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천리향 사태 /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석전碩田,제임스 2023. 5. 10. 06:37

천리향 사태

- 박규리

글쎄 웬 아리동동한 냄새가 절집을 진동하여
차마 잠 못들고 뒤척이다가
어젯밤 산행(山行) 온 젊은 여자 둘
대체 그중 누가 나와 내 방 앞을 서성이나
젊은 사미승 참다못해 문을 여니
법당 뒤로 언뜻 검은 머리 숨는 게 아닌가
콩당콩당 뛰는 가슴 허리 춤에 잡아내리고
살금살금 법당 뒤로 뒤꿈치 들고 접어드니
바람처럼 돌담 밑으로 스며드는 아,
참을 수 없는……내……음……오호라 거기라고,
거기서 기다린다고 이번에는
헛기침으로 짐짓 기별까지 놓았는데
이 환.장.할.봄날 밤, 버선꽃 가지 뒤로
그예 숨어 사라지다니, 기왕 이렇게 된 걸
피차 마음 다 흘린 걸
밤새 동쪽 종각에서 서쪽 아래 토굴까지
남몰래 돌고 돌다가 저 아래 대밭까지 돌고 돌다가 새
벽 도량석 칠 때까지 돌고 돌다가 온 산 다 깨도록 돌고
돌다가 이제 오도가도 못해서 홀로 돌고 돌다가……
천리향, 천리향이었다니…
…눈물 핑 돌아서

-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작과 비평, 2004)

* 감상 : 박규리 시인.

1960년 서울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문예창작과정을 수료하고, 2010년 동국대 대학원 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2013년에는 ‘경허 선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5년 신경림 시인 추천으로 <민족예술>에 ‘가구를 옮기다가’ 외 4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이 환장할 봄날에>(창비, 2004)가 있으며 2010년 한국저축은행에서 시상하는 제비꽃서민시인상을 수상했습니다.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겸임교수로 있으며, 저서로는 <경허 선시 연구>가 있습니다.

는 지금 멀리 제주도에 와 있습니다. 오늘부터 있을 행사를 위해서 어제 미리 내려온 것인데 해마다 이맘때 제주도에 오면 어디선가 은은하게 묻어오는 향기를 느낄 수 있습니다. 바로 ‘귤꽃 향기’입니다. 4월 말에서 5월 중순에 피는 귤꽃은 그 향기가 마치 치자꽃 향기를 닮기도 했고 비슷한 모습의 천리향 꽃향기를 닮기도 했습니다. 매혹적이다 못해 신비롭기까지한 제주의 귤꽃 향기 때문에 오늘 감상할 시는 ‘향기’와 관련된 시를 한번 골라봤습니다.

늘 소개하는 시는 향기를 시적 은유로 이야기처럼 풀어낸 ‘치자꽃 설화’라는 시로 이미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잘 알려진 박규리 시인의 또 다른, 향기와 관련된 시입니다. 향기가 천리를 간다고 하는 천리향의 향기, 어둠 속에서도 절대로 기죽지 않고 ‘고혹적인 은은한 향기’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천리향 꽃향기를 ‘사태’라고 표현하면서 산사 수도승 마져도 흔들릴 수 밖에 없는 '환장할 봄날의 정취'를 익살스럽고 재미나게 노래한 시입니다.

고 시절, 몸이 아파 택시를 타고 등교해야만 했을 정도로 병명조차 알 수 없는 지병으로 쇠약했던 그녀였습니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을 읽고 엄마 품에서 ‘세상에 이렇게 불쌍한 것이 여자라니’라며 펑펑 울었던 그녀는 문학 잡지를 탐독하면서 시인의 꿈을 키워갔습니다. 그러나 대학은 문학과는 전혀 상관없는 약학 대학에 진학을 했고, 문학 열병을 앓던 그녀는 결국 중도에 대학을 그만두었습니다. 대학 중퇴 후 신경림, 정희선 시인을 만나 문학 지도를 받았던 그녀는 1995년 <민족예술>을 통해 문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약해진 건강으로 인해 잠시 쉼이 필요했습니다. 그녀가 찾은 곳은 평소 집안과 친분이 있었던 전북 고창의 작은 암자, [미소사(微笑寺)]였습니다. 그곳에서 공양주(供養主 : 절에서 밥짓는 일을 주로 하는 사람)로 있으면서 박 시인은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공양으로 섬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여전히 세상에 시집 한 권을 내 보겠다는 당찬 야심을 가지고 매달렸습니다. 하루라도 빨리 한권의 시집을 낼 만한 시를 쓴 후 하산하려 했던 그녀의 공양주 생활은 무려 8년이나 지속되었습니다.

‘금강경은 나를 바꿔놓은 스승이었고 나를 치유한 의사였습니다. 그토록 깊은 편견과 아집으로 가득 차 오로지 깜깜한 방안을 헤매고 있던 제가, 드디어 하늘을 바라보고 새소리를 들으며 작고 작은 나 자신을 들여다보기 시작했거든요. 그리고 버리는 마음마저 버리면 이 세상 전부가 다 시(詩)일 것이라는 확신이 왔습니다.’

녀의 고백처럼, 금강경을 만난 후 1년, 2년 지나면서 마음의 안정은 물론, 당장 시를 쓰지 않아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부터 시가 그녀를 찾아왔다고 표현하는 것이 적합할 듯합니다. 자신의 깊은 곳을 들여다본 후 쓴 시들이 한 편 두 편 세간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각종 문예지에 작품이 하나둘씩 실렸고, 1999년에는 ‘좋은 시 99’에 그녀의 작품 ‘치자꽃 설화’가 선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변소 간의 비밀’이 올해의 좋은 시로 선정되었으며, 2003년에는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좋은 시’로도 선정되었습니다.

시집이자 마지막 시집인 <이 환장할 봄날에>에 실린 이 시들은 그러니까 그녀가 8여 년 동안 암자에서 조금씩 변화되어 가는 시인 자신과 듣고 본 사연들을 풀어 고스란히 시로 담아낸 이야기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의 시집에 실린 50여 편의 시들은 산사에 머무르면서 수행자와 세속에 사는 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 있는 관찰자의 눈으로 쓴 시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시집을 추천하는 글에서, 신경림 시인은 '박규리의 시는 새파란 칼날의 매서움과 봄 햇살의 부드러움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평했습니다.

혹적인 은은한 향기로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 제주의 귤꽃 향기. 몇 해 전 그 향기의 진원을 찾아 헤매다가 나도 모르게 한라산 중턱까지 한달음에 올랐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를 읽다 보면, ‘천리향’ 때문에 산사의 수행승인 사미승이 야릇한 유혹에 아슬아슬 고비를 넘기는 모습이 그때 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어 200% 공감이 간다고나 할까요.

의 첫 행에서 시인이 표현한 ‘웬 아리동동한 냄새’가 ‘참을 수 없는……내……음……’이 되었다가, 결국에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시인을 오도 가도 못하게 하는 ‘천리향’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너무도 재미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쯤에서 단 한 권의 시집이지만, 그녀를 유명하게 만든 시, ‘치자꽃 설화’를 한번 감상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합니다.

치자꽃 설화

- 박규리

사랑하는 사람을 달래 보내고
돌아서 돌계단을 오르는 스님 눈가에
설운 눈물 방울 쓸쓸히 피는 것을
종탑 뒤에 몰래 숨어 보고야 말았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문 하나만 열어 놓고
기도하는 소리가 빗물에 우는 듯 들렸습니다


밀어내던 가슴은 못이 되어 오히려
제 가슴을 아프게 뚫는 것인지
목탁소리만 저 홀로 바닥을 뒹굴다
끊어질 듯 이어지곤 하였습니다

 

여자는 돌계단 밑 치자꽃 아래
한참을 앉았다 일어서더니
오늘따라 엷은 가랑비 듣는 소리와
짝을 찾는 쑥국새 울음소리 가득한 산길을
휘청이며 떠내려가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멀어지는 여자의 젖은 어깨를 보며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어려운 일인 줄 알 것 같았습니다

 

한번도 그 누구를 사랑한 적 없어서
한 번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야말로
가장 가난한 줄도 알 것 같았습니다

 

떠난 사람보다
더 섧게만 보이는 잿빛등도
저물도록 독경소리 그치지 않는 산중도 그만 싫어,
나는 괜시리 내가 버림받은 여자가 되어
버릴수록 더 깊어지는 산길에 하염없이 앉았습니다


- 시집 <이 환장할 봄날에>(창작과 비평, 2004)

사에서 있을 법한 상황을 마치 수채화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시에는 ‘향기’라는 말이나 표현이 한마디도 없지만 그림 속에는 온통 치자꽃 향기가 가득 차 있는 듯합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고 출가한 수행자에게 속세의 연인이 찾아 왔지만 그 수행자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그만 돌아서게 되었다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멀리서 관찰하고 있는 화자(話者)가 이 상황을 마치 수채화를 그려내듯이 풀어내고 있는 설화같은 시입니다.

5월 이 환장할 봄날에, 귤꽃 향기 가득한 제주 섬에서 한 주를 보낼 수 있음에, 행복한 눈물이 핑 도는 아침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