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마지막 첫눈 / 겨울 소년 - 정호승

석전碩田,제임스 2024. 1. 3. 06:05

마지막 첫눈

- 정호승

마지막 첫눈을 기다린다
플라타너스 한 그루 옷을 벗고 서 있는
커피전문점 흐린 창가에 앉아
모든 기다림을 기다리지 않기로 하고
마지막 첫눈이 오기를 기다린다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이제 기다린다고 해서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내가 첫눈이 되어 내려야 한다
첫눈으로 내려야 할 가난한 사람들이
배고파 걸어가는 저 거리에
내가 첫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야 한다

오늘도 서울역에서 혼자 걸었다
돌아오는 길에 명동성당에 종소리가 들렸다
땅에는 저녁별들이 눈물이 되어 굴러다니고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어
나는 오늘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

별들이 첫눈으로 내린다
가장 빛날 때가 가장 침묵할 때이던 별들이
드디어 마지막 첫눈으로 내린다
커피전문점 어두운 창가에 앉아
다시 찾아올 성자를 기다리며
첫눈으로 내리는 흰 별들을 바라본다

- 시집 <여행>(창비, 2013)
-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2021)

* 감상 : 정호승 시인. 1950년 1월 3일,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 삼덕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계성중학교 1학년 때인 1962년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시 변두리 지역에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륜고등학교 재학 중, 전국고등학생 문예현상 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 1968년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입학,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등단하였습니다.

집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창작과비평사, 1979), <서울의 예수>(민음사, 1982), <새벽편지>(민음사, 1987), <별들은 따뜻하다>(창비, 1990), <흔들리지 않는 갈대>(미래사, 1991),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비, 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 비평, 1999), <내가 사랑한 사람>(열림원, 2003), <이짧은 시간동안>(창비, 2004), <포옹>(창비, 2007), <밥값>(창비, 2010), <여행>(창비, 2013), <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개정판, 2014), <수선화에게>(비채, 2015),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당신을 찾아서>(창비, 2020),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있습니다.

1989년 소월시문학상, 2000년 정지용 문학상, 2006년 한국 가톨릭문학상, 2009년 지리산 문학상, 2011년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난해 2023년은 정호승 시인이 시를 쓴 지 꼬박 50년이 되는 해였습니다. 블로그(https://jamesbae50.tistory.com/)에 탑재된 글들을 검색해 보니 그동안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를 통해서 소개했던 시인 중에서 정호승 시인이 단연 많았습니다. ‘외로우니까 사람이다’(2016.7.5.), ‘사랑한다’(2016.7.7.), ‘가시’(2018, 6.26, 2020,1,21), ‘벗에게 부탁함’, ‘다시 벗에게 부탁함’(2020.3.4.), ‘봄길’(2020.4.17.),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2021.3.3.), ‘아버지의 나이’, ‘아버지들’(2023.4.26.) 등이 그간 감상했던 주옥같은 그의 시들입니다. 오늘은 그의 시 중에서 겨울을 노래한 시 두 편을 특별히 골라봤습니다.

 

호승 시인의 시에는 유난히 ‘별’이 참 많이 등장합니다. 멀리 있는 밤하늘의 별빛을 노래하지만 사실은 그 별들은 이 땅의 가장 낮은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당겨와서 원고지 위에 표현해 놓은 별빛들입니다. 그래서 그가 삶 속에서 듣고 보고 느끼는 모든 것은 그의 ‘명징한 시 작업’을 통해 한 개의 별로 태어나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세상에 나온 별이어서 그런지, 그의 시는 밝은 별빛이 되어 캄캄한 밤길을 걷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가 봅니다.

늘 감상하는 시에도 여전히 ‘별’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그 별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 배고파 걸어가는 저 거리에’ ‘눈물이 되어 굴러다니는’ ‘저녁별’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심상치 않습니다. 이런 심상치 않은 상황을 시인은 ‘마지막 첫눈’이라는 은유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현실적으로 일어날 가망이 전혀 없는 절망을 노래합니다. 그러나 최대한 예의를 지켜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녁별들은 아직도 그 ‘첫눈’을 기다리고 있지만,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 / 이제 기다린다고 해서 첫눈은 내리지 않는다’고 슬프게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의 슬픔은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릴 수 없어 / 나는 오늘도 그의 제자가 될 수 없었다’는 표현에서 절정이 되어, 시를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이 미어지게 합니다.

‘오늘도 서울역에서 혼자 걸었다 / 돌아오는 길에 명동성당에 종소리가 들렸다’ ‘가장 빛날 때가 가장 침묵할 때이던 별들이’

망없이 그저 절망 가운데 눈물이 되어 굴러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 아파하던 시적 화자가 깊은 고뇌와 연민의 시간을 가지며 마음 아픈 침묵으로 결단한 끝에, 드디어 큰 결심을 했음을 눈치채게 하는 영롱한 시어들입니다. 그리고 시인은 목소리를 높여 이렇게 노래합니다.

‘내가 첫눈이 되어 내려야 한다’ ‘내가 첫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야 한다’ ‘별들이 첫눈으로 내린다 / 가장 빛날 때가 가장 침묵할 때이던 별들이 / 드디어 마지막 첫눈으로 내린다’ 시인이 스스로 첫눈이 되어 내린다는 노래입니다. 정호승 시인에게 있어 '첫눈'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에게 있어 첫눈의 의미는 그의 시, ‘첫눈 오는 날 만나자‘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만이 첫눈을 기다린다/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만이/ 첫눈 같은 세상이 오기를 기다린다/ 아직도 첫눈 오는 날 만나자고/ 약속하는 사람들 때문에 첫눈은 내린다/ 세상에 눈이 내린다는 것과/ 눈 내리는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은/ 그 얼마나 큰 축복인가’라고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을 끌어안고 마치 ‘다시 찾아올 성자’처럼 그들의 첫눈이 되겠다고 사랑을 노래한 시입니다.

은 시선집에 수록된 또 다른 시 하나를 읽어보겠습니다. 이 시는 지인 중 한 분이 보내 준 시입니다. 지인은 이 시를 보내 주시면서 다음과 같은 메모도 함께 주셨습니다.

가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돼 20년 옥살이하고 가석방된 선생님께 검도를 배운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 듣기로는 서울역에, 상경하는 소년 소녀 삐끼 하는 사람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어서 소년들은 수색에 집단으로 숙소를 마련해주고 넝마주이 시키면서 도둑질 가르치고, 소녀들은 팔았다고 하더군요. 당시 서울대학생들이 넝마주이 소년들에게 조그만 책 한 권씩 사주고 또 구두닦기 통 사주면서 독립시켰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겨울 소년’을 읽으니 그 당시 소년들이 떠 올랐습니다.

겨울 소년

- 정호승

별들에게 껌을 팔았다
지게꾼들이 지게 위에 앉아 떨고 있는
서울역에서 서부역으로 가는 육교 위
차가운 수은등 불꽃이 선로 위에 빛나는 겨울밤
라면에 만 늦은 저녁밥을 얻어먹고
양동에서 나온 소년
수색으로 가는 밤 기차의 기적 소리를 들으며
별들에게 껌을 팔았다
밤늦도록 봉래 극장 앞을 서성거리다가
중림동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
겨울 소년

- 시집 <서울의 예수>(민음사, 1982)
- 시선집 <내가 사랑하는 사람>(비채, 2021)

마도 이 시를 노래한 정호승 시인도 이런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허투루 듣지 않고 그들을 그의 시 속에서 별들에게 껌을 파는 겨울 소년으로 부활시키고 싶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그 겨울 소년이 껌을 팔고 그냥 사라진 것이 아니라, 명동성당의 종소리를 듣고 첫눈으로 내리는 흰 별들’이 되었듯이, 중림동 성당의 종소리를 듣는 / 겨울 소년, 우리들의 가슴 속에 첫눈을 기다리는 사랑이 가득한 겨울 소년으로,  ‘시적 은유’로 숨겨놓고 있는 것입니다.

2024년 새해가 밝았습니다. 첫눈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내가 ‘첫눈’이 되어 펑펑 쏟아져야겠다고 노래한 정호승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데자뷰처럼 성경의 한 구절을 떠올렸습니다.

“나는 또 여호와께서 내가 누구를 보낼까?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 것인가하고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고, 내가 가겠습니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대답하였다.” (이사야서 6장 8절, 현대인의 성경)

록 혹한의 겨울이지만, 마지막 첫눈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스스로가 마지막 첫눈으로 내리는, 사랑의 꿈을 꾸는 복된 한해이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