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 그런 사람을 가졌는가
- 함석헌
만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탔던 배 꺼지는 시간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 할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불의의 사형장에서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저만은 살려 두거라’ 일러 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 시집<수평선 너머>(한길, 2009)
- 1953년 3월, 피난지 부산에서 발간되었던 첫 시집 <수평선 너머>를 그의 전집 제 6권에 다시 발간하였으며, 그의 사후 2009년에는 새로 발견된 시들을 덧붙여 같은 이름의 단행본 시집 <수평선 너머>를 출판했습니다.
* 감상 : 함석헌.
호는 ‘씨알’, ‘신천(信天)’, ‘바보 새’. 1901년 3월 13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나서 1989년 2월 4일에 별세한 독립운동가, 종교인, 언론인, 출판인, 기독교 운동가, 시민사회 운동가. 광복 이후 비폭력 인권 운동을 전개한 인권운동가, 재야운동가, 문필가.... 이렇듯 그에게 따라붙는 수식어 직함이 참으로 많습니다. 1919년, 그의 나이 19세 때 평양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고 퇴학을 당해 2년간 학업을 중단했고, 그 기간 소학교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921년 평북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수학하였으며, 그곳에서 류영모를 만나 평생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1923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문과 1부에 입학하여,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 집회에 참가, 그의 영향을 받아 무교회주의 신앙 클럽을 결성하기도 했습니다. 1928년 동경고등사범학교 역사과를 수석으로 졸업함과 동시에 오산학교에서 역사와 수신 과목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김교신 등과 1927년에 창간했던 동인지 <성서조선>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뜻으로 본 한국 역사)’를 연재했습니다. 이후 1938년 3월까지 오산학교에서 교사로 있다가 사임하고, 1940년 계우회 사건으로 일본 당국에 의해 투옥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서 1년간 수감되었습니다. 1942년에 풀려났으나 그해 5월, <성서조선>에 실린 김교신의 <조와(弔蛙)>라는 우화로 인해 관련자 모두가 투옥될 때 함석헌은 또다시 서대문형무소에 미결수로 수감, 1년간 복역하였습니다. 해방 후에도 반공 시위인 신의주 학생 시위의 배후 인물로 지목되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후 1947년 3월, 월남하였습니다.
장준하 선생 추천으로 <사상계> 논객으로 활약했는데 당시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제목으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컬럼이 유명합니다. 1970년 월간 잡지 <씨ᄋᆞᆯ의 소리>를 창간, 장준하 선생 등 재야언론인들이 주요 필진으로 참여했으나 1980년 1월 군부정권에 의해 폐간되었습니다. 저서로는 <뜻으로 본 한국역사>(1948), <인간혁명>(1961), <역사와 민족>(1964), <통일의 길>(1984),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1984), <함석헌 저작집>(2009), 그리고 시집 <수평선 너머>(2009) 등이 있습니다. 1979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습니다.
교육자의 눈에는 교육자로, 사상가의 눈에는 사상가로, 언론인의 눈에는 언론인으로, 역사가의 눈에는 역사가로, 종교인의 눈에는 종교인으로 보였던 함석헌. 그런데, 이 많은 호칭에 그가 시를 썼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는데, 오늘 우리가 읽은 시는 분명 그가 쓴 시가 맞습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은 그를 시인의 눈으로 보려고 합니다.
이 시를 감상하기 전에 시인 함석헌이 그의 시집 머리말에 쓴, 서늘함이 느껴지는 글부터 먼저 읽어보면 좋을 듯합니다.
[나는 시인이 아니다. 세상에 나와 마흔다섯이 되도록 시라곤 써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내 천분도 그렇겠고, 나 자신 삶에 참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도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가 못났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 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거기 나서, 가뜩이나 무딘 맘에다 줄을 골라주는 사람 하나 없이 젊은 날을 다 지냈으니 시가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영원을 지향하는 충동을 품고 고난의, 역사의 짐을 지는 한 개 심정인 이상 시가 왜 없으리오만, 그것은 품어주는 날개 없는 알같이 다 곯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생각하면 참혹한 일이다…. 독자여, 이것은 시가 아니다. 시 아닌 시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 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 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 못하고, 학자도 못 되고, 기술자도 못 되고, 사상가도 못 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시를 써서 시가 될 리가 없다. 나는 내 맘에 다 칼질을 했을 뿐이다. 그것을 님 앞에 다 바칠 뿐이다. 이것은 시 아닌 시다. - 함석헌]
그가 시를 처음 쓰기 시작한 것은 해방 정국의 혼란 속에서였습니다. 신의주 감옥에 50일을 갇혀 있을 때 썼던 옥중 시 300여 편을 모아 <쉰 날>이라는 제목의 육필시집을 꾸몄지만, 월남하는 도중에 작품 대부분이 유실되고 말았습니다. 6.25 전쟁의 피난 생활 와중에도 그는 줄기차게 시를 쓰면서 농민운동을 비롯한 사회운동에 나섰고 전국의 청년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그가 쓴 이 시들을 등사하여 읽었다고 합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그가 살아온 인생 이력을 살펴보면 특별히 시를 해석할 필요도 없이 마음으로 다가오는 내용 그대로 느끼면 되는 다짐의 시입니다. 공생애의 삶을 위해서 ‘만리 길 나서는 길’에 온 가족을 맡길 그런 사람이 내 곁에 있는지 묻는 말은, 내가 살아오면서 그런 사람을 내 주변에 두었는지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비장한 결단과 각오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 다 나를 버려 / 마음이 외로울 때에도 / ‘저 맘이야’하고 믿어지는‘, 또 ‘탔던 배 꺼지는 시간 / 구명대 서로 사양하며 / ‘너만은 제발 살아다오’할 그런 사람, ‘불의의 사형장에서 / ‘다 죽어도 너희 세상 빛을 위해 / 저만은 살려 두거라’라는 말은 넓은 길이 아닌 좁은 길을 가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예레미야의 절규'이자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 지고 맷돌 가는 삼손'의 호소이며 다짐입니다.
온통 가짜가 판을 치고, 이기주의와 기만, 배신이 여반장인 난장판 사회를 살아가면서 함석헌의 이 시는 마치 우리가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주는 ‘등불’이요, 그 방향을 알려주는 ‘이정표’임에 틀림없습니다.
혜화동 대학로에 가면 공원 한켠(혜화역 1번 출구 근처)에 함석헌의 시비가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비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천둥 같은 목소리로 ‘이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온 세상의 찬성보다도 / ‘아니’하고 가만히 머리 흔들 그 한 얼굴 생각에 / 알뜰한 유혹을 물리치게 되는 /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고.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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