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강물이 될 때까지 - 신대철

석전碩田,제임스 2024. 1. 10. 06:11

강물이 될 때까지

- 신대철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

디딤돌을 놓고 건너려거든
뒤를 돌아보지 말 일이다
디딤돌은 온데간데없고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진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사람이 아니고
디딤돌이다

- 시집 <무인도를 위하여>(문학과 지성사, 1977)

* 감상 : 신대철 시인.

1945년 충남 홍성에서 출생하였고 청양에서 성장했습니다. 공주사대부고와 연세대 국문과,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국민대 교수로 30년을 재직하다가 지난 2010년 정년퇴직하였으며 현재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1968년 ‘강설의 아침에서 해빙의 저녁까지’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그는 이후 왕성한 시작 활동을 벌이면서 자연 속에서 현대인의 내면 정황을 포착하는 서정시 세계를 보여주었지만, 1977년 첫 시집을 출간한 이후 23년 동안 절필하였습니다.

춘문예에 당선된 후, 첫 시집인 <무인도를 위하여>(문학과 지성)를 1977년에 출간한 뒤 두 번째 시집 <개마고원에서 온 친구에게>(문학과 지성)가 2000년에 발간되었으니 실로 긴 세월 침묵을 지켰습니다. 이 두 번째 시집으로 시인은 제4회 백석문학상(2002)을 수상했습니다.

2005년 세 번째 시집 <그대가 누구인지 몰라도 그대를 사랑한다>(창작과 비평), 그리고 2007년 네 번째 시집 <바이칼 키스>(문학과 지성)를 상재하였으며, 2006년에는 박두진문학상이 제정된 후 첫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는 김달진문학상과 지훈상(문학부문)을 연거푸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2018년 시집 <극지의 새>(빗방울 화석)를 내며 정년 후에도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철 시인의 시는 5년 전, 그의 시 ‘박꽃’과 ‘반딧불 하나 내려보낼까요?’를 읽으면서(https://jamesbae50.tistory.com/13410733)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에서 소개한 적이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와 인간 내면을 탐구하여 인간 바깥으로 탈출하려는 초월적 의지, 그리고 세계적인 냉전 체제 아래에서 남북으로 나누어져 대립해 온 한반도의 정치적 현실을 누구보다도 깊이 내면화하여 표현해 온’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신대철 시인의 시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겪었던 특별한 체험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합니다.

저, 그의 대학 시절의 체험입니다. 가정이 풍비박산되어 오갈 데 없었던 그는 대학 1학년, 휴학계를 내고 마을에서 40분이나 올라가야 하는 청양 칠갑산 중턱 ‘합대나무골’로 들어가 그곳 오두막에서 거의 10년을 화전민으로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일상과는 다른, 소외와 단절의 아픔, 그리고 가난이라는 슬픈 경험을 통해 ‘사람을 진실하게 만나는 것의 의미’를 그는 누구보다도 더 절실하게 생각하고 또 꿈꾸었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의 체험은 그의 특별했던 군 생활입니다. 68년, 신춘문예에 당선된 후 곧바로 ROTC 출신 장교로 군에 입대했는데, 바로 그해 1월 21일, 남파 무장간첩이 서울까지 침투하는 일명 ‘김신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묘하게도 군에서 그에게 맡겨진 일은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 책임자로서 남한의 북파공작원들을 안전 소로를 통해 북쪽으로 보내고, 또 그들을 기다렸다가 맞이하는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군 복무 중에 겪은 이 특수한 체험을 통해, 그때까지 그저 단순한 이데올로기 문제로만 바라보았던 남북의 문제를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고통스러운 체험적인 문제로 맞닥뜨렸습니다.

은 시인의 눈에 비쳐진,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정치적 현실 속에서 ‘사람과 사람의 진실한 만남의 의미’에 대한 문제는 결국 그가 평생 시인으로서 마음의 빚으로 간직하게 된 시상(詩想)이 되고 말았습니다. 군 제대 후 마음의 고통을 잊기 위해서 ‘자연’에 더 천착(穿鑿)하여 자연과 삶을 노래한 시로 첫 시집을 냈지만, 그의 시 속에서 고독과 불안, 공포의 서정이 짙게 묻어나는 것은, 이 같은 체험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바로 그 첫 시집에 수록된 시편 중 하나입니다.

인은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에 / 흐린 강물이 흐른다면 / 흐린 강물이 되어 건너야 하리’라고 운을 뗍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흐르는 ‘흐린 강물’로 텀벙 뛰어들어야 제대로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이 시는 전제(前提)하는 듯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우리는 그 강물이 흐리다는 단순한 이유로 선뜻 그 강물에 뛰어들기를 주저합니다. 디딤돌을 놓기도 하고, 또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뒤돌아 보면서 괜히 이곳까지 왔다고 아쉬워하기도 하고 또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건너야 할 강은 시인이 표현했듯이, ‘바라볼수록 강폭은 넓어’질 뿐입니다.

리고 시인은 계속해서,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대해 이렇게 노래하는 이유가 바로 우리 땅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분단과 대치의 상황임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땅을 벗어날 수 없고 /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 사람이 아니고 / 디딤돌이다’라고. 낮에는 평화를 선전하지만 밤에는 특수 공작원을 서로 보내면서 상대방을 기만하고 이용하려는 현실.  그것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라, 그저 사람을 하나의 수단과 방법인 ‘디딤돌’로 생각하는 것일 뿐이라고 참으로 슬프게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으로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디딤돌 위에 발을 올려놓고 한 디딤돌에서 다른 디딤돌로 발걸음만 옮기고 있는 애처로운 우리에게, ‘흐린 강물이 될 수 없다면 / 우리가 만난 사람은 사람이 아니고 / 사람이 아니고 / 디딤돌이다’라고 호통치는 시인의 목소리가 죽비처럼 들려옵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그 가운데 흐르는 흐린 강물에 내 발뿐 아니라 온몸을 담글 때라야 비로소 가능해진다는 간절한 호소입니다. 그저 적당히 내 기준으로 간을 보고 평가하고 판단하여 그것에 맞는 ‘디딤돌’을 놓기 시작하면, 이미 그 만남은 ‘사람을 만나는 일’과는 상관없는 일이 되고 만다고 하니 섬뜩한 마음이 듭니다.

록 화전민 시절의 가난 그리고 군 생활에서 체험했던 처절한 슬픔과 고통은 그 이후 시인으로 하여금 무려 23년을 침묵하게 했던 쓰디쓴 아픔 그 자체였지만, 이 시는 그저 개인의 그런 아픈 과거의 상처를 상처로만 머무르지 않고 ‘진정으로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 무엇이며, 또 그런 만남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대한 보편적인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노래로 승화시키고 있음이 다행스러울 뿐입니다.

침묵을 깨고 퇴임 후에도 조용히, 그러나 흐린 강물이 있다면 기꺼이 그 강물로 뛰어들어 몸을 적시면서까지 시 작업을 계속하며 ‘사람 만나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신대철 시인에게 마음으로부터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