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중년에 찾아 온 당신 / 유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석전碩田,제임스 2023. 6. 14. 07:37

중년에 찾아 온 당신

- 이채
                  
당신!
어디서 무얼하다
이제서야 날 찾아 오십니까

짝 잃은 철새처럼
이리저리 방황하다
아직도 난 둥지가 없습니다

오후의 쓸쓸한 가슴으로
당신이 올 줄 알고
많은 것들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끝없이 외롭고
멀기만 한 여정의 길
이제 중년의 역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그리움과 외로움의 세월 속에서도
아무도 자리하지 않던 가슴
이제 당신과 함께 갈등 없이 살겠습니다

당신!
거친 손이지만
내 손을 잡아 주지 않겠습니까

당신의 희망의 손과
나의 인고의 손을 잡고
아늑한 둥지를 틀고 싶습니다

중년에 찾아 온 당신
중년에 찾아 온 소중한 당신
당신을 영원히 사랑하겠습니다

- 시집 <중년의 고백>(행복에너지, 2015)

* 감상 : 이채, 본명은 정순희.

시인. 패션디자이너. 1961년 7월, 경북 울진에서 태어났습니다. 영파여중, 정신여고를 거쳐 한성대학교 의상학과를 졸업하고, 2013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1998년 <현대문학>을 통해 수필로, 2005년 <한맥문학>을 통해 시로 작품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시집으로 <그리워서 못 살겠어요 나는>(천우, 2006), <중년이라고 그리움을 모르겠습니까>(천우, 2006), <중년의 그 사랑에는 상처를 피한 흔적이 있다>(천우, 2006), <중년에도 사랑을 꿈꾼다>(천우, 2006), <중년이라고 이러면 안 됩니까>(천우, 2007), <중년의 당신, 어디쯤 서있는가>(천우, 2007),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행복에너지, 2014), <중년의 고백>(행복에너지, 2015) 등이 있습니다.

2005년에 시인으로 등단하였으니 그녀의 나이 마흔다섯이 되던 해였습니다. 중년의 나이에 자신에게 갑자기 다가온 ‘시’를 마치 연인이 찾아온 듯 시적 은유로 노래한 시가 바로 오늘 감상하는 시입니다. 말하자면 ‘시’는 느지막한 중년의 나이의 시인에게 찾아온 ‘연인’이며 ‘사랑’이었습니다. ‘봄날’이기도 했고 그 봄날에 피는 화사한 ‘꽃’이기도 했습니다. 또 ‘그리움’이기도 했고 그녀의 ‘전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온 애틋한 ‘당신’이기도 했고 시인이 영원히 사랑해야 할 ‘소중한 당신’이기도 했습니다.

인이 등단 이듬해에 상재 한 첫 시집에는 중년의 그녀에게 찾아온 ‘시’를 형상화하여 노래한 시들로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연달아 발간된 시집들에서는 이렇게 찾아 온 ‘시’와 ‘중년에 찾아온 운명적인 사랑’을 이중적 의미로 노래하면서, 마치 ‘중년 전문 시인’처럼 방향을 잡고 있습니다. 늦깎이 중년의 사랑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겠다는 당찬 출사표를 던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시인 특유의 부드러운 쉬운 언어와 관능적으로 풀어낸 시어들로 가득찬 시집들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일약 베스트셀러 시집이 되었습니다. 필요 이상으로 꾸미지 않아 그저 읽기만 해도 별다른 해석이나 풀이가 없어도 편안하게 다가오는 시를 쓰는 시인의 시가 힘들고 지친 현실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특히 중년의 삶을 살아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희망의 언어, 치유의 언어로 다가갔기 때문일 것입니다.

람들의 사랑을 받아 온 그녀의 시 속의 시어들은 우리은행 본점 앞에 ‘여름엔 당신에게 한 그루의 나무로 서고 싶습니다’(2017년)라든지, ‘사람마다 가슴마다 봄꽃이 활짝 피었으면 좋겠습니다’(2019년), 그리고 서울 의료원 등 국립병원 4곳에 ‘날개는 지쳐도 하늘을 보면 다시 날고 싶습니다’(2020년) 등 대형광고판에 소개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시인과는 조금 거리가 먼, 삶의 이력을 지닌 시인이 중년에 운명적으로 만난 ‘시’ 때문에 삶의 방향을 바꾸었고, 세상과 소통하는 방식을 송두리째 수정했다고나 할까요.

즘 같은 계절에 감상하기 딱 안성맞춤인 시 한 편을 더 읽어보겠습니다.

유월에 꿈꾸는 사랑

- 이채

사는 일이 너무 바빠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네
청춘도 이와 같아
꽃만 꽃이 아니고
나 또한 꽃이었음을
젊음이 지난 후에야
젊음인 줄 알았네.

인생이 길다 한들
천년만년 살것이며
인생이 짧다 한들
가는 세월 어찌 막으리

봄은 늦고 여름은 이른
6월 같은 사람들아
피고 지는 이치가
어디 꽃 뿐이라 할까

- 시집 <마음이 아름다우니 세상이 아름다워라>(행복에너지, 2014)

주 이틀은 아침 운동 대신에 아내와 함께 이른 아침 집 바로 뒤에 있는 북한산을 오르고 있습니다. 지난봄 그 여러 코스 중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산딸기꽃이 하얗게 피어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을 지날 때 ‘언젠가는 이곳에 산딸기가 익어 멋진 광경을 연출하겠구나’ 생각했던 곳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 산행을 마치고 내려오다가 바로 그곳에서 탐스럽게 익은 산딸기 군락을 만났습니다. 시나브로 그새 초여름이 성큼 다가왔다는 말입니다. 아시다시피 지난봄은 그야말로 봄꽃들이 한꺼번에 피었던 화사한 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도 화려했던 봄이지만 그 꽃들은 하나둘 다 져버렸고 이제는 열매들이 영글어가고 있는 결실의 계절이 다가온 것입니다.



‘사는 일이 너무 바빠 / 봄이 간 후에야 봄이 온 줄 알았’다는 표현이 너무도 실감이 났습니다. 아마도 시인은 화려했던 지난봄을 치열하게 살아가느라 한 번도 봄이 왔다는 것을 의식하지도 못하고 보낸 듯합니다. 어느 날 앵두가 익어가고 매실이 노랗게 변해가는 지금의 모습을 보면서 그제야 ‘봄이 왔다가 벌써 지나갔구나’ 생각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시인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젊음이 지난 후에야 / 젊음인 줄 알았’고, 또 ‘나 또한 꽃이었음을’ 중년이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면서 자신이 살아 온 삶에 비유하여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미 화려한 꽃은 지고 없지만 ‘성숙함’이라는 열매가 익어가는 중년의 모습은 어쩌면 ‘청춘’을 대변하는 ‘화려한 봄꽃’보다 더 아름답다는 시인의 온기 어린 목소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끝없이 외롭고 / 멀기만 한 여정의 길 / 이제 중년의 역에서 당신을 만났습니다’

가 되었든 실제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든, 이 순간 나에게 찾아온 ‘당신’을 제대로 알아보고 시인처럼 온 마음으로 환대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