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광야 - 이육사 / 단짝 - 김선태

석전碩田,제임스 2023. 4. 5. 06:03

광야

 

- 이육사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하진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

 

- <자유신문>(1945.12.17.)

 

* 감상 : 이육사. 시인, 독립투사.

1904년(고종 41년) 5월 18일에 경북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원촌마을)에서 태어났으며, 1944년 1월 16일 향년 39세로 사망하였습니다. 본관은 진성(眞城, 遠村派). 본명은 이원록(李源祿) 또는 이원삼(李源三). 호는 육사(陸史). 대구형무소에 있을 때 수감번호가 264(二六四)호였기 때문에 호를 ‘육사’로 지었다고 합니다.

 

린 시절 조부(이중직)로부터 한학을 공부하다가 조부가 별세하자 1916년 보문의숙(이후 도산공립보통학교로 개칭)에서 공부하였으며, 1920년 졸업 후 온 가족이 대구시 중구 남산동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정착하자 영천에 있는 사립 백학학원에서 잠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924년 4월, 일본 동경에 있는 킨죠(錦城) 예비학교를 1년 다니다가 중퇴하였고, 1925년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대학 상과에 입학하였으나 중퇴하였습니다.

 

1927년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 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서 3년간의 옥고를 치렀습니다. 이때 그의 수감번호가 264번이었습니다. 출옥 후 1929년 5월부터 중외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1년간 근무하였는데 이때 그의 첫 시(詩)인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였습니다. 그 후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 기자로 전직하였으나 곧바로 퇴사하고 1932년 4월 만주 펑텐으로 가서 의열단에 입단하였으며, 곧 난징에 있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1기생으로 입교하였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폭탄, 탄약, 뇌관 등의 제조법과 투척법, 피신법, 변장법, 무기 운반법 등을 익혔으며 특히 권총 사격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1933년 간부학교를 졸업한 후 귀국하여 ‘육사’라는 필명으로 ‘춘수삼제(春愁三題)’, ‘황혼’ 등의 시를 <신조선>지에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등단했습니다. 신문사, 잡지사 등을 전전하면서 시작(詩作) 이외에 논문, 시나리오, 심지어 루쉰의 소설 ‘고향’을 번역하는 등 30여 편의 시와 소설, 수필, 문학평론, 일반 평문 등 많은 작품을 발표하였습니다. 그가 살아 있을 때는 시집을 발간하지 못했으며, 1946년 그의 동생인 이원조에 의하여 서울 출판사에서 <육사시집> 초판본이 간행되었습니다. 1934년 3월, 의열단 및 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임이 밝혀지면서 검거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4개월 후 기소유예로 석방되었습니다.

 

1937년 시인 윤곤강, 김광균 등과 함께 시 동인지 <자오선(子午線)>을 발간, ‘청포도’, ‘교목’, ‘절정’, ‘광야’ 등을 발표하였으며 1943년 중국 베이징으로 건너갔다가 어머니와 큰형의 소상을 위해 5월에 귀국했는데 그 이듬해 동대문 경찰서 형사에게 체포되어 베이징으로 압송, 베이징 주재 일본총영사관교도소에 수감 중, 옥사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서울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0년 안동시로 이장이 되었습니다. 1968년 안동시는 그의 시비를 건립하였고 2004년 도산서원 근처에 <이육사 문학관>을 세워 그를 기리고 있습니다. 안동의 강변도로 이름이 ‘이육사로’로 이름 붙여진 것은 오롯이 독립의 의지를 불태우며 맨몸과 펜으로 실천한 그의 정신을 이어받자는 뜻일 것입니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황혼’, ‘청포도’(문장, 1939.8), ‘절정’(문장, 1940.1), ‘광야(廣野)’, ‘꽃’(자유신문, 1945.12)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는 고등학교 1학년 국어 교과서에 실려 있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 시는 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절체절명의 위기 속을 살아가면서 그가 지녔던 간절한 독립에의 염원과 먼 장래를 내다보는 소원이 담겨 있는 시입니다. ‘지금은 눈 내리고 /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는 표현은, 그가 시와 글을 통해서 이루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처절하게 말해 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은 비록 시인이 아무 힘이 없이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리고 있지만, ‘그날’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어쩌면 ‘천고(千古)의 뒤’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날’은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며, ‘그날’에는 어느 시인이 ‘이 광야에서 목 놓아 부르게 하리라’고 울부짖는 시인의 우렁찬 목소리가 지금도 들리는 듯합니다.

 

그제 봄볕이 좋은 날, 광화문 광장을 거닐면서 [2030년 부산 엑스포] 유치를 응원하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대기업들의 홍보 부스를 기웃거리면서 잠시 망중한을 즐겼습니다. 그러다가 벤치에 앉아 땀을 잠시 식히고 있는데, 바로 앞 교보생명 건물 글 판에 커다랗게 씌여져 있는 시와 그림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다사로운 봄날 / 할어버지와 어린 손자가 / 꼬옥 팔짱을 끼고 / 아장아장 걸어간다’는 김선태 시인의 ‘단짝’이라는 시에서 인용된 문구였습니다.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손을 꼬옥 잡고 언덕을 넘어가는 삽화 그림을 보면서, 세대와 세대를 이어가는 가슴 뭉클한 ‘그 뭔가’를 소환해 낼 수 있었습니다. 오래전 교보생명을 창립했던 故 대산 신용호 회장(1917~2003)과 관련된 글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만주에서 이육사 시인을 잠시 만난 적이 있는데, 그 짧은 만남은 그 이후 신 회장의 삶의 방향과 목적을 완전히 바꿔놓은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돈을 벌면 나라와 민족을 바로 세우는 민족자본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부강한 나라를 만드는 기초는 국민을 교육해야 한다는 것 등은 시인 이육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그 영향을 받아 실제로 삶 속에서 실천했다는 것입니다.

 

이후 삶 속에서 그가 실천했던 많은 일 중에서 그 실천의 한 가지 모습이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비싼 땅에 세워진 사옥 한 가운데, 상업 광고판을 매달아 놓는다면 하루에도 수억을 벌어들이겠지만 그리하지 않고, 삶의 현장에서 힘들어하는 시민들에게 한 줄기 시원한 생명수와 같은 글귀로 위로하고 격려하는 ‘광화문 글판’을 운영해 온 것입니다. 알고 보면 이런 모습의 저 먼 시작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시인 이육사로부터 시작된 불굴의 의지가 신용호 회장, 그리고 그 기업을 물려받아 현재 경영하고 있는 그의 차남 신창재 교보생명 회장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대물림이지 않을까. 이 따사로운 봄날, 광화문 글판에서 말하는 ‘단짝’들인 셈입니다.

 

단짝

 

- 김선태

 

다사로운 봄날

할아버지와 어린 손자가 꼬옥 팔짱을 끼고

아장아장 걸어간다

 

순진무구의 시작과 끝인 저들은

세상에 둘도 없는 단짝이다.

 

- 시집 <짧다>(천년의 시작, 2022)

 

다사로운 봄 햇볕이 아름다운 날, 광화문 광장을 거닐며 우리 대기업들이 펼치는 2030년 부산 엑스포 응원전 부스에서, 이런저런 다양한 체험을 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육사 시인이 열망하며 기다렸던 ‘백마 타고 오는 초인’은 지금 이 순간 전 세계를 리드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할아버지에서부터 어린 손자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있는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목 놓아 부르는’ 대한 건아(大韓健兒)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생각 말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