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시구문 / 고매사 - 정호

석전碩田,제임스 2023. 3. 15. 06:36

시구문

- 정호

둘레길 벗어나 원효봉 향한다
선발대는 벌써 시구문을 지났다는 카톡이 온다
詩句文이겠거니,
명필의 필치가 너럭바위에 새겨져 있거나
어느 문장가의 싯귀 하나 암벽에 들러붙어 있을 법한,
아니면 반정으로 겨우 도망쳐 나온 어느 왕족이
복귀를 꿈꾸며 호시탐탐하던 時求門이었거나
그도 아니면 侍龜門이어서
거대한 거북바위 하나 계곡 암반에 엎드려 있을 것 같은

詩句 時求 侍龜 다 아니라면
始球는 절대 아니겠고
枾九, 市區, 혹시 뻐꾸기 산비둘기 많아서 鳲鸠門?
아님 누룽지 달라 꼬리치는 媤狗인가?
그도 아니라면 중성문 대남문을 비롯한 아홉 개의 문이 있다는 건지
가파른 돌계단 오를 때마다 궁금증 하나씩 배낭에 주워 담으며
시구시구, 에라 얼씨구절씨구/ 땀 뻘뻘 도달한

시구문,
죽어서도 괄시받던 민초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던,
꽃상여는 못 탈망정 사대문 문간조차 편히 누워 나가지 못한
屍, 口, 門,*
나 거기서 한참을 서성이네
지레 짐작한 시향詩香으로 꽉 찼던 내 머리
느닷없이 소슬바람에 스산히 떨어지는 명命 다한
단풍잎 몇 구軀의 시향屍香들로 어지럽네

* 시구문(屍口門): 시체를 내가는 문

- 시집 <철령으로 보내는 편지>(가온, 2020)

* 감상 : 정호 시인. 본명은 정경호.

울산 울주에서 태어났습니다. 2004년 <문학·선> 신인상을 통해 50세 늦은 나이에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비닐꽃>(북인, 2011), <은유의 수사학>(가온, 2018), <철령으로 보내는 편지>(가온, 2020) 등이 있고, 여행 詩作 에스프리 산문집 <시로 쓰는 사계>(가온, 2019)가 있습니다. 한국문학비평가협회 문학(시)상(2018),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문학·선> 작가회 회장, 한국현대시인협회 사무차장을 역임하였으며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과 돌밭 수석회 고문을 맡고 있습니다. 성보고, 서울미술고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였습니다.

칠 전, 지인과의 점심 식사를 위해서 약속이 잡힌 장소에 갔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동대문에 있는 현대 시티아울렛 빌딩. 그곳은 정확히 49년 전인 1974년, 중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처음 전학을 왔을 때 제가 다녔던 덕수중학교가 있던 ‘바로 그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회가 새롭던지요! 그날 식사 후에 그 시절을 생각하면서 아직도 청계천 7가 평화시장에 버티고 있는 중고 책방을 여유를 가지고 둘러봤습니다. 당시 방과 후에는 수없이 늘어선 서점들을 돌아다니면서 필요한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하면서, 타향살이에서 오는 외로움을 달래곤 했는데, 그 당시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군데 남아 있는 헌책방 탐방을 하면서 옛 추억을 소환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요즘 서점에서는 쉽게 구입할 수 없는 큼직한 옥편을 한 권 구입했고, 또 몇 권의 오래된 시집들과 여행과 관련된 책들을 구입했습니다. 뜻밖의 득탬을 한 것이지요.

늘 감상하는 시는 바로 그들 책 중의 한 권인 정호 시인이 쓴 여행 산문집 <시로 쓰는 사계>에 실려 있는 ‘고매사古梅寺’라는 제목의 시를 접한 후, 그가 쓴 다른 시를 찾다가 만난 시입니다. 선암사에 피었다는 매화꽃 소식을 듣고 한달음에 남도에 내려가서 봄꽃의 눈부신 향연을 노래한 시인데, 시 한 편이  완성되기까지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동료 시인과 의견을 주고받았던 생생한 뒷 이야기가 곁들인 산문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이렇게 솔직한 시인이 누구인지 궁금해지면서 그의 시들을 더 검색해서 찾다가 그의 시편들에서 설명할 수 없는 매력을 발견했습니다.

‘고매사(古梅寺)’는 동료 시인이 선뜻 그에게 선물했던 ‘시 제목’이라고 밝혔는데,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는 절을 두고 부르는 말이라고 합니다. 먼저 이 시를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고매사古梅寺

- 정호

조춘시早春詩 한 편
탈고되었다는 소식에 남도길 달려갔다
선암사 무우전無憂殿 돌담 아래
벙긋벙긋, 첫 줄부터 만개체滿開體로 반기는 문장들
봄 햇살에 행간이 눈부시다
얽히고설킨 가지마다 톡톡 튀는
언어의 질감,
농익은 유희 속으로 정신없이 빠져드는데
어떻게 소문 듣고 날아왔는지 먼저 온 독자들
문장 속 깊이 파고들어
받침까지 굴리며 잉잉대고 읽는 소리
육백년 비바람걸레로 훔쳐온 서가에 낭랑하다
작자와 독자가 한창 밀월에 젖는가
방금 읽고 넘긴 한 페이지가 팔랑, 돌담을 넘어간다

* 古梅寺 : 오래된 매화나무가 있는 절

- <문학·선> (2008, 여름호)
- 시집 <비닐꽃>(북인, 2011)

려한 봄꽃인 매화가 만개한 상황을 그린 시인데, 봄 햇살 속에 피어 있는 매화꽃을 일찍 탈고한 한 편의 봄 시(早春詩)로, 그리고 서울에서부터 멀리 꽃을 보러 찾아간 시적 화자나 꿀벌을 독자로 비유하고 있는 것이 재미있습니다. ‘첫 줄부터 만개체로 반기는 문장들’은 화려하게 자태를 뽐내는 선암사의 만개한 매화꽃을 두고 노래한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꼭 선암사를 다녀오지 않아도 상상만으로도 이런 멋진 시 한 수를 탈고해 낼 수 있다는 것을 설명하면서 자신의 이 시를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러나 오늘 감상하는 ‘시구문’이라는 시는, 가을 어느 날, 단체로 북한산의 원효봉을 '직접' 오르면서 느낀 시상(詩想)을 그대로 노래한 시입니다. 효자리 기점에서 원효봉 정상으로 가는 코스에서 반드시 만나게 되는 ‘시구문’이라는 특이한 이름을 가진 문을 생각하면서, 그의 풍부한 ‘언어의 질감’을 맘껏 펼치고 있는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발대는 벌써 시구문을 지났다는 카톡이 온다’는 한 문장을 보는 순간 시인의 머릿속에는 수많은 ‘시구’라는 단어가 연상되고 있습니다.

가 제일 먼저 ‘시구문(詩句文)’을 떠올린 것은, 필시 시를 쓰는 동료들과 함께한 나들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그의 언어의 상상력은 그 타당한 이유까지 자세히 설명하면서 끊일 줄을 모릅니다. ‘詩句 時求 侍龜’로 이어진 말의 향연은 ‘始球는 절대 아니겠고 / 枾九, 市區, 혹시 뻐꾸기 산비둘기 많아서 鳲鸠門? / 아님 누룽지 달라 꼬리치는 媤狗인가?’까지 지칠 줄을 모릅니다. 그리고 굳이 어려운 한자어를 그대로 시에 노출시킨 것은, 비록 모르는 어려운 한자어라 할지라도 ‘음독(音讀)’이 동일하니 문제가 없음에 착안한 것입니다.

국, 원효봉 등산코스에 있는 '시구문'의 진짜 뜻을 제대로 알게 된 시인은 그 자리에서 긴 상념에 빠집니다. ‘죽어서도 괄시받던 민초의 마지막 가는 길이었다던, / 꽃상여는 못 탈망정 사대문 문간조차 편히 누워 나가지 못한 / 屍, 口, 門’...지레짐작으로 ‘시향(詩香’)으로 꽉 찼던 시인의 머릿속이, 가을 소슬바람에 떨어지는 ‘단풍잎 몇 구軀의 시향屍香들로 어지럽‘다고 마무리한 그의 노래에 공감을 하게 됩니다.

번 주말에는 봄꽃을 찾아 남도 선암사로 달려가든지, 아니면 북한산 원효봉으로 달려가든지 해야 할 듯합니다.

석을 찾는 취미 때문에 전국 방방곡곡 탐석(探石) 여행을 했던 시인이 느지감치 시의 세계에 입문한 후부턴, 여행 후에는 시로 후기를 정리하게 되었고 그 결과 탄탄한 문장력을 과시하는 ’시로 쓰는 사계‘와 같은 산문집 겸 시집을 낼 수 있었으니, 늦깎이 시인에게 응원의 박수를 맘껏 보내고 싶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