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비양도'를 노래한 시 모음

석전碩田,제임스 2023. 6. 21. 06:00

비양도

 

- 손택수

 

섬이 외로울까봐 섬이 솟았네

깍지는 끼지 않았으나

손끝 진동이 파르르

전해올 듯,

마주 보는 일 하나만으로도

파도가 치고

물새들이 우는 곳이라네

솟은 섬이 외로울까봐

바짝 당겨 앉다,

그냥 두네

멈춘 자리를 지키기로 하네

팔짱을 끼는 대신

바다가 들어와 살라고

 

* 손택수 시인. 1970년 전남 담양 강쟁리에서 출생하였고 어린 시절 부산으로 건너와 부산에서 초.중.고교, 그리고 경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부산대 대학원을 졸업하였습니다. 199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언덕 위의 붉은 벽돌집’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국제신문 신춘문예에도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 <호랑이 발자국>(창작과비평, 2003), <목련 전차>(창비, 2006), <나무의 수사학>(실천문학사, 2010), <떠도는 먼지들이 빛난다>(창비, 2014), <나의 첫 소년>(창비교육, 2017), <붉은 빛이 여전 합니까>(창비, 2020) 등이 있습니다. 수주문학상 대상(2001), 현대시동인상(2003), 신동엽창작상(2004), 육사시문학상 신인상(2005), 애지문학상(2005), 이수문학상(2007),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2007), 임화문학예술상, 노작문학상(2013), 문학과의식 문학상(2018), 조태일문학상(2020) 등을 수상했습니다. 2018년 7월부터 경기도 화성 노작홍사용문학관 관장을 맡고 있습니다.

 

비양도

 

-김진숙

 

저물녘

서쪽 하늘로

하루 같은 능소화가

 

홀연히

레테의 강을

이제 막

건넜는지

 

비양도 마음 언저리

그도 나도

뜨겁다

 

*김진숙. 시조 시인. 제주 상산읍 시흥리에서 태어나 중앙대 영문학과를 졸업했습니다. 2006년 <제주작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고 2008년 <시조21> 신인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미스킴라일락>이 있습니다. 2021년 제3회 정음시조문학상을 수상하였습니다. 현재 제주 한림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비양도에서

 

-문태준

 

아무 데나 다 있는 파도의 긴 나팔

 

톳이 이만큼 자랐듯

먼 뭍으로 흐늘흐늘하며 자라는 뱃고동

 

빈소라 껍데기에 넣어 오는

석양

젖은 모래

 

나앉은 갈매기와

하얀 발등의 해안선

 

*문태준 시인. 1970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고 김천고를 나와 고려대 국문학과와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석사), 그리고 일반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1994년 <문예 중앙> 신인문학상에 시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시집으로 <수런거리는 뒤란>(창비, 2000), <맨발>(창비, 2004), <가재미>(문학과지성사, 2006), <그늘의 발달>(문학과 지성사, 2008), <먼 곳>(창비, 2012), <우리들의 마지막 얼굴>(창비, 2015), <내가 사모하는 일에 끝이 있나요>(문학동네, 2018), <아침은 생각한다> 등이 있습니다. 2004년 <동서문학상>, <노작문학상>, <유심작품상>, 2005년 <미당문학상>, 2006년 <소월시문학상>, 2016년 <애지문학상>, 2014년 <서정시학작품상>, 2018년 <목월문학상> 등을 수상했습니다. 2020년 8월, 오랜 서울 생활을 접고 제주시 애월읍 장전리, 제주도 출신 아내가 태어났던 폐가를 허물고 새집을 지은 후 옮겼습니다.

 

신 한림별곡

 

-김영란

 

전갱이 잔뼈 같은 어젯밤 하얀 꿈도

북제주 수평선도 가로눕다 잠기는

은갈치 말간 비린내 눈이 부신 이 아침

 

바람 소리 첫음절이 귤빛으로 물이 들고

닻들도 기도하듯 조용히 기대 누운

기우뚱 포구에 내린 오십견의 저 바다

 

우리가 불빛들을 희망이라 말할 때

행성처럼 떠도는 비양도 어깨 위에

등 뒤로 가만히 가서 손 한번 얹고 싶다

 

*김영란 시인. 제주도 애월읍 하귀리에서 태어나 주구장창 제주에서 살고 있는 시인입니다. 제주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2004년 제주 MBC 여성 백일장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나왔으며 201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오늘의 시조 신인상>, <가람시조문학상 신인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시집으로 <꽃들의 수사(修辭)>, <몸 파는 여자>(고요아침, 2019), <누군가 나를 열고 들여다볼 것 같은>(시인동네, 2020) 등이 있습니다.

 

비양도 사랑

 

-김세홍

 

마을 안 팽나무 그늘도

등 굽은 노파 걸음도

섬을 닮아간다

섬이 사람을 길러내고

태양이 섬을 키우는 동안에도

천 년 전 토해낸 가쁜 숨결은

무시로 그대 가슴을 지나갔으니

꿈결인 듯 몇 사리를 흘러 흘러 온

순비기꽃 난만한 해안의 통나무

낮달에 야위어 갈 제

섬 그림자 귀항하는 어선을 품고

 

*김세홍 시인.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 묵골에서 태어났습니다. 1997년 <한라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 당선되었습니다. 시집으로는 등단 18년 만에 낸 첫 시집 <소설 무렵>(심지, 2014)이 있습니다. 제주도청 녹지과에서 오랫동안 일했습니다.

 

* 감상 : 오늘은 한 편의 시가 아니라 동일한 대상을 노래한 여러 편의 시를 감상하려고 합니다. 이 시들은 지난 5월 말, 제주 비양도에 갔다가 돌아오는 배를 기다리면서 선착장에서 만난 비양도와 관련된 시들입니다. 2년 전쯤입니다. 우연히 한 포구에 들렀는데 막 출발하는 배가 있어 엉겁결에 탔다가 ‘차귀도’라는 섬에 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호젓한 산책로와 약간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이는 제주 본섬의 멋진 풍광, 그리고 무인도의 호젓한 정취에 매료되어 ‘다음에 제주도를 방문하면 제주도에 딸린 작은 섬들(비양도와 우도, 가파도, 마라도)을 차례로 꼭 가 봐야겠다’ 마음먹었는데 이번 비양도 나들이는 그 첫 실행인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비양도를 다녀온 여행 후기는 어설픈 글로 쓰는 것보다, 제주도 시인들이 노래한 ‘비양도’ 시를 꺼내 읽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양도(飛揚島)는 제주도 서쪽 한림읍에 있는 작은 섬으로, 협재 해수욕장 맞은편으로 보이는 섬입니다. 두세 시간이면 충분히 둘러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섬이지만 무인도인 차귀도와는 달리 사람들이 사는 섬입니다. 비양도에 가기 위해선 제주 한림항에서 출발하여 약 15분 정도 배를 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배는 예약 없이 현장에서 왕복 승선표를 구입하면 비양도에서 나올 땐 그 승선표만 보여주면 됩니다. 그저 손 닿을 만한 가까운 곳에 있는 섬을 손택수 시인은 ‘솟은 섬이 외로울까봐 / 바짝 당겨 앉다, / 그냥 두네 / 멈춘 자리를 지키기로 하네 / 팔짱을 끼는 대신 / 바다가 들어와 살라고’라며, 제주 본섬과 비양도는 서로 바짝 당겨 앉아 마주 보듯이 가깝다고 노래했습니다. 김영란 시인은 더 실감나게 ‘바람 소리 첫음절이 귤빛으로 물이’든다고 노래하면서 본섬에서 진동하는 귤 향기가 바람결에 그곳까지 실려 올 정도로 가까운 포구와 포구가 ‘오십견’ 밖에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신 한림별곡’ 중에서)

 

안가 모래땅 틈에서 자라는 순비기꽃이 난만하게 피어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김세홍 시인은 ‘섬 그림자 귀항하는 어선을 품고’ 있는 섬 ‘마을 안 팽나무 그늘도 / 등 굽은 노파 걸음도 / 섬을 닮아간다’고 노래하며 몇 안 되는 사람들이지만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정감있게 그려내고 있습니다.(‘비양도 사랑’ 중에서)

 

양도에는 평상시 쉽게 볼 수 없는 ‘무꽃’이 사방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것이 참 특이했습니다. 섬을 일주하는 도로 옆뿐 아니라, 비양봉 등대를 오르는 산길 산책로 주변에도 가득 피어있었지요.

 

귀도가 호젓한 해안 산책로와 정겨운 등대가 아름다웠다면, 비양도는 사람 사는 냄새가 물씬 나는, 관광 특수로 바쁘게 돌아가는 제주 본섬과는 완전히 구별된 호젓함이 애틋하게 느껴지는 섬이라고나 할까요. 비양도를 노래한 시인들의 시를 여러 편 한꺼번에 읽으면서 ‘애틋한 호젓함’을 노래하는 시인의 마음을 오롯이 느낄 수 있어 참 좋습니다. - 석전(碩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