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봄날
- 박경희
가수 윤복희 씨가 TV에서 '봄날은 간다'를 부르는데 담금통에 담아두었던 눈물이 힘없이 떨어졌다 아파 누운 지 열흘 된 그녀가 살구꽃으로 피었다가 살구꽃으로 지고 벚꽃으로 피었다가 벚꽃으로 졌다 괜스레 가는 봄날 잡아놓고 윤복희 씨 목소리에 쓸쓸해져서 잠든 그녀 얼굴 눈으로 쓰다듬는데, 길눈 어두운 딱새가 집 안으로 들어 퍼덕였다 그 소리에 눈뜬 그녀에게 부은 눈 들킬까 문이란 문 다 열어놓고 온몸으로 휘젓다가 문지방에 발가락 찧어 아파 핑곗김에 운 날
-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창비, 2019)
* 감상 : 박경희 시인.
1974년 충남 보령에서 태어났습니다. 한신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2001년 <시안> 신인상에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대학 졸업 후 막막함에 고향에 내려왔다가 ‘생명평화 탁발 순례단’에 동참하게 되었고, 순례가 끝난 후 절에 들어간 시인은 그곳에서 무려 4년을 보냈습니다. 시집으로는 등단 후 무려 12년 만에 낸 첫 시집 <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과 또 그 후 7년이 지난 후에 낸 두 번째 시집 <그늘을 걷어내던 사람>(창비, 2019)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동시집 <도둑괭이 앞발 권법>(실천문학사, 2015), 산문집 <꽃 피는 것들은 죄다 년이여>(서랍의날씨, 2014), <쌀 씻어서 밥 짓거라 했더니>(서랍의날씨, 2016), <차라리 돈을 달랑께>(삶창, 2018) 등이 있습니다. 2013년 노동자 시인 조영관(1957~2007) 문학창작기금 운영위원회가 운영하는 ‘제3회 조영관 문학창작기금’ 수혜자로 선정되었습니다.
5월 마지막 날입니다. 절기상으로는 이미 입하(立夏)도 지났고 또 소만이 지나 여름이지만, 달력 날짜로 보자면 오늘이 봄의 마지막 날인 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봄날은 간다’는 노래 제목을 소재로 삼아 쓸쓸하고 애틋한 정을 노래한 시 하나를 꺼내 보았습니다.
‘봄날은 간다’는 표현은 1953년 한국 전쟁이 한창일 때 발매된 음반(레코드)으로, 가수 전영록의 친모인 가수 백설희의 노래가 효시입니다. 손로원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한 이 곡은 실질적으로 백설희 가수의 데뷔곡이자 대표곡으로 유명합니다. 그 후 많은 가수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애틋한 사랑과 아쉬움을 그려내는 대명사로 씌여지고 있습니다. 특히 윤복희와 장사익이 불렀던 ‘봄날은 간다’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윤복희가 부른 ‘봄날은 간다’에 익숙한 두 화자를 등장시켜 아련한 청춘의 사랑을 노래한 ‘봄날은 간다’의 가삿말을 현재의 쓸쓸하고 슬픈 상황과 함께 엮어낸 시입니다. 아마도 시 속에 등장하는 아픈 그녀는 화려했던 봄날 내내 병상에 누워있었던 듯합니다. 그리고 '그녀'를 간절한 마음으로 돌보고 있는 또 다른 화자는 마침 켜 놓은 TV에서 흘러나오는 윤복희가 부르는 ‘봄날은 간다’의 가삿말에 눈물이 울컥 쏟아져 혼자 눈이 붓도록 서럽게 울었던 듯합니다. ‘길눈 어두운 딱새가 집 안으로 들어 퍼덕’이는 모습이 마치 ‘살구꽃으로 피었다가 살구꽃으로 지고 벚꽃으로 피었다가 벚꽃으로’ 지는 그녀의 현재의 처량한 모습과 같아서 서러웠던 것이 분명합니다. 퍼덕이는 딱새의 소동에 눈을 뜬 ‘그녀에게 부은 눈 들킬까 문이란 문 다 열어놓고 온몸으로 휘젓다가 문지방에 발가락 찧어 아파 핑곗김에 운 날’은 이 시의 시적 은유가 되어 TV 속에서 열창하는 윤복희의 ‘봄날’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되살아납니다.
이 시를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시인이 사용하는 동일한 시어들이 등장하는 또 다른 시 하나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고생만 하시다가 ‘그런 봄날’에 먼저 이승을 향해 황망히 떠나버린 아버지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그 지아비를 못내 잊지 못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그려낸 일종의 가족사를 그린 시입니다.
벚꽃 문신
- 박경희
아버지는 이십 년 넘게 목욕탕에 간 적이 없다
아들에게 등을 맡길 만도 한데
단 한 번도 내어준 적 없다
아버지의 젊은 날이
바큇자국으로 남아 있는 한
자식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등
경운기와 사투를 벌이며
빨려 들어가는 옷자락을 얼마나 붙들었던가
논바닥에 경운기 대가리와 뒤집어졌을 때
콧구멍 벌렁거리며 밥 냄새에 까만 눈 반짝이던
삼 남매의 얼굴이 흙탕물에 뒹굴었으리라
바퀴가 등을 지나간 뒤
핏물 위에 가득했던 꽃
울지도 못하고 깨진 창문에 덧댄 비닐처럼
벌벌 떨었다
방문 틈으로 새어나오는 앓는 소리를 들으며
개구리처럼 눈만 끔벅이다가
부엌 구석에 쪼그려 앉아 졸았다
경운기와 씨름한 샅바가 붉게 물들어
아버지 등에 감겼다, 병원에 가자고
등에 손을 얹은 어머니의 눈물
뒤집어지던 꽃잎 훌러덩훌러덩
등에 새겨졌다
- 시집 <벚꽃 문신>(실천문학사, 2012)
지금은 아카시아꽃이 지고 사방에 장미꽃이 만발하여 향기가 가득합니다. 쥐똥나무 꽃향기도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있고 또 며칠 전부터 피기 시작한 밤꽃 향기는 마지막 가는 ‘그런 봄날’을 아쉬워하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를 읽으면 슬픔과 쓸쓸함이 슬그머니 녹아있지만, 그 속에서 ‘그늘을 걷어내고’ 삶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머지않아 초여름을 알리는 산딸기, 앵두가 사랑스럽게 익어가고, 또 감자꽃이 피기 시작하면 먼 산 뻐꾸기 울음소리는 더욱 처량하게 들릴 것입니다. 시나브로 올해의 봄날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영원히 사라져 가겠지만, 모쪼록 다가오는 성하(盛夏)의 계절은 사랑의 열매가 영글어가는 평화로운 시간이길 응원합니다. - 석전(碩田)
https://www.youtube.com/watch?v=XXvCQe86SwU
'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중년에 찾아 온 당신 / 유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1) | 2023.06.14 |
---|---|
하늘은 지붕 위로 - 폴 베를렌 (0) | 2023.06.07 |
내일 말고 오!늘! / 꽃 지기 전에 - 권용석 (1) | 2023.05.24 |
심야 식당 / 모르는 사이 - 박소란 (0) | 2023.05.17 |
천리향 사태 / 치자꽃 설화 - 박규리 (1) | 2023.05.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