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의 기도
- 미상
오, 주여!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주고
악행을 저지르는 자를 용서하며
다툼이 있는 곳에는 화목케 하며
잘못이 있는 곳에는 진리를 알리고
회의가 가득한 곳에 믿음을 심으며
절망이 드리운 곳에 소망을 심게 하소서.
또한
어두운 곳에는 당신의 빛을 비추며
슬픔이 쌓인 곳에 기쁨을 전하는
사신이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 보다는
먼저 위로를 베풀고
이해받기 보다는 먼저 이해하며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해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 예수 안에서
그 이름으로 빕니다. 아멘.
* 감상 : 지난 5월 1일 월요일, 특별한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합정동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 묘원을 다녀왔습니다. [겨레의 스승, 裵說(베델, Ernest Thomas Bethell) 선생 114주기 景慕대회]라는 꽤 긴 이름의 행사였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고 갔다가 큰 울림을 받았던,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중고등학생 시절,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여 발간했던 외국인 ‘베델’이라는 이름을 외우기에만 급급했지 그가 어떤 사람인지 또 일제 강점기 당시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으니 자세히 알 리가 없었지요.
해마다 같은 날, 경모 대회 행사를 주관하는 단체는 ‘사단법인 배설(베델) 선생 기념사업회(회장 : 배영기)’였는데, 주최 측에서 준비한 책자 자료를 통해서 그날 ‘배델’이라는 이름의 한 영국인을 새롭게 알 수 있었을 뿐 아니라, 또 그 책자의 첫 페이지에 수록된 ‘평화의 기도’ 내용이 이렇게 가슴 뭉클한 울림을 주는 시인 줄 새삼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 시절 '평화의 기도'는 합창으로, 중창으로 수없이 많이 부르기도 했지만, 이날 비로소 자세하게 알게 된 ‘베델’이라는 언론인이자 외국인이면서 일본의 만행을 전 세계에 폭로했던 사람이, 마치 ‘평화의 기도’에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삶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책자에 소개된 이 시 역시 성 프란치스코의 작품으로 표기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평화의 기도’는 20세기 초, 어느 신원 미상의 사람이 쓴 시로 이미 확인된 바 있습니다. 그 시의 내용이 너무도 복음적이고 또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철저히 실천하며 살아냈던 프란치스코의 삶과 부합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최초의 시인으로 알려진 그의 작품이라고 그동안 간주 되어 온 것입니다.
베델(Ernest Thomas Bethell, 한국 명 배설 裵說)은 1872년 11월 3일, 영국 남동부에 있는 작은 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났습니다. 브리스톨에서 머천트 벤처러스 스쿨을 졸업한 후, 아버지와 이모부의 사업을 돕기 위해 1888년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나이 17세 때였습니다. 그 후 일본 고베에서 16년간 살면서 영국과 일본의 특산물을 수입하고 수출하는 무역 사업으로 베델 일가는 큰돈을 벌었습니다. 그리고 베델은 이모부의 사업 수완을 현장에서 배울 수 있었던 값진 시간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모부였던 니콜이 51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아버지 토머스 행콕 베델(1849~1912)은 일본에 있던 베델에게 일본 쪽의 사업을 모두 맡겼고, 베델은 형제들과 함께 ‘베델 브러더스’라는 회사를 설립, 본격적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갔습니다.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무렵, 잠시 영국을 다녀오는 틈을 이용하여 메리 모드 게일(1873~1965)을 만나 결혼, 아들 허버트 오언 친키 베델(1901~1964)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서 일본 현지에 공장을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무리한 투자가 되어 ‘베델 브러더스’는 이때부터 기울어져 갔습니다.
당시, 국제 정세는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고, 영국과 일본이 손을 잡으면서 러일 전쟁(1904년)이 발발하는 등 열강들이 서로 심각하게 겨루는 때였습니다. 그리고 세계인들의 관심은 전쟁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생하게 전달받는 것이 초미의 관심사가 되던 때였기 때문에, 세계 유수 언론사들은 유명한 종군 기자를 내세워 따끈따끈한 전쟁 뉴스를 앞다퉈 경쟁할 때였습니다. 말하자면, 종군 기자들이 슈퍼 스타 대접을 받던 시기였다고나 할까요. 우리가 잘 아는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또 영국의 총리를 지낸 윈스턴 처칠도 당시 종군 기자로 러.일 전쟁 취재차 한국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이때, 영국의 대형 언론사였던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은 다양한 이야깃거리를 쏟아내는 전장의 뉴스를 하루라도 빨리 전달하려고, 우선 일본과 동북아 사정을 아는 현지 통신원을 구하는 광고를 싣게 되고, 이 광고를 보고 펼쳤던 사업이 뜻대로 풀리지 않았던 베델의 호기심을 자극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새로운 국면을 시도하는 차원에서 데일리 크로니컬의 통신원에 지원, 1904년 3월 조선 땅에 오게 되었습니다.
그는 조선 땅에 온 지 한 달 만(4월 16일자 5면 톱기사)에 ‘특종’을 하나 발굴했는데, 아관파천으로 당시 고종 황제가 머물고 있었던 경운궁(현재의 덕수궁) 화재 사건이 ‘일본군이 방화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내용의 기사를 전송, 전 세계에 알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베델은 이 기사 때문에 영국 본사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습니다. 일본은 영국 정부를 움직여, 친일 성향의 데일리 크로니컬이 일본에 비판적인 기사를 싣게 된 것은, 베델 기자 때문이라고 부추켰기 때문입니다. 특종 기사 하나를 남기고 현지 통신원(기자)을 그만둔 베델은 곧바로 자신이 한국의 소식을 알리는 신문을 직접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는 조선 땅에 발을 디딘 지 3개월 만에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코리아 데일리뉴스(Korea Daily News : KDN)를 창간, 발행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나이 32세 때의 일이었습니다.
그가 발행했던 국한문 ‘大韓每日申報’와 순 한글 ‘대한매일신보’, 그리고 영어신문 ‘코리아 데일리뉴스’는 강력한 항일 논조를 견지하면서 일제의 조선 침략을 격렬하게 규탄하였습니다. 을사늑약의 무효를 논파(論破), 배일(排日) 독립사상을 고취하는가 하면, 고종의 친서를 게재하고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당시 열강 여러 나라 정상들에게 전달하여 일본의 강압적 침략 정책을 국내외에 폭로하였습니다. 정의 편에 서서 불편부당하게 '잘못이 있는 곳에 진리를 알리는' 도구의 역할을 했던 그에게 고종 황제는 한국 성명(姓名) “배설(裵說)”을 부여하고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저와 같은 성씨, 경주배씨 종친이 되었던 것입니다.
결국, 그는 일본으로부터의 탄압을 피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고 1908년 6월, 일제가 영국 정부를 끈질기게 설득, 주한 영국 총영사관으로 하여금 그를 국외로 추방하는 재판에 회부, 상하이에서 3주간의 금고형을 받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그 재판 뒤 일 년이 채 지나지 않은 1909년 5월 1일, 이역만리 조선 땅에서 37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서울 한강 변의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습니다. 1909년 5월 2일 거행된 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조문객이 서울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모여들었고, 한 외국인 기자의 의로운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대한매일신보는 이날의 장례식 모습을 이렇게 기사로 썼습니다.
‘양화도 장지로 가는 한국인 가운데 곡하는 자들이 상당수였고, 부인들도 배설공(公)의 집 근처에서 통곡했다. 영국 목사 터너가 장례식을 인도하고 한국 목사 전덕기가 기도한 뒤 성분(관을 묻고 묘를 흙으로 쌓아 올리는 것)하였는데 많은 이들이 분상(봉분) 앞에서 절하며 그를 기렸다. 장지까지 따라 온 인원은 내외국인 합쳐서 1000여명이었다.’
이름도 없고 잘 알려지지도 않았던 동방의 작은 나라 ‘조선’, 그리고 힘이 없어 일제의 침략을 받아 국권을 잃고 휘청거리고 있는 불쌍한 백성들을 위해 그는 무엇 때문에 그런 희생을 다 하면서 투쟁했을까. 베델의 삶을 되짚어보면서 오늘 감상하는 시, ‘평화의 기도’를 읽으면 마치 그 시 정신을 이 땅에서 살아내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착각이 들 정도입니다.
‘오, 주여! / 나를 당신의 평화의 도구로 삼아주소서....(중략) / 잘못이 있는 곳에는 진리를 알리고.../(중략) 어두운 곳에는 당신의 빛을 비추며 / 슬픔이 쌓인 곳에 기쁨을 전하는 / 사신이 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던 사람이 바로 이 땅 백성들을 지원하면서 일제의 탄압에 항거했던 ‘베델’이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 자기를 버려 죽음으로써 /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는 시어를 읽으면, 그가 대한매일신보의 총무였던 동역자 양기탁의 손을 잡고 마지막으로 했던 유언의 목소리가 쟁쟁하게 들리는 듯합니다. ‘내가 죽더라도 대한매일신보는 영원히 살아남게 해 한국 동포를 구해주세요’
오늘은 이 시에 곡을 붙인 남성 중창곡을 들으면서 글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 석전(碩田)
https://youtu.be/aZ4t1heMr-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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