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400

시가 있는 아침 - 강동수

시가 있는 아침 - 강동수 문틈에 배달되는 조간신문이 날마다 시 한 편을 달고 온다 주석이 달린 처음 만나는 아침의 언어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왜 시 한 편을 건질 수 없었는지 언어의 사유에 감동하고 나와 아무 관계없는 사람을 스쳐 지나듯 증권소식과 지구 반대편 전쟁소식들을 뒤판으로 넘기며 아침이 바삐 지나간다 전쟁과 평화 그 사이에 시가 있다 날마다 시 한 편을 달고 오는 사이 전쟁으로 몇몇은 죽고 누군가는 시 한 편을 쓰고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아무 일도 없는 듯 - 시집 (시와소금, 2018) * 감상 : 강동수 시인. 강원 삼척 출생. 2002년 으로 시 창작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2008년 계간지 을 통해 등단하였습니다. 2009년 제19회 대한민국장애인 문학상 최우수상을 수..

산속에서 - 나희덕

산속에서 - 나희덕 길을 잃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리라 터덜거리며 걸어간 길 끝에 멀리서 밝혀져 오는 불빛의 따뜻함을 막무가내의 어둠 속에서 누군가 맞잡을 손이 있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얼마나 새로운 발견인지 산속에서 밤을 맞아본 사람은 알리라 그 산에 갇힌 작은 지붕들이 거대한 산줄기보다 얼마나 큰 힘으로 어깨를 감싸주는지 먼 곳의 불빛은 나그네를 쉬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걸어갈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 시집 (창비, 1994) * 감상 : 나희덕 시인. 1966년 충남 논산 연무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연세대 국문학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하였습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창비, 1991), (창비, 1994), (문학동네, 2004..

인간은 거룩하다 - 김준태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인간은 거룩하다 - 김준태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한 그릇의 물일랑도 엎지르지 말라 물 속에는 사람의 하늘이 출렁이나니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그대여 한 삽의 흙일랑도 불구덩이에 던지지 말라 오늘 우리는 달팽이라도 어루만지자 오늘 우리는 풀잎이라도 가슴에 담고 설레이자 풀 여치, 지렁이, 장구벌레, 물새, 뜸북새, 물망울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땅 위에 살아 있는 것들은 얼마나 거룩하냐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흐르는 강물에 발을 적시며 강 건너 마을 사람들을 찾으러 나가자 우리 이제 땅 위의 칼들을 녹슬게 하고 바람이 어찌하여 불어오는가를 귀기울이자 오오, 새벽에 깨어나면 그대여 우리 이제 물과 흙 속에 뼈를 세우고 옛사람 잠든 산천에 찔레꽃이 피어나듯 물거품 같은 ..

늦가을 문답 / 그네 - 임영조

늦가을 문답 - 임영조 그동안 참 열심히들 살았다 나무들은 마지막 패를 던지듯 벌겋게 상기된 이파리를 떨군다 한평생 머리채를 휘둘리던 풀잎도 가을볕에 색 바랜 몸을 뉘고 편하다 억척스레 살아온 저마다의 무게를 땅 위에 반납하는 가벼움이다 가벼워진 자만이 업을 완성하리라 허나, 깨끗하게 늙기가 말처럼 쉬운가 아하! 무릎 칠 때는 이미 늦가을 억새꽃이 절레절레 제 생을 부정하듯 서릿발 쓴 체머리로 돌아갈 때다 잎 다 진 청미래 덤불 가시에 찢긴 저녁 해가 선혈이 낭자하게 저문다 잡목숲 질러 식은 조각달 물고 가는 저 부리 길고 뾰족한 홀아비 새는 거느리는 식솔이 몇이나 될까 내 빈 속이 문득 궤양처럼 쓰리다 어서 그만 내려가자, 더 늦기 전에 가랑잎같이 따뜻하게 잘 마른 어느 老시인의 손이라도 잡아볼까나 나..

시집가는 누이에게 - 김용덕

시집가는 누이에게 - 김용덕 잘 살아라 누이야 가난한 집안의 셋째로 태어나 어릿광대 막내에게 밥 한술까지 빼앗기던 착하게만 살아 온 스물넷 누이야 잘 살아라 잘 살아라 원수처럼 가난하던 그해 겨울로 가면 정말로 중학교는 가고 싶어요 어머니 하얀 옷의 간호원이 되겠다던 열네 살 소녀의 은빛 꿈이 기름과자처럼 부서지고 송화 날리는 봄이 오기도 전에 너는 마을 앞 싸구려 과자 공장 저녁이면 기름 범벅 몸빼로 돌아왔지 군것질할 돈이 없었으므로 네가 집어 오는 기름과자가 기다려져 코흘리개 나는 학교가 끝나면 일찍이도 집으로 내 달렸다 남들 다 가던 중학교도 못 나와 공장으로 십년 기름때로 거칠어진 네 손을 누이야 부끄러워 말아라 돈 많아 대학 나온 귀한 집 딸내미들 메니큐어로 고운 손톱은 노동으로 굵어 온 네 손..

망각을 위하여 / 눈송이 당신 - 문정희

망각을 위하여 - 문정희 봄부터 가을까지 내가 한 일은 그동안 쓴 시를 고치고 주무르다가 망가뜨린 일이다 시는 고칠수록 시로부터 도망쳤다 등 푸른 물고기떼 배 뒤집고 죽어 가듯이 생명이 빠져나갔다 꽁지 빠진 새처럼 앙상한 가지에 앉아 허공을 보고 나는 조금 울었다 벌목꾼처럼 제법 나이테 굵은 침엽수 활엽수 다듬고 쪼개다가 볼쏘시개를 만들고 만 것이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헛것과 헛짓에 목매단 것이다 나는 울다가 눈을 떴다 그래 이대로 절뚝이며 살아라 나 또한 헛짓하며 즐거웠다 나는 시들을 자유로이 놓아주었다 부서진 욕망, 미완의 상처에서 흐르는 피 불온한 생명이여 어쩌다 내가 기념비적인 기둥 하나를 세웠다 해도 얼마 후면 그 기둥 아래 동네 개가 오줌이나 싸놓고 지나갈 것을*註 * 註 : 헝가리 소설가 산..

진실을 말하려거든 살며시 말해요 - 디킨슨

"Be completely humble and gentle; be patient, bearing with one another in love."(Eph. 4: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엡 4:2) * 묵상 : 오늘은 에밀리 디킨슨(Emily E. Dickinson)의 시 하나를 먼저 감상해보겠습니다. Tell all the truth but tell it slant - Emily Elizabeth Dickinson Tell all the truth but tell it slant Success in Circuit lies Too bright for our infirm Delight The Truth's superb surprise As Lightning ..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뻘에 말뚝 박는 법 - 함민복

서울 지하철에서 놀라다 - 함민복 1 열차가 도착한 것 같아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스크린도어란 것이 설치되어 있었다 민망하여 별로 놀라지 않은 척 주위를 무마했다 스크린도어에, 옛날처럼 시 주련(柱聯)이 있었다 문 맞았다 2 전철 안에 의사들이 나란히 앉아 있었다 모두 귀에 청진기를 끼고 있었다 위장을 눌러보고 갈빗대를 두드려보고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옛 의술을 접고 가운을 입지 않은 젊은 의사들은 손가락 두 개로 스마트하게 전파 그물을 기우며 세상을 진찰 진단하고 있었다 수평의 깊이를 넓히고 있었다 - 시집 (창비, 2013) * 감상 : 함민복 시인. 1962년 9월,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집의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아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못하고 보증인 두 명을 세워 수업료가 무료이고..

가을날 - 릴케 / 가을의 기도 - 김현승

가을날 - 라이너 마리아 릴케(Rainer Maria Rilke) 주여, 때가 되었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드리우시고, 들판에는 바람을 풀어 놓아주소서. 막바지 열매들을 영글게 하시고, 하루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베푸시어, 영근 포도송이가 더 온전하게 무르익게 하시고, 짙은 포도주 속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해주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잠자지 않고,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그리고 낙엽이 떨어져 뒹굴면, 불안스러이 이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1902년 파리에서 Herbsttag - Rainer Maria Rilke Herr; es ist Zeit. Der ..

마음의 오지 - 이문재

마음의 오지 - 이문재 탱탱한 종소리 따라나가던 여린 종소리 되돌아와 종 아래 항아리로 들어간다 저 옅은 고임이 있어 다음날 종소리 눈뜨리라 종 밑에 묻힌 저 독이 더 큰 종 종소리 그래서 그윽할 터 그림자 길어져 지구 너머로 떨어지다가 일순 어둠이 된다 초승달 아래 나 혼자 남아 내 안을 들여다보는데 마음 밖으로 나간 마음들 돌아오지 않는다 내 안의 또 다른 나였던 마음들 아침은 멀리 있고 나는 내가 그립다 - 시집, (문학동네, 1999) * 감상 : 이문재 시인. 1959년 경기도 김포(지금은 행정구역상 인천시 서구)에서 태어나 경희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1982년 4집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생태적 상상력’의 시인, 즉 ‘생태 시’로 잘 알려 진 그는 김달진문학상, ..

영목에서 - 윤중호

영목에서 - 윤중호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서서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 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

이렇게 나는 오늘도 - 김동리

이렇게 나는 오늘도 - 김동리 오늘 아침엔 월급 봉투로 연탄을 들이고 어저께는 문인협회의 위원에 뽑혔습니다 내일엔 다방에 나가 악수를 널어 놓고 저녁때엔 어느 편집장과 술을 마실 예정입니다 지난해엔 둘째 아이의 임파선 수술을 보았고 이달엔 ‘섰다’에 미쳐 밤을 새고 다닙니다 시는 어려서부터 일찍이 손을 대인 것 소설은 약관에 이미 당선이 되었지만 아직 어느 나무 그늘 아래도 내 마음 쉴 의자 하나 놓여 있지 않습니다 봅소서, 나를 지키는 그대의 맑은 눈동자 앉으나 서나 가나 머무나 언제 어디서고 나에게서 떠남 없는 그대의 영원한 눈길이여 이제 나는 머리가 벗겨지고 등이 굽은 채 서울역이나 서대문 가는 전차를 잡으려고 동대문 모퉁이를 헐떡이며 돌아가고 있습니다 봅소서, 이렇게 나는 오늘도 찬 바람 흐린 햇..

민지의 꽃 - 정희성

민지의 꽃 - 정희성 강원도 평창군 미탄면 청옥산 기슭 덜렁 집 한 채 짓고 살러 들어간 제자를 찾아갔다. 거기서 만들고 거기서 키웠다는 다섯 살배기 딸 민지 민지가 아침 일찍 눈 비비고 일어나 저보다 큰 물뿌리개를 나한테 들리고 질경이 나싱개 토끼풀 억새…… 이런 풀들에게 물을 주며 잘 잤니,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그게 뭔데 거기다 물을 주니? 꽃이야, 하고 민지가 대답했다. 그건 잡초야, 라고 말하려던 내 입이 다물어졌다. 내 말은 때가 묻어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키지 못하는데 꽃이야, 하는 그 애의 말 한마디가 꽃잎의 풋풋한 잠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다. - 시집 (창비, 2001) * 감상 : 정희성 시인. 1945년 2월 21일, 경남 창원에서 태어났습니다. 용산고등학교, 서울대 국어국문학과를 ..

두부 / 사기 - 유병록

두부 - 유병록 아무래도 누군가의 살을 만지는 느낌 따듯한 살갗 안쪽으로 심장이 두근거리고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곧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 같다 순간의 촉감으로 사라진 시간을 복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두부는 식어간다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을 경험한 것처럼 차분하게 차가워지는 가슴에 얹었던 손으로, 이미 견고해진 몸을 붙잡고 흔들던 손으로 두부를 만진다 지금은 없는 시간의 마지막을, 전해지지 않는 온기를 만져보는 것이다 점점 사이가 멀어진다 두부를 오래 만지면 피가 식어가고 숨소리가 고요해지는 느낌, 곧 떠날 영혼의 머뭇거림에 손을 얹는 느낌 이것은 지독한 감각, 다시 위독의 시간 나는 만지고 있다 사라진 시간의 눈꺼풀을 쓸어내리고 있다 - 계간 (2011년 겨울호)에 발표 - 시집 (창비, 2014) *..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 안도현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올 때가 있네 도꼬마리의 까실까실한 씨앗이라든가 내 겨드랑이에 슬쩍 닿는 민석이의 손가락이라든가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찾아와서 나를 갈아엎는 치통이라든가 귀틀집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라든가 수업 끝난 오후의 자장면 냄새 같은 거 내 몸에 들어와서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마구 양푼 같은 내 가슴을 긁어댈 때가 있네 사내도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네 고대광실 구름 같은 집이 아니라 구름 위에 실컷 웅크리고 있다가 때가 오면 천하를 때릴 천둥 번개 소리가 아니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에 들어오면 나는 견딜 수 없이 서러워져 소주 한 잔 마시러 가네 소주, 아주 작고 하찮은 것이 내 몸이 저의 감옥인 줄도 모르고 내 몸에 들..

쑥부쟁이 꽃밭에 앉아 - 진란

쑥부쟁이 꽃밭에 앉아 - 진란 어느 결에 사라진 쇄골 생각에 이제 다시는 그대와 숨 가쁜 연애도 못하겠다고 주름진 눈가 하얀 소금강을 그려놓고 여자는 늘 쇄골 생각, 그대는 쇄골 아래 숨골 생각 오늘은 어쩌자고 꽃을 바라보다가 쇄골 생각이네 촉촉한 살결이,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저 꽃잎 한때 보드라운 입술에 밀봉도 많았었다고 꽃등에가, 꿀벌이 왱왱거리는 한낮, 어쩌자고 나는 꽃의 쇄골 생각에 빠져 귀울림 낭자하던 그 한낮의 정사 홀로 낯 붉어지며 쑥부쟁이 쓰러진 꽃밭에 숨어 사라진 쇄골 생각, 골똘해지네 - 시집 (시인동네, 2022) * 감상 : 진란 시인. 1959년 전북 전주에서 태어났으며 2002년 계간지 편집동인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공직생활을 하던 부친을 따라 전주 인근 여러 학교..

연탄재를 바라보며 - 김승희

연탄재를 바라보며 - 김승희 하얀 연탄재가 인사라도 하는 듯 몸을 웅크리고 서 있는 골목길을 지나며 난 늘 부끄럽다. 너, 그렇게, 열심히 살았구나. 하얀 뼈가 다 타오르도록. 동해물과 백두산이......어쩌고 저쩌고 하는 사람보다 응달진 골목길에 내버려진 네가 항시 부끄러워 나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네 창백한 살결 한번 쓸어보고 싶어. 살아 생전 구하지 못했던 내가 그대에게 마치, 옛사랑, 용서받기를 차마 청하려는 것처럼. - 시집, (문학사상사, 1989) * 감상 : 김승희(金勝熙) 시인. 1952년 3월 1일, 전남 광주에서 태어났습니다. 1970년 숙명여고를 졸업하고 서강대 영문학과에 입학, 졸업과 동시에 同 대학원 국문학과에서 공부하고 ‘이상 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모교에서..

엑스트라 - 최호일

엑스트라 - 최호일 이 한여름에 두꺼운 옷을 껴입고 우리는 웃는다 여름날 당신의 입술과 내 손가락 사이로 내리는 눈송이들 혀가 혀를 빨아 먹으며 바위 사이에서 커다란 뱀과 여자와 허벅지가 튀어나올 때 주인공은 홀로 용감하다 대기 속에는 진짜 총알이 들어 있고 여섯시에 총을 맞아야하므로 우리는 그녀를 사랑하는 법을 모른다 내일은 지퍼가 열린 줄 모르고 들고 다니는 트렁크 속에서 가면과 시체가 쏟아질 것이다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영화처럼 저녁이 오고 화면엔 보이지 않지만 쓰러진 술잔이 있다 그것이 어두운 소리로 굴러떨어져 강가에 닿을 무렵 겨울이 와야 한다 여름에 내리는 눈송이처럼 내 몸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 (9월호)(2010.8), 시집 (중앙북스, 2014) * 감상 : 최호일 시인. 1958년 ..

6월 아침 - 곽재구

6월 아침 - 곽재구 강을 따라 걷다 사람과 이마를 부딪쳤다 그이도 머리를 숙여 걸어왔기 때문이다 먼 이국의 밤의 해변에서 쏟아지던 유성우가 서로 부딪치는 것을 간절히 기다리던 순간이 있었다 충돌은 무지개보다 신비하다 그이가 손에서 놓친 시집을 들어 올렸을 때 선홍빛 뱀 딸기 하나 풀숲에서 수줍게 웃었다. - 시집 (문학동네, 2019) * 감상 : 곽재구 시인. 1955년 10월(또 어떤 자료에는 1954년 1월), 광주에서 출생하였습니다. 광주제일고, 전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숭실대학교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습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창비, 1983), (민음사, 1985), (1986), (문학과지성사, 1990), (창장과비평사..

꾀병 / 마음 한철 - 박준

꾀병 - 박준 나는 유서도 못 쓰고 아팠다 미인은 손으로 내 이마와 자신의 이마를 번갈아 짚었다 "뭐야 내가 더 뜨거운 것 같아" 미인은 웃으면서 목련꽃같이 커다란 귀걸이를 걸고 문을 나섰다 한 며칠 괜찮다가 꼭 삼 일씩 앓는 것은 내가 이번 생의 장례를 미리 지내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렵게 잠이 들면 꿈의 길섶마다 열꽃이 피었다 나는 자면서도 누가 보고 싶은 듯이 눈가를 자주 비볐다 힘껏 땀을 흘리고 깨어나면 외출에서 돌아온 미인의 옆에 잠들어 있었다 새벽 즈음 나의 유언을 받아 적기라도 한 듯 피곤에 반쯤 묻힌 미인의 얼굴에는, 언제나 햇빛이 먼저 와 들고 나는 그 볕을 만지는 게 그렇게 좋았다 - 시집 (문학동네, 2012) * 감상 : 박준 시인은 1983년 서울에서 출생하고 성장했습니다. 경희대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