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심야 식당 / 모르는 사이 - 박소란

석전碩田,제임스 2023. 5. 17. 06:44

심야 식당

- 박소란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궁금합니다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충무로 진양상가 뒤편
국수를 잘하는 집이 한군데 있었는데
우리는 약속도 없이 자주 왁자한 문 앞에 줄을 서곤 했는데
그곳 작다란 입간판을 떠올리자니 더운 침이 도네요 아직
거기 그 자리에 있는지 모르겠어요
맛은 그대로인지

모르겠어요
실은 우리가 국수를 좋아하기는 했는지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귀퉁이가 해진 테이블처럼 잠자코 마주한 우리
그만 어쩌다 엎질러버린 김치의 국물 같은 것
좀처럼 닦이지 않는 얼룩 같은 것 새금하니 혀끝이 아린 순간
순간의 맛

이제 더는
배고프다 말하지 않기로 해요 허기란 얼마나 촌스러운 일인지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혼자 밥 먹는 일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혼자 밥 먹는 일

그래서
요즘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 )

* 감상 : 박소란(朴笑蘭) 시인.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산에서 성장했습니다. 동국대학교 문예창작과를 졸업하였습니다. 2009년 <문학수첩>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창비, 2015), <검은 시의 목록>(걷는사람, 2017), <검은 돌 숨비 소리>(걷는 사람, 2018),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 <있다>(현대문학, 2021) 등이 있으며, 2015년 제33회 신동엽문학상, 2016년 내일의 한국작가상, 2020년 노작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평범하지만 개성적인 화법으로 사회적인 약자와 시대의 아픔을 끌어안는 시를 쓴다’는 평을 받아 오고 있는 박소란 시인의 시입니다. 그녀의 표현들은 그저 평범한 문장이고 또 일상의 생활에서 자주 사용되는 그런 말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상의 표현들을 그대로 따라가다 보면 자칫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왜냐하면 그녀의 평범한 시어들은 그 속에 역설 내지는 반전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무얼 먹고 지내는지 / 궁금합니다 / 이 싱거운 궁금증이 오래 가슴 가장자리를 맴돌았어요’ ‘나는 고작 이런 게 궁금합니다’

복해서 시인이 이렇게 노래하면서 그게 ‘고작’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짜, 시인이 물어 보고 있는 이런 평범한 궁금증이 ‘고작’이라고, 또 '싱거운' 것이라고 치부해버려도 되는 것일까.

젠가부터 텔레비전 뿐 아니라 유투브 동영상을 열면, 온통 ‘먹방’ 프로그램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시인이 표현한 것처럼 ‘허기란’ 어쩌면 ‘촌스러운 일’이 된 시대가 되었다고나 할까요. 배고프니까 국수 한 그릇 먹자고 말하는 것은 어쩌면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나 가능했던 일이라고 무시하는 자신만만한 세상이 무섭기까지 합니다.

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런 풍족해진 시대가 되었다고 하지만 그저 먹어 치워버리는 행위들이 우리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대변하는 모습은 아닐까. 시인은 심야식당 한 켠에서 ‘혼자 밥 먹는 사람, 그 구부정한 등을 등지고’ ‘형광등 거무추레한 불빛 아래 / 불어 선득해진 면발을 묵묵히 건져 올리며 / 혼자 밥 먹는’ 사람에게 주목합니다. '천박한 풍부' 속에서 그 풍족을 누릴 수 없는 ‘혼자 밥 먹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시인은 세심한 눈으로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따스한 마음으로 다가서서 묻고 싶어 합니다. 이 풍요로운 세상 가운데서 진짜 행복한 밥을 먹고 있는지 말입니다. 정말 국수 한 그릇 먹기 위해서, 부대끼면서 줄을 섰던 그런 다정다감한 시간을 떠올리며, 지금도 잘 살고 있느냐고 궁금해서 진심으로 묻고 싶다는 말입니다.

은 시집에 실린 박소란 시인의 또 다른 시 하나를 감상해 보겠습니다. 마치 이 두 시는 쌍둥이처럼, 사용된 단어와 표현들이 닮아있고 또 전개 방식도 같습니다.

모르는 사이

- 박소란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입니까
이어폰을 꽂은 채 줄곧 어슴푸레한 창밖을 내다보고 있군요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태운 7019번 버스는 이제 막 시립 은평병원을 지났습니다
광화문에서부터 우리는 나란히 앉아 왔지요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당신이 눈을 준 이 저녁이 조금씩 조금씩 빛으로 물들어간다고
건물마다 스민 그 빛을 덩달아 환해진 당신의 뒤통수를 몰래 훔쳐봅니다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오늘 낮에 혼자 밥을 먹었습니다 행복한 사람들이 가득한 광장을 혼자 걸었습니다
언젠가 당신은 그곳에서 우연히 친구를 만난 적이 있지요 밥이나 한번 먹자
악수를 나누고서 황급히 돌아선 적이 있지요

나는 슬퍼집니다
그렇고 그런 약속처럼 당신은 벨을 누르고 버스는 곧 멈출 테지요
나는 다만 이야기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의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휘휘한 공기에 대해 당신 무릎 위 귀퉁이가 해진 서류가방과 손끝에 묻은 검뿌연 볼펜 자국에 대해

당신은 이어폰을 재차 만집니다
어떤 노래를 듣고 있습니까 당신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들리지 않는
그 노래를 나도 좋아합니다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문이 열립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당신이 유유히 문을 나섭니다 당신의 구부정한 등이
저녁의 미지 속으로 쓸려 갑니다

우리는 헤어집니다 단 한번 만난 적도 없이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

-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창비, 2019 )

시에서는 시인이 주목하는 사람이 ‘말이 없는’ 모르는 사이인 ‘그 누군가’입니다. 어쩌면 그도 구부정한 등을 가졌습니다. 아마도 매일 출퇴근 길에 만나는 ‘잘 아는 타인(a familiar stranger)’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매일 아침 같은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서 7019 같은 번호의 버스를 타는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사이인 그 ‘구부정한 등을 가진’ 사람에게 시인은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수줍음이 많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당신을 좋아합니다 당신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인이 이렇게 ‘모르는 사이’의 낯선 그 사람에게 오지랖 넓게 궁금해서 묻고 싶어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온통 풍요로 넘치는 세상이라고 하지만, 시인의 눈에는 우리가 살아가는 이곳이 ‘시립 은평병원’이요, ‘변덕스러운 날씨와 이 도시와 도시를 둘러싼 / 휘휘한 공기’가 가득한 살벌한 공간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아직도 혼자 밥을 먹고 귀에 이어폰을 꽂고 누구와도 소통이 없이 혼자서 일터를 오가는 사람들이 가득한, 그 사람들이 바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그리고 지금이라도 내 소중한 것을 드러내서라도 외롭고 슬픈 그들에게 다가서고 싶다고 시인은 노래하고 있습니다. ‘나는 인사하고 싶습니다 / 내 이름은 소란입니다’라고.

집으로 뿐 아니라, 시 전문 애플리케이션인 [시요일 – 세상의 모든 시(詩)]에서 30만이 넘는 독자들이 그녀의 시에 열광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녀의 시는 끝 간 줄 모르는 욕망으로 치닫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 일상의 평범한 언어로 닫힌 문 뒤에서 아직도 외로움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주목하며 그들에게 다정하게 인사를 건네는 듯한 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눈물이 핑 돌게 치유의 효과를 가져다주기 때문일 것입니다.

래서 오늘은 ‘심야식당’은 아니지만, 옛 지인을 불러내 국수나 한 그릇 하면서 옛 추억을 소환하는 시간을 한번 가져봐야겠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