겁
- 이영광
먼 곳에 슬픈 일 있어 힘없는
원주 토지문화관의 저녁이다
속 채우러 왔다, 슬리퍼 끌고
해장국이 나오길 기다리며 신문을 뒤적이다
누군가의 소식을 읽고,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
허기가 힘을 내는 것이 우습다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이 돼본다
다행까지는 바라지 않는다
그만한 용기는 없다
허기는 아무래도 쓸쓸한 힘,
뭘 바라지 못하는 순간이 좋다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겁에 의해,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무사한 사람,
무사한 사람,
중얼거렸다
겁도 없이
중얼거렸다
- 시집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 2018)
* 감상 : 이영광 시인.
1965년 경북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 ‘지도에도 나온 적 없는’ 벽촌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고 안동에서 성장했습니다. 고려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동 대학원 국어국문학과에서 미당(未堂) 서정주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8년 계간지 <문예 중앙>에 ‘빙폭’ 등 9편의 시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습니다. 2003년 첫 시집 <직선 위에서 떨다>(창비, 2003)를 시작으로, <그늘과 사귀다>(랜덤하우스, 2007)(재판, 문예중앙, 2011), <아픈 천국>(창비, 2010), <나무는 간다>(창비, 2013),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사, 2018), <해를 오래 바라보았다>(아시아, 2019), <깨끗하게 더러워지지 않는다>(현대문학, 2020) 등을 상재(上梓)했습니다.
2008년에는 <노작 문학상>을, 2011년 청록파 시인 조지훈을 기리는 11회 <지훈상>과 11회 <미당 문학상>을 동시 수상했습니다. 2015년부터 고려대학교 세종캠퍼스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입니다.
그의 첫 시집에는 그를 소개하면서 1967년생으로 표기했으나 두 번째 시집부턴 1965년으로 바로잡았습니다. ‘바로잡았다’는 뜻은 그의 출생 신고가 실제보다 2년이나 늦어진 것을 실제 나이로 수정했다는 것인데, 그가 태어났던 의성군 단촌면 병방리는 75년에야 전기가 들어왔을 정도로 벽촌 산골이라 그전에는 호야라든지 촛불이나 호롱불로 생활했던 곳이었습니다. 당시의 부모들은 아이가 태어나면 얼마나 살지 알 수 없어 ‘기다렸다가’ 출생 신고를 하곤 했습니다. 두 번째 시집부터 65년으로 그의 출생 연도를 바로 잡은 이유는, 실제 그의 주변에 있는 67년생 시인들이 그와 맞먹으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너털웃음을 웃는 시인은 아마도 ‘사소한 불의(?)’도 절대로 참지 못하는 성격인가 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12월의 마지막 주간입니다. 이즈음에 감상할 시를 찾다가 지난해 시인의 신간 시집을 구입해 두었지만 아직까지 소개하지 못하고 있던 이영광 시인의 시 중에서 연말연시에 딱 맞는 시 두 편을 골라봤습니다.
며칠 전, 광주의 한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는 동창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주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어서 아마도 거의 2년 만에 통화가 되어 이런저런 그간의 이야기를 꽤 길게 했습니다. 그러다 ‘대학 때 은사님이 잘 계신지’ 안부를 묻길래 ‘그 두 분은 다 작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깜짝 놀라면서 ‘무슨 그런 일이 있느냐’고 말을 잇지 못했습니다.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거라는 생각을 했는데 ‘이미 돌아가셨다’니 적이 놀라고 당황스러워하는 모습이 전화선 저쪽 끝에서 전해져 왔습니다.
지난 3년간의 코로나19 팬데믹, 그리고 그 후 서서히 정상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짧은 기간 동안 주변에서 너무 많은 예상치 못한 지인들이 별세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오늘 감상하는 시에서 시인의 ‘아? 이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 놀라고 다행스러워하는 마음이 된다’는 감회가 100% 공감이 가는 이유일 것입니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누군가의 죽음을 조문하기 위해서 강원도 원주에 있는 토지 문학관 장례식장에 갔을 때 느꼈던 생각들을 소재로 우리의 삶이 하루하루 살얼음판 위를 걸어가는 것 같음을 노래한 시입니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이의 장례식장을 찾을 때면 삶과 죽음이라는 게 사실 ‘백지 한 장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더 절실히 하게 됩니다. 시인은 시장기를 달래기 위해서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 놓고 기다리는 중 뒤적거린 아침 신문에서 이미 별세했으리라고 생각했던 사람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나 봅니다. 그리고 그 생각에 이어 시인은 ‘문득 또, 누군가 내 소식을 우연히 듣고 / 아? 그 사람 아직 살아 있었구나, / 놀라길 바라는’ 실없는 마음을 가져보았다고 너스레를 떱니다. 그리고 시인은 이런 마음을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 겁’이라고 표현했는데, 특히 누군가를 조문하기 위해서 장례식장을 찾을 때면 더 자주 먹게 되는 마음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겁먹은 일’과 관련하여 저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나 해야겠습니다. 지난 7월 중순쯤이라고 기억이 됩니다. 더운 여름철이 막 시작되면서 아침 운동을 하고 나면 약간의 어지럼 증상이 느껴졌습니다. 대수롭지 않게 며칠을 지내다가 어느 날 가까이 지내는 한 분이 ‘그런 증상이 있으면 왜 빨리 병원에 가지 않느냐’는 말과 함께 ‘우리 나이에는 큰 병이 생기기 전에 잘 관리하는 게 상책’이라며 겁을 주는 바람에, 잔뜩 겁을 먹고 대학 병원을 찾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온갖 검사를 하는 소동을 거의 한 달 동안 벌인 후에야 이른바 ‘나쁜 콜레스트롤’이라고 불리는 저밀도 콜레스트롤(LDL) 수치가 많이 높아져 있다는 진단을 받고, 그 이후 계속 약 복용을 해 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몸 한 곳이라도 조금 불편한 느낌이 들면 덜컥 겁부터 나는 걸 보면, 나이가 들긴 했나 봅니다.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밥보다도 더 자주 먹는 이 / 겁에 의해, / 오늘도 무사하지 않았느냐고 // 무사한 사람 / 무사한 사람’이라고 겁도 없이 스스로 중얼거리며 위안을 가지는 나이 말입니다.
이 해가 가고 나면 '그 나이'를 또 한 살을 더 먹게 되는데, 새해를 맞으면서 노래한 이영광 시인의 신년 시 한 편을 더 감상해 보겠습니다.
1월 1일
- 이영광
새해가 왔다
1월 1일이 왔다
모든 날들의 어미로 왔다
등에 해를 업고,
해 속에 삼백예순 네 개 알을 품고 왔다
먼 곳을 걸었다고
낳고 싶다고,
환히 웃으며 왔다
어제 떠난 사람의 혼령 같은
새 사람이 왔다
삼백예순다섯 사람이 들이닥쳤다
얼굴은 차차 익혀 나가기로 하고
다 들이었다
같이 살기로 했다
무얼 머뭇거리느냐고 빈집이
굶주린 귀신처럼 속삭여서였다.
- 시집 <끝없는 사람>(문학과지성, 2018)
시인이 1월 1일 첫날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며 ‘모든 날의 어미’가 ‘환하게 웃으며 왔다’고 표현한 시어가 참 좋습니다. 그리고 해를 쳐다보며 ‘무얼 머뭇거리느냐고 빈집이 / 굶주린 귀신처럼 속삭여서였다.’며 온 마음으로 그를 받아들였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비록 스스로는 굶주린 귀신 같은 빈집일지라도 ‘사랑은 다 귀신’이라고 시인이 평소에 노래했듯이, ‘삼백예순 네 개 알’을 품고 온 2024년의 새로운 태양은 찐한 사랑을 고백하는 마음으로 가슴을 활짝 열고 맞을 일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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