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그루터기 - 박승민 / 반복 - 신평

석전碩田,제임스 2023. 12. 13. 06:08

그루터기

- 박승민

벼를 베어낸 논바닥이 누군가의 말년 같다

어느 나라 차상위층의 안방 속 같다

겨울 내내 그루터기가 물고 있는 것은 살얼음 속의 푸르던 날

이 세상 가장 아픈 급소는 자식새끼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을 때

그래서 봄이 오면 농부는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를 하는 것이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 있는 그루터기들

- 시집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사, 2016)

* 감상 : 박승민 시인.

1964년생 경북 영주에서 태어났으며 숭실대학교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지붕의 등뼈>(푸른사상, 2011),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사, 2016), <끝은 끝으로 이어진>(창비, 2020) 등이 있습니다. 2013년, 시 ‘쌍계사를 떠나는 거북이’로 평사리문학상을 수상하였고, 2016년에는 박영근 작품상과 가톨릭문학상 신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작가회의 대구경북지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등학생 시절 막연히 시인이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한 경험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때부터 ‘시인이 되겠다’는 꿈으로 몸살을 앓게 하였습니다. 그 후 진학하고 싶었던 국어국문학과는 부모님의 반대 때문에 정작 가지 못하고 불문학과에 입학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대학 재학 시절에는 불문학과의 과목 보다 국문학과의 과목을 더 많이 수강하였고 또 대부분의 시간은 시문학 동아리에서 보냈습니다. 졸업 후에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서 국어학원을 운영하는 생업에 전념하다 보니 본격적인 시업(詩業)에 뛰어든 건 불혹의 나이를 훨씬 넘긴 후에야 가능했습니다.

무를 베어내고 남은 부분을 ‘그루터기’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그루터기라는 말은 지방에 따라 부르는 말이 다양합니다. 특히, 나무가 아닌 풀이나 연한 식물의 경우에는 ‘그루터기’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해서 그저 ‘밑둥치’, ‘껄때기’, ‘끌띠기’(경북), ‘끌터리’(경남), ‘끌탱이’, ‘끄렁’, ‘끄텅’(전남), ‘끌’, ‘등채기’ ‘골태기’(충남). ‘끄렁’, ‘끄트렁’, ‘끄틀’, ‘끌크레기’(충북) 등으로 불렸습니다. 내가 나고 자란 경북 성주에서도 벼를 추수하고 난 후 남아 있는 것을 ‘그루터기’라는 명칭 대신에 그저 ‘껄때기’라고 불렀던 기억이 납니다. 껄때기만 남은 벼 벤 논 위에서 겨우 내내 돼지 오줌통에 바람 넣은 수제(?) 축구공으로 온종일 동무들과 뛰어다녔던 유년의 추억이 아련하게 생각납니다.

인은 추수가 끝난 빈 들판에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는 벼 껄대기들을 시차를 두고 열심히 관찰한 듯합니다. 풍성했던 벼들이 잘려 나가고, 휭하니 남아 온갖 추위를 온몸으로 겪어내는 그 순간부터 다음 해 봄을 맞아 농부들이 새로운 농사를 위해 벼 논을 갈아엎을 때까지 시인은 유심히도 들여다본 모양입니다. 그리고 그루터기를 보면서 느꼈던 시인의 시상(詩想)이 달라지는 과정이 참 흥미롭습니다.

량한 추위에 살얼음을 끼고 있는 버려진 모습에서는 ‘누군가의 말년’과 ‘차상위계층의 안방’을 떠올렸다면, 봄이 되어 농부들이 그 밭을 한꺼번에 갈아엎는 광경에서는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와 ‘제 약점을 고스란히 빼다 박’은 ‘자식새끼’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농부가 봄에 새 농사를 하기 위해서 논을 갈아엎는 행위를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를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논바닥에 푸른색 도배하는 것’이라고 노래하면서 가차 없이 아픈 급소와도 같은 ‘그루터기 약점’을 없애려는 행위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의 마지막 연에서 그 그루터기 흔적은 결코 지울 수 있거나 갈아엎어 없앨 수 없다는 것을 시인은 이렇게 노래함으로써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등목을 하려고 수건으로 탁, 탁 등을 치는 순간 감쪽같이 그의 등판에 업혀 있는 그루터기들’이라고 말입니다.

부분을 읽는 순간, 신평 시인의 시 ‘반복’이라는 시가 생각났습니다. 세대와 세대를 흘러내려 가면서 판박이로 전달되는 ‘아비와 자식’의 생의 반복을 노래한 시인데, 박승민 시인이 ‘무자비하게 갈아엎고’ 싶었던 ‘자기 생을 이식한 흉터’와 유사한 은유로 다가왔기 때문일 것입니다.

반복  

- 신평

이제 막 날갯짓 하려는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 옛날 아버지가 텁텁한 냄새의 입김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던 똑같은 방법  
아버지와 달리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다  

구부려 올려다보는 아들의 어깨너머  
그가 겪어나갈 신산(辛酸)의 세월이 겹겹이 둘러섰다  

네가 생각하는 것 이상 훨씬 더  
세상은 차갑고 무섭단다  

내 힘 한 점 소용없을 때까지  
네 기력을 돋울 군불이 되고 싶건만  

이미 달빛이 된 아버지  
나도 곧 달빛으로 오른다  
아들은 그 아들에게 넥타이 매는 법 가르치며  
그 옛날 자신의 숨결과 닿았던 내 숨결을 기억하리  

생의 반복은  
엄숙하고 슬픈 되새김이다  

- 시집 <산방에서> (책만드는집, 2012)  

‘그루터기’는 매끈히 잘리고 나서야 비로소 살아온 세월과 흔적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떠나야 비로소 느껴지는 그리움, 고마움, 그리고 아련한 추억 등은 ‘그루터기’라는 말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시상(詩想)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이 안타까운 법칙이 한 번도 어긋난 적이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도 합니다. 그래서 신평 시인이 노래했듯이, 그것은 ‘엄숙한 슬픈 되새김’입니다.

러나 구약 성서에는 이 ‘그루터기’를 그저 황량하게 없어져 버린 ‘안타까운 슬픔의 시상(詩想)’이 아니라, 먼 훗날 돋아날 새로운 싹을 떠올리면서 희망의 노래로 승화시킨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시인이자 선지자였던 이사야입니다. 그는 이렇게 노래하며 당시 아무 희망없이 슬픔에 싸여 있던 민중들을 위로했습니다. ‘그러나 10분의 1은 살아남을 것이다. 비록 그것이 다시 소멸(消滅)될지라도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리면 그루터기는 남아 있듯이 이 땅의 거룩한 씨는 그 그루터기처럼 남아 있을 것이다.'(이사야서 6장 13절)라고 말입니다. 견딜 수 없는 차가운 한파를 맞고 있는 보잘것 없는 그루터기이지만, 그 속에는 새로운 싹이 나올 희망이 숨겨져 있다는 노래입니다.

말에는 올 겨울 최강의 동장군이 한 차례 몰려온다는 예보입니다. 아무리 춥고 힘들어도 그 속에서 '누군가의 말년이나 차상위계층의 안방 속' 같은 황량한 현실을 푸른색으로 도배하는 꿈을 꾸는 '깨어있는 시인들'이 있다면, 그리고 절망 가운데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선지자들'이 있다면 세상은 훨씬 살만한 곳이 될 것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