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음
- 최영철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
늘 그럼그럼 어깨를 토닥여 주는 것
늘 그렁 눈에 밟히는 것
늘 그렁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늘 그걸 넘지 않으려 조심하는 것
늘 그걸 넘지 않아도 마음이 흡족한 것
늘 거기 지워진 금을 다시 그려 넣는 것
늘 거기 가버린 것들 손꼽아 기다리는 것
늘 그만큼 가득한 것
늘 그만큼 궁금하여 멀리 내다보는 것
늘 그럼그럼
늘 그렁그렁
- 시집 <찔러 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 감상 : 최영철 시인.
1956년 경상남도 창녕군 남지읍에서 태어났고 부산에서 성장하였습니다. 이십 대 초반부터 또래들과 시 동인지를 낼 정도로 열심 있는 문학청년이었던 최 시인은 그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1984년 무크 [지평], [현실시각]에 시를 발표했고 1986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연장론’이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아직도 쭈그리고 앉은 사람이 있다>(열음사, 1987) , <가족 사진>(생각하는백성, 1991), <홀로 가는 맹인 악사>(푸른숲, 1994), <야성은 빛나다>(문학동네, 1997), <일광욕하는 가구>(문학과지성사, 2000), <개망초가 쥐꼬리망초에게>(문학과경계, 2001), <그림자 호수>(창비, 2003), <호루라기>(문학과지성사, 2006), <찔러본다>(문학과지성사, 2010), <금정산을 보냈다>(산지니, 2014), <돌돌>(2017), <말라간다 날아간다 흩어진다>(문학수첩, 2018), <멸종 미안족>(문학연대, 2021)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우리 앞에 문이 있다>, <나들이 부산>, <동백꽃, 붉고 시린 눈물>, <변방의 즐거움>, <우유부단은 힘이 세다>, <시로부터> 등이 있습니다.
백석문학상(2002), 최계락문학상(2010), 이형기문학상(2011), 설송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1997년부터 10년 동안 부산예술대학 문예창작과 강사, 부산외국어대학 한국어문학부 겸임교수로 출강하기도 했습니다.
최 시인은 부산에서 살다가 지난 2011년 거처를 김해 생림면 도요리(都要里) 도요마을로 옮겼습니다. 도요리는 연극 연출가로 유명한 이윤택 시인이 도요창작스튜디오를 문 열면서 예술인들이 모여 사는 예술인공동체 마을로 바뀌었습니다. 이곳에 입주한 최 시인 부부는 도요출판사를 차려 운영하며 전업 작가로 시와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그는 ‘시 잘 쓰는 시인’, 그리고 지난 2015년에는 부산시민들이 뽑은 ‘원북 원 부산’ 도서에 그의 시집 <금정산을 보냈다>가 당당히 뽑힐 정도로 부산을 대표하는 시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문학에 빠져 신문사에서 주최하는 신춘문예에 투고하길 10여 년, 최종심에는 몇 번 올랐지만 ‘당선’이라는 영예는 늘 그를 비껴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은 ‘여기까지’라고 생각하고 단념했던 어느 해 겨울 아침, <한국일보> 하단에 적힌 ‘신춘문예 내일 마감’이란 광고를 보는 순간 시인은 희한하게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릴 적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를 저는 문학소녀(지금의 아내인 소설가 조명숙)와 일찍 결혼하여 단칸방에서 변변한 직업도 없이 가난하고 고단한 시간을 보내고 있던 때였습니다. 아이들이 있었고, 또 어느덧 나이는 서른이 넘어가는 절박한 상황, 당시 시인의 말처럼 “그만 적당히 주저앉고 싶었던” 그 순간에 시인은 이 시가 내 생애에서는 ‘마지막 시 쓰기’라고 생각하며 투고했습니다. 그리고 그 해 성탄절 즈음에 그는 당선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 이후 두 부부는 비록 가난하지만 서로를 부축하고 응원하면서 글만 써온 전업 작가의 길을 오롯이 걸어왔습니다. 그래서 시인의 시에서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진정성이 있고, 따뜻한 향기가 묻어나는 힘이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어두운 곳을 찾아 같이 아파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들의 사정을 함께 공감하며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는 삶을 몸소 살아온 시인이 이제 한국 시단의 중견 시인이 되어 ‘나이 들어감의 의미’를 시인 특유의 따뜻한 시어로 애틋하게 그려내고 있는 시입니다.
이 시를 읽으면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고 노래한 노사연의 <바램>이라는 노래가 갑자기 생각나기도 합니다. ‘큰 것도 아니고, 아주 작은 한마디 / 지친 나를 안아 주면서 / 사랑한다 정말 사랑한다는 / 그 말을 해준다면’ ‘어느 날 갑자기 세월의 한복판에 / 덩그러니 혼자 있진 않겠죠’라고 노래하는 가사 말입니다. 그런데 최 시인이 노래한 ‘늙음’도 같은 울림입니다. 늙어가기 때문에 후회스럽다든지 절망스럽다는 마음은 좀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또 거만함이나 구차스러움도 없습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에 ‘늘 그렇게 세상을 포용하고, 늘 그렇게 세상을 담아내며 늘 그럼그럼 함께하는’ 잘 익은 연민과 공감의 마음으로 가득할 뿐입니다.
‘늘 그럼그럼 어깨 토닥여 주는 것 / 늘 그럼 눈에 밟히는 것 / 늘 그럼 눈가에 맺힌 이슬 같은 것 / ...늘 그럼그럼 / 늘 그렁그렁’이 늙어가는 것이랍니다. 늙어감은 늘 그런 마음으로 이해하고 공감하면서, 눈물 그렁그렁하며 함께 울어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인이 노래하는 ‘늙음’에는 자기중심적이고 옹고집으로 낡아져 간다든지 쓸모없이 내팽개쳐지는 늙은이의 이미지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저는 상담 강의를 할 때마다 첫 시간에는 상담자가 가져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은 ‘그럴 수 있지의 마음’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내담자의 사연들을 듣다 보면 도저히 인간으로서는 용납되지 않는 비도덕적인 이야기도 있고, 또 상식적으로는 납득이 가지 않는 불합리한 이야기들이 부지기수입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경우에라도 상담자는 충고나 조언, 평가나 판단을 유보하고 ‘그럴 수 있지’ 하면서 들어줘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늙음이 ‘늘 그럼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듯이, 상담자가 갖춰야 하는 자세도 늘 ‘그럴 수 있지’하는 마음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상담자가 되어 가는 것과 풍성하게 익어가는 늙음의 과정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인 듯합니다.
최 시인이 ‘늙음’을 이렇게 원숙하게 노래할 수 있었던 이유를 눈치채게 해주는 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더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평소의 삶 속에서 시인의 시선이 늘 머무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그래서 애틋하고 따뜻한 시인의 마음이 전달되어 오는 시입니다. 아마도 이런 순간들과 마음들이 켜켜이 쌓여 세월이 가게 되면, ‘나이 듦’은 결국은 시인이 노래한 이 시와 같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시인과 같은 '특이 체질'은 아니더라도 말입니다. - 석전(碩田)
특이체질
- 최영철
막차 전철을 보낸 두실역
쇠문을 닫는 역원은 지하도 입구를
슬쩍 올려다 본다
거기 시골 차림의 노파가
바닥 한 편에 늘어놓은 채소와 함께
시들어 있다 꼭
막차 전철이 아니더라도
지하도 입구에서서 송편을 파는
아낙을 보면 나는 갑자기
배가 고프다
과학으로 설명되지 않는 이 특이체질
더운 땡볕 속에서 한참 상했을지 모를
그것들을 방 가득 풀어놓고
걸신들린 듯 먹고 싶은 허기
별로 즐기지도 않은 오징어 바나나
옥수수 고구마 길에 엎드린
이것들을 몽땅 사버리면
오늘 서로 마음 편하게
잠들 수 있을까
아니다 돈만큼 사서 몇 조각
배를 채우고도 누워 있자면
다시 허기진다
과학으로 설명될 수 없는 특이체질
오늘 밤 미처 사들이지 못한
남은 송편들 때문에
쇠문 닫긴 지 이미 오래된 지하도 입구
웬 할머니가 앉아 있을지도 모른다
다 팔아야 국밥 한 그릇 될 것 같지 않은
웬 아낙이 시들어 있을지 모른다.
- 시집 <가족 사진>(생각하는백성,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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