를 물어 볼 사람 없네. 翠暗籠烟柳(취암농연류) 안개낀 버들이 어스럼한 푸른빛이 쌓이고 紅迷霧壓花(홍미무염화) 붉고 희미한 안개가 꽃을 짓누르고, 山歌遙響處(산가요향처) 민요 부르는 노래 멀리서 들려오는데, 漁笛夕陽斜(어적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