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몽(春夢)
- 오탁번
아내와 함께 스포티지 몰고
홍쌍리 매화마을로 매화구경을 갔다
한창 피어나던 매화는 꽃샘추위에
엇, 추워! 하면서 올스톱,
피다만 매화만 싱겁게 구경하고
내친김에 핸들을 꺾었다
장흥에서 제주 성산포행 카페리를 탔다
사람은 3만8천원, 자동차는 6만8천원
넘실대는 푸른 봄바다는 공짜!
이중섭의 아내같이 생긴 수선화도
추사의 족제비붓 같은 솔잎도
재재재재 춥다
한라산 산록을 재는 측량기사인듯
몇 번이고 돌고 돌았다
흑석영(黑石英)처럼 빛나는 까마귀떼와
눈 쌓인 한라산이
부운(浮雲)처럼 다 하릴없다
이틀을 묵고 떠나는 날 아침
조천 바닷가에 있는
조붓한 '시인의 집'에 차 마시러 갔다
손세실리아 시인이
꼭 어느 낭만 시인의 아내인듯 사는 곳
방명록에 한 줄 쓰라는 말에
나는 붓펜으로 일필휘지했다
- 시인의 집에서
손세실리아와 사랑을 나누다
2012년 입춘(立春)
그걸 받은 시인이
내 아내에게 보여주면서 웃었다
볼이 발그레해지면서
얼른 한쪽으로 치워놓을 줄 알았는데
나, 원, 참!
내 아내에게 냉큼 보여주다니!
차를 마시고 일어설 때
아침 요기하라면서
치즈 토스트까지 챙겨주었다
배 타고 바다 건너오면서
토스트 냠냠 잘 먹었다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이내 답장이 왔다
- 다녀가신 순간이 춘몽 같기도.....
그렇기도
아무렴, 일장춘몽(一場春夢)이긴 해도
이쯤 춘몽이면 썩 괜찮은 것 아냐?
그렇고말고! 그렇고말고!
히힛히힛, 봄바다가 자꾸 웃었다
- 시집 <시집보내다>(문학수첩, 2014)
* 감상 : 오탁번. 소설가, 시인.
1943년 7월 충북 제천시 백운면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려대학교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하였으며 중위로 입대한 후 1974년까지 육군사관학교 국어 교육관, 수도여자사범대학(현재의 세종대학교)을 거쳐 1978년부터 고려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2008년 8월 정년퇴임, 명예교수로 있다가 지난달 2월 14일, 향년 79세로 별세하였습니다. 2003년, 그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제천시 백운면, 박달재 아래에 있는 모교 백운초등학교 애련 분교의 건물과 부지를 사들여 [원서문학관 : 원서헌(遠西軒)]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귀촌하였습니다.
1966년 고대신문사 학생기자로 활동하던 스물네 살 때 동아일보에 ‘철이와 아버지’라는 제목의 동화가, 그리고 1967년 이듬해에는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순은이 빛 나는 이 아침’이라는 시가 당선되었며 1969년에는 대한일보 소설 부문에 당선됨으로써 신춘문예 3관왕으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1987년 한국문학 작가상, 1994년 동서문학상, 1997년 정지용 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한국시인협회장을 역임하였습니다.
시집으로는 <아침의 예언>(조광, 1973), <너무 많은 가운데 하나>(청하, 1985), <생각나지 않는 꿈>(미학사, 1991), <겨울강>(세계사, 1994), <1미터의 사랑>(시와시학사, 1999), <벙어리장갑>(문학사상사, 2002), <손님>(황금알, 2006), <우리 동네>(시안, 2010), <시집보내다>(문하수첩, 2014), <알요강>(현대시학사, 2019). <비백飛白>(문학세계사, 2022) 등이 있고, 문학선 <순은의 아침>(나남, 1992)과 시선집 <사랑하고 싶은 날>(시월, 2009), <밥 냄새>(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눈내리는 마을>(시인생각, 2013) 등이 있습니다.
오탁번 시인은 해학과 풍자, 그리고 거침없는 입담의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세간에 떠도는 익살과 만담을 시의 소재로 끌어들여 질펀하게 녹여내는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시인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폭설’과 ‘굴비’라는 시, 그리고 ‘해피 버스데이’ ‘누룽지’와 같이 널리 알려진 시들이 대표적입니다. 말하자면 오탁번 시인은 우아하고 고상한 언어를 찾아서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 각 지방의 친숙한 사투리와 계층에 맞는 세속적인 언어를 찾아 대중들의 삶을 이해하고 대변하면서 독자들과 자연스럽게 공감을 끌어내는데 탁월합니다. 수많은 애환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시인은 웃음과 해학으로 표현해내면서 민중의 아픈 마음을 위로하고 입가에 미소가 맴돌게 하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시인이라고 표현하면 적합할 것 같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11년 전 장흥 제주 성산포간 카페리 호에 차를 싣고 아내와 같이 제주도 여행을 갔다가, 그 당시 막 ‘시인의 집’을 열고 조천에 정착한 손세실리아 시인을 만난 이야기를 담백하게 풀어낸 시입니다. 지난 달 오탁번 시인이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이 시에 등장한 손세실리아 시인이 페이스북에 직접 이 시를 소개하면서 그의 죽음을 애도했지요.
충북 제천, 그것도 강원도와 가까운 산골에는 봄이 유난히 드디 찾아옵니다. 아마도 시인도 입춘이 가까워오면서 봄꽃을 그냥 앉아서 기다리는 게 답답하여 남녘으로 탐매(探梅) 여행을 떠난 듯합니다. 그러나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라는 말이 있듯이, 입춘(立春)이라고는 하지만 ‘꽃샘추위에 / 엇, 추워! 하면서 올스톱’ 아직 어디에도 봄꽃은 없었습니다. 내친김에 부부는 차를 배에 싣고 제주도로 건너갔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도 봄꽃은 없었고 제주도의 겨울 수선화 정도만이 그들을 맞았을 뿐입니다. ‘몇 번이고 돌고 돌았다 / 흑석영(黑石英)처럼 빛나는 까마귀떼와 / 눈 쌓인 한라산이 / 부운(浮雲)처럼 다 하릴없다’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 시절 느꼈던 추위만큼이나 그곳도 여전히 ‘재재재재 춥다’고 그는 노래합니다.
이틀을 더 묵은 후, 까마득한 후배 시인이 조천 앞바다를 앞마당 삼아 그림 같은 책방을 열고 ‘시인의 집’이라 문패를 달고 귀촌했다 하니, 그곳에 가서 일장춘몽 같은 선후배 사랑을 나눈 일화가 시의 후반부입니다.
방명록에 아무도 모르게 일필휘지 ‘- 시인의 집에서 / 손세실리아와 사랑을 나누다 / 2012년 입춘(立春)’이라고 연애편지 같은 사인을 했는데, 시인의 이런 마음도 모르고, 그걸 ‘내 아내에게 냉큼 보여주다니!’ 속마음을 들킨 듯 장탄식(長歎息)을 하는 노시인의 모습이 빙그레 웃음 짓게 만듭니다.
지난 일요일 오후, 소심이를 데리고 아내와 함께 이곳 ‘은평’으로 이사 오기 전 자주 갔던 월드컵 공원에 가서 혹시 매화꽃망울이라도 터졌을까 열심히 찾아봤으나 허사였습니다. 이맘때가 되면 봄의 전령이라고 할 수 있는 봄꽃이 보고 싶어 상사병이 날 정도로 갈증이 도지는 건 꼭 시인만이 아닌듯합니다. 그 날 저도 공원을 산책하는 사람들에게 ‘혹시 공원 안에서 매화꽃을 보셨냐?’고 뜬금없는 질문을 하면서, 반 미친 사람처럼 돌아다녔으니까요.
이쯤에서 오탁번 시인을 기리는 의미에서 그가 얼마나 해학이 넘치는지, 그리고 얼마나 우리의 실제 삶 속에서 찾은 시어들을 잘 버무려 내는지 엿볼 수 있는 시 한 편을 더 감상하면서 이 글을 맺으려 합니다.
시집보내다
- 오탁번
새 시집을 내고 나면
시집 발송하기가 여간 힘든게 아니다
속표지에 아무개 님 청람淸覽, 혜존惠存, 소납笑納
반듯하게 쓰고 서명을 한다
주소와 우편번호 일일이 찾아 쓰고
튼튼하게 테이프로 봉해서
길 건너 우체국까지
내 영혼을 안고 간다
시집 한 권 정가 8000원
우표값 840원 * 200권, 300권.....
외로운 내 영혼을 떠나보낸다
십 몇 년 전 <벙어리장갑>을 냈을 때
- 벙어리장갑 받았어요
시집 잘 받았다는 메시지가 꽤 왔다
어? 내가 언제
벙어리장갑도 사줬나?
털실로 짠 벙어리장갑 끼고
옥수수수염빛 입김 호호 불면서
내게로 막 뛰어오는 아가씨와
첫사랑에 빠진 듯 환하게 웃었다
몇 년 전 <손님>을 냈을 때
- 손님 받았어요
시집 받은 이들이
더러더러 메시지를 보냈다
그럴 때면 내 머릿속에
야릇한 서사적 무대가
흐린 외등 불빛에 아련히 떠올랐다
서울역 앞 무허가 여인숙에서
빨간 나일론 양말에 월남치마 입고
맨허리 살짝 드러낸 아가씨가
팥국숫빛 입술로 속삭이는 것 같았다
아가씨 몇 데리고 몸장사하는
포주가 된 듯 나는 빙긋 웃었다
지지난 해 가을 <우리 동네>를 내고
많은 시인들에게 시집을 발송했는데
시집 받았다는 메시지가
가물에 콩 나듯 왔다
- 우리 동네 받았어요
어? 내가 언제 우리 동네를 몽땅 사줬을까
기획부동산 브로커가 된 듯
나는 괜히 우쭐해지다가도
영혼을 팔아 부동산을 산
못난 졸부의 비애에 젖었다
수백 권 넘게 시집을 발송하다 보면
보냈는지 안 보냈는지 통 헷갈려서
보낸 이에게 또 보내고
꼭 보내야 할 이에게는 안 보내기도 한다
- 손현숙 시집 보냈나?
난감해진 내가 혼잣말로 중얼거리자
박수현 시인이 말참견을 한다
- 선생님이 정말 시집보냈어요?
그럼 진짜 숨겨논 딸 맞네요
뒤죽박죽이 된 나는 또 중얼거린다
- 김지현 시집 보냈나?
- 서석화 시집 보냈나?
- 홍정순 시집 보냈나?
마침내 이 세상 모든 여류시인이
시집을 갔는지 안 갔는지 죄다 아리송해지는
깊은 가을 해그름
내 영혼마저 흐리게 이을고 있다
- 시집 <시집보내다>(문학수첩, 2014)
시인은 시를 쓸 때 원고지에 만년필로 또박또박 한 글자 한 글자 생명을 토하듯이 썼다고 합니다. 이 시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내 영혼’이라는 시어는 그저 허투루 쓴 표현이 아닙니다. 컴퓨터가 발달한 시대를 살았지만 시인이 그렇게 고집한 데에는 시를 쓰고 글을 쓰는데 혼신의 힘을 다 쏟아붓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쓴 시들을 묶어 시집을 내면, 일일이 주소와 우편번호를 찾아 쓰고, 속표지에 이름과 혜존, 청람, 소납 등 받는 사람의 나이와 성격에 맞는 적절한 단어를 골라 쓴 후에 발송하는, 아날로그 감성이넘치는 시인이었습니다.
만 80세를 넘기지 못하고 2023년 입춘지절(立春之節)에 아쉽게도 황망히 먼 길을 떠난 오탁번 시인이 이맘때가 되면 자꾸만 그리워질 것 같습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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