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 유강희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부비는 소리가 난다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12월이 되면 가슴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가 나고
누구에게나 오래된 슬픔의 빈 솥 하나 있음을 안다
- 시집 <오리막>(문학동네, 2005)
* 감상 : 유강희 시인.
1968년 전북 완주군 구이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원광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서 그의 나이 19세일 때, 시 ‘어머니의 겨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신춘문예 최연소 당선이라는 ‘뉴스’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시집으로 <불태운 시집>(문학동네, 1996)(문학동네 포에지, 2021), <오리막>(문학동네, 2005), <고백이 참 희망적이네>(문학동네, 2018) 등이 있으며, 동시집 <오리 발에 불났다>(문학동네, 2010), <뒤로 가는 개미>(문학동네, 2015), <손바닥 동시>(창비, 2018), <지렁이 일기예보>(비룡소, 2019), <무지개 파라솔>(문학동네, 2021), <달팽이가 느린 이유>(창비, 2021), 동화집 <도깨비도 이긴 딱뜨그르르>, 산문집 <옥님아 옥님아>(걷는 사람, 2023) 등이 있습니다.
어느 시인은 12월을 ‘마지막 남은 / 달력 한 장이 바람에 날려 / 그네를 탄다’고 표현하면서 지나가는 세월을 외롭고 섭섭한 심정으로 노래했습니다. 또 어떤 시인은 ‘덜렁 달력 한 장 / 달랑 까치밥 하나 / 펄렁 상수리 낙엽 한 잎 / 썰렁 저녁 찬바람 / 뭉클 저미는 그리움’(손석철의 ‘12월 어느 오후’)이라고 노래하며 그리운 사람들을 떠 올리기도 했습니다.
맞습니다. 12월을 맞는 사람들의 마음은 어느 누구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월의 덧없음이 느껴지고,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맞는 '마지막'이라는 느낌에 섭섭하고 그리움이 더 해지는 계절이며, 또 추운 겨울의 한가운데로 달려가는 즈음이라 할 수만 있다면 작은 따스한 추억이라도 소환해 내 위로를 받고 싶어지는 때이기도 합니다. 또 신앙적으로는 성탄절이 있는 대림의 계절이기도 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유강희 시인의 ‘12월’을 읽으면, 가난했던 그 시절, 그리고 춥고 힘들었던 12월의 추억 속에서 ‘왕겨 타는’ 소리처럼 ‘한 줄기 따스함을 느꼈던 순간’을 애써 찾으려고 하는 ‘시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어렵게 살던 시절, 시골에서는 벼를 정미하고 난 후 생기는 부산물 껍질인 왕겨를 그냥 버리지 않고 부엌에서 밥을 지을 때 화력이 좋은 땔감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모르긴 해도, 그 아껴 둔 화력 좋은 왕겨가 붉은 불꽃을 피우며 타들어 가 집안에 온기가 가득 퍼질 때에는, ‘빈집에 오래 갇혀 있던 맷돌이 눈을 뜬다 외출하고 싶은 기미를 들킨다’고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집안에 뭔가 좋은 일이 있었던 추억을 시인은 애써 기억해 내는 듯합니다.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이라는 순우리말인 ‘시나브로’의 전라도 방언이 ‘서나서나’라는 단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눈 내리고 추위 속에 웅크리고 서 있는 나무들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풍경을 시인은 이렇게 서정적으로 노래하고 있습니다.
‘먼 하늘에서 흰 귀때기들이 소의 눈망울을 핥듯 서나서나 내려온다 / 지팡이도 없이 12월의 나무들은 / 마을 옆에 지팡이처럼 서 있다 // 가난한 새들은 너무 높이 솟았다가 / 그대로 꽝꽝 얼어붙어 퍼런 별이 된다’
그리고, 그 속에서 가난했던 그 시절을 따스하게 했던 ‘왕겨 타는 소리’는 여전히 시인의 가슴 속에서 들려오고 있습니다. 또 시인은 그때 채우지 못했던 ‘슬픔의 빈 솥’ 하나를 기억해 내고 있습니다. 12월이 되면 시인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져 있던 ‘왕겨 부비는 소리’와 ‘왕겨 타는 소리’, 그리고 그와 더불어 시인이 소환해 낸 ‘슬픔의 빈 솥 하나’는 어쩌면 이 시를 감상하는데 이해해야 하는 ‘시적 은유’일 것입니다.
시인이 말한 ‘슬픔의 빈 솥 하나’는 그가 시인이 되게 했던 신춘문예에서 당선된 시 ‘어머니의 겨울’이라는 시를 읽으면, 어렴풋이 힌트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어머니의 갈라진 발바닥 틈’이라든지 ‘겨울의 언덕을 넘어 / 어머니의 보리밭이 불길처럼 새파랗게 타고 있’는 그 시절 가난의 추억이, 그때까지 결혼도 하지 않은 채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으면서 그 가난을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시인 자신의 당시 상황을 은유적으로 노래한 건 아닐까. 물론 시인은 그 후, 안도현 시인의 적극적인 주선으로 2015년 4월, 마흔일곱이 넘은 나이에 늦장가를 들었지만 말입니다.
어머니의 겨울
- 유강희
할아버지 산소가 멀리 보이는 무너져 내린 언덕에
어머니는 몇천 년 눈물로 헹구어 온 보리 씨를
朝鮮의 한 뼘 가슴을 파고
그 기인 어둠 홀로 찍어 삼키며
박속 같은 얼굴로 뿌리시었다.
건넌 들에 마른 이마 때리는 눈발이 내리기 전
우리들은 서둘러 우리들의 鳶(연)을 만들어야 했다.
생전 할아버지의 숨결 푸른 마음으로
대쪽을 가르고 다시 잘라 다듬어서
山脈처럼 이어온 끈끈한 人情의 밥풀을 먹여
새 날개 같은 흰옷의 韓紙에 붙이면
그대로 살아오신 우리들 어머니 모습
우리들은 언덕보다 커다란 연에 따순 핏줄 같은 연줄을 매달아
보리밭 위로 날리기 시작했다.
감나무 깨죽나무를 지나 시암골 너벙바위를 넘어
하늘 높이 마악 솟구쳐 올랐을 때
활처럼 보리밭에 서서 먼 산을 바라보시던
어머니의 그 흰 모시 수건이 보였고,
여름 한낮 날빛 번개가 휘두르고 간
어머니의 그 갈라진 발바닥 틈으로
가을 하늘보다 맑은 江물이 흐르고 있음을
아니 그보다도 그 하늘보다도 겨울의 언덕을 넘어
어머니의 보리밭이 불길처럼 새파랗게 타고 있음을
마을로 마을로 더 큰 마을로 타들어 가고 있음을.
- 1987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한 해를 보내고 또 다른 한 해를 준비하는 계절인 12월입니다. ‘왕겨 부비는 소리’, ‘왕겨 타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맑은 귀를 가진 시인처럼, 이 대림(待臨)의 계절에 '혼자 있는 슬픔의 빈 솥'이 내 주위에는 없는지 한 번 둘러보는 따스한 시간이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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