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아버지의 나이 / 아버지들 - 정호승

석전碩田,제임스 2023. 4. 26. 06:26

아버지의 나이

- 정호승

나는 이제 나무에 기댈 줄 알게 되었다
나무에 기대어 흐느껴 울 줄 알게 되었다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
나무의 그림자가 될 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왜 나무 그늘을 찾아
지게를 내려놓고 물끄러미
나를 쳐다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나는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해 질 무렵
아버지가 왜 강가에 지게를 내려놓고
종아리를 씻고 돌아와
내 이름을 한 번씩 불러보셨는지 알게 되었다

- 시집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 비평, 1999)

* 감상 : 정호승 시인.

1950년 1월 3일,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습니다. 대구 삼덕초등학교 1학년 때 대구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성장기를 보냈고, 계성중학교 1학년 때인 1962년 은행원이었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도시 변두리 지역에서 가난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대륜고등학교 재학 중, 전국고등학생 문예현상 모집에서 ‘고교문예의 성찰’이라는 평론으로 당선, 1968년 문예장학금을 지급하는 경희대학교 국문과에 입학, 동 대학원을 졸업했습니다.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 ‘석굴암을 오르는 영희’가, 1973년 <대한일보> 신춘문예에서 시 ‘첨성대’가 당선되어 등단하였으며, 1982년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위령제’가 당선되어 소설가로도 등단하였습니다.

집으로는 <슬픔이 기쁨에게>(창작과비평사, 1979), <서울의 예수>(민음사, 1982), <새벽편지>(민음사, 1987), <별들은 따뜻하다>(창비, 1990), <흔들리지 않는 갈대>(미래사, 1991),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창비, 1997),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창작과 비평, 1999), <내가 사랑한 사람>(열림원, 2003), <이짧은 시간동안>(창비, 2004), <포옹>(창비, 2007), <밥값>(창비, 2010), <여행>(창비, 2013), <내가 사랑하는 사람>(열림원, 개정판, 2014), <수선화에게>(비채, 2015), <나는 희망을 거절한다>(창비, 2017), <당신을 찾아서>(창비, 2020), <슬픔이 택배로 왔다>(창비, 2022) 등이 있으며, 시선집으로 <흔들리지 않는 갈대>가 있습니다. 1989년 소월시문학상, 2000년 정지용 문학상, 2006년 한국 가톨릭문학상, 2009년 지리산 문학상, 2011년 공초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호승 시인의 시 ‘아버지의 나이’를 읽으면서 갑자기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이 생각이 났습니다. 아마도 시인이 아버지 나이가 되고 나서야 비로소 아버지가 그 때 왜 그런 행동을 했고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었다는 표현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이제 강물을 따라 흐를 줄도 알게 되었다 / 강물을 따라 흘러가다가 / 절벽을 휘감아 돌 때가 / 가장 찬란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는 표현에서 영화에 나오는 강물의 풍광이 아련하게 생각이 났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8년 전, 제 블로그에 올렸던 이 영화의 감상문을 다시 꺼내 읽어보았습니다.

화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합니다. 스코틀랜드 출신 장교로서 목사가 되어 몬태나에서 작은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리버런드 맥클레인이 아내와 함께 두 아들, 노만과 폴을 키우는 한 가정의 가족사(家族史)를 담담하게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두 부부가 자녀를 낳고 자녀들이 성장해가면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늙어갑니다. 그들의 인생이 저물고 나면 자녀들이 성장하면서 또 다른 한 인생을 살아내는 과정을 그들이 낚시를 즐겼던 강물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듯이 비유적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즉 두 세대를 한 영화에 모두 담아낸 영화입니다.

화의 마지막 장면은 첫째 아들인 노만 맥클레인이 예전 아버지 같은 나이가 되어 부인도 먼저 보낸 후, 고향으로 내려와 이미 고인이 된 아버지, 그리고 동생과 함께 낚시하면서 보냈던 과거를 회상하면서 추억에 잠기는 모습입니다. 영화의 제목처럼 극적인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큰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두 사람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그 자녀들이 장성해 가면서 부부는 늙어가는, 생로병사의 사이클이 돌아가는 인생을 '강물이 흐르는 것처럼 그렇게 흘러간다는 것'을 아름다운 영상미와 함께 보여주는 것이 전부입니다.

화는 마치 소설을 읽어나가듯이 아름다운 몬태나의 풍광과 함께 들려오는 내레이션의 설명이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그 내레이션 속에는 이야기가 있고, 아름다운 풍광이 있으며, 무엇보다도 자연을 노래하는 아름다운 시가 있습니다. 그래서 시나리오의 전개에서 굳이 갈등 구조를 찾아보라고 요구한다면 두 형제가 달라도 너무 다른 삶의 스타일과 그들의 성정이 전혀 다르다는 점 정도일 뿐입니다.

가족의 가족사(家族史)를 통해서 영화가 관객에게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은 오히려 사랑을 나누는 일에 서로 서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습니다. 아니 서툴다기 보다는 서로가 도움이 필요한 존재인지조차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서로 깊은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쉽지 않습니다. 가족이기 때문에.

인이자 목사인 아버지 리버랜드 맥클레인을 회상하면서, 장남 노만이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아버지의 마지막 설교를 영화는 놓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려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설교의 한 장면을 클로즈업(Close-up) 하면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아버지’라는 존재는 참으로 아버지가 살아계실 적에는 완전히 이해하기 쉽지 않은 존재인 듯합니다. 아버지가 떠난 자리가 커 보이고 내가 그 나이가 되었지만 나 스스로는 예전 아버지에게서 느꼈던 그런 큰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절감할 때, 더 많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정호승 시인이 쓴 ‘아버지들’이라는 제목의 시는 이런 아버지의 존재를 너무도 절절하게 현실적으로 잘 표현한 시입니다.

아버지들

- 정호승

아버지는 석 달 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 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셋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 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고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은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에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을 할 수 없는 약속이다

-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열림원, 1998)

2 행씩 짝을 이룬 아버지의 존재를 노래한 표현들 하나하나가 그저 허투루 읽고 지나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왔던 아버지가 이제 삶의 마지막 구간을 달려가고 있을 때를 묘사한 마지막 표현이 눈물겹습니다. ‘아버지는 지하철에 떠도는 먼지다 /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 아버지는 이제 약속을 할 수 없는 약속이다’

늘 감상했던 정호승 시인의 시 두 편은 ‘다른 제목, 같은 목소리의 시’처럼 서로 많이 닮아 있습니다. 또 영화 속에서 늘 시를 읊듯이 설교했던 리버랜드 맥클레인 목사의 목소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해하려는 것보다 사랑하는 것이다’라는 유언같은 그의 목소리로 이 두 시를 한데로 엮으면 멋진 한 편의 '또 다른 시'가 되고 말 것 같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