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 - 장석주

석전碩田,제임스 2023. 7. 5. 08:27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

- 장석주

세상에서 내가 본 것은 아픈 사람과 아프지 않은 사람들,
살아 있는 것들의 끝없는 괴로움과
죽은 것들의 단단한 침묵들,
새벽하늘에 떠가는 회색의 찢긴 구름 몇 장,
공복과 쓰린 위,
어느 날 찾아오는 죽음뿐이다.

말하라 붕붕거리는 추억이여.
왜 어떤 여자는 웃고,
어떤 여자는 울고 있는가.
왜 햇빛은 그렇게도 쏟아져 내리고
흰 길 위에 검은 개는 어슬렁거리고 있는가.
구두 뒷굽은 왜 빨리 닳는가.
아무 말도 않고 끊는 전화는 왜 자주 걸려 오는가.
왜 늙은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고
공원의 비둘기 떼들은 한꺼번에 공중으로 날아오르는가.

- 시집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문학과지성사, 1991) 

* 감상 : 장석주. 시인, 문학평론가, 편집인.

1955년 1월 8일, 충남 논산 연무에서 태어났습니다. 

 읽기를 유난히 좋아했던 문학 소년이었던 시인이 중학교 2학년 때 쓴 시 ‘겨울’이 청소년들의 필독서처럼 여겨졌던 ‘학원’이라는 잡지에 실린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그 시를 선택했던 사람은 시인 고은이었습니다. 집안 형편 때문에 자신의 뜻과는 달리 경기상고에 진학했던 시인은 학교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고 독서에만 몰두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학교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자칭 ‘평화주의자’였던 시인이 교련 수업을 거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돌아온 것은 무지막지한 ‘몽둥이찜질’이었다고 합니다. 

 사건으로 시인은 학교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그의 정규 학력이 ‘고2’로 끝이 난 이유입니다. 그 후 그는 학교 대신에 시립 도서관이나 국립 도서관의 참고 열람실로 등교했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문학 소년은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습니다. 그러다 1975년 그의 나이 스무 살이 되는 해, <월간문학>에 시 ‘심야’가 신인상으로 당선되면서 진짜 시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4년 후인 1979년에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동시에 당선되었습니다.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날아라 시간의 포충망에 붙잡힌 우울한 몽상이여’가 당선되었고,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서는 평론 ‘존재와 초월’이 입선하였습니다. 

 후 그는 도서 출판 <고려원> 편집장을 거쳐 1981년 도서 출판 <청하>를 설립하여 13년간 나름 탄탄한 입지를 굳히며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서, 또 시인과 문학평론가로서 명성을 쌓아갔습니다. 시인이 직접 쓴 헤르만 헷세의 <잠언록> 등 베스트셀러가 청하에서 여러 권 나왔고 1987년에는 서정윤 시인의 시집 <홀로서기>가 유례없이 밀레니언셀러가 되면서 일약 돈방석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했던가요. 1992년 고(故) 마광수 교수의 <즐거운 사라>가 노골적인 성 묘사 등을 이유로 외설 시비에 휘말리면서 저자인 마광수 교수와 출판사의 대표였던 시인은 나란히 징역 8개월 집행 유예 2년의 선고를 받았고 실제로 6개월 구속되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졌습니다. 이 사건으로 그는 그때까지 이뤄놓았던 모든 것을 잃고 말았습니다. 출판사도 접었고 또 가정도 풍비박산되었습니다. 편집 발행인으로서 또 다작의 저작자로서, 시인과 비평가로서의 그의 삶은 철저히 ‘조율’이 필요했습니다.

 충격적인 사건 후 그는 전업 작가로 돌아갔습니다. 7, 8년 이상 꼼짝하지 않고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이라는 2 백자 원고지 2만 장 분량의 5권짜리 책을 집필했습니다. 1900년부터 100년간의 한국 문학사와 한국인의 삶을 기록한 역작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삶의 제2막을 위한 과제를 마친 것을 홀로 축하라도 하듯, 대작을 완성하고 난 후 시인은 2000년 서울살이를 접고 경기도 안성, 금광 호숫가에 ‘수졸재(守拙齋)’라는 이름의 서재와 문화공간 ‘호접몽(胡蝶夢)’을 짓고 전원으로 내려와 마음 비우기를 했습니다. 지난 2016년에는 스물다섯 살 연하의 시인이며 제자인 박연준과 재혼, 그의 말대로 ‘문장 노동자’인 전업 작가의 삶을 느리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013년 영랑시문학상, 2010년 제1회 질마재문학상, 2003년 애지문학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대표적인 시집으로 <햇빛 사냥>(고려원, 1979), <완전주의자의 꿈>(청하, 1981), <그리운 나라>(평민사, 1984), <어둠에 바친다>(청하, 1985), <새들은 황혼 속에 집을 짓는다>(나남, 1987), <어떤 길에 관한 기억>(청하, 1989),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문학과 지성사, 1991), <크고 헐렁헐렁한 바지>(문학과지성사, 1996),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하는 저녁>(세계사, 1998), <물은 천개의 눈동자를 가졌다>(그림같은 세상, 2002), <붉디 붉은 호랑이>(애지, 2005), <절벽>(세계사, 2007), <몽해항로>(민음사, 2010), <오랫동안>(문예중앙, 2012), <일요일과 나쁜 날씨>(민음사, 2015), <스무 살은 처음입니다>(지혜, 2018), <헤어진 사람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문학동네, 2019) 등이 있습니다. 평론집으로 <한 완전주의자의 책 읽기>(청하, 1989), <비극적 상상력>(청하, 1989), <세기말의 글쓰기>(청하, 1993), <20세기 한국문학의 탐험(1~5)>(시공사, 2007) 등이 있습니다. 

창기 시인의 시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그리 평화롭거나 화해하는 태도가 전혀 아니었음을 보여줍니다. 젊은 시절 그가 쓴 시들은 해소되지 않는 욕망에서 비롯되는 절망과 허무, 소외된 도시의 삶 속에 도사리고 있는 단절된 슬픔을 노래하는 시편들이 많았습니다. 인간의 몰개성화, 소통이 단절되어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를 통해서 풀어냄으로써 그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함께 그 답을 찾아가는 역할을 하고 싶었던 시인이었습니다.

늘 감상하는 시에서 시인이 제목으로 ‘붕붕거리는 추억의 한 때’라고 한 이유가 뭘까. 시 제목을 읽으면서 명심보감(明心寶鑑)에 나오는 ‘만사분이정(萬事分已定)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이라는 표현이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든 일은 자기에게 알맞은 한도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 사람들은 괜히 부질없이 바쁘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아마도 당시 시인이 바라본 한국이라는 사회의 현주소는 ‘들떠 있고 과장되어 있으며 또 피상성이 넘쳐나는 곳’이었던 듯합니다. 자기 자신을 차분히 들여다보는 ‘고독의 시간’을 갖기보다는 그저 ‘반응과 자극’으로 이루어지는 즉물적(卽物的) 얄팍한 삶에만 매몰되어 있는 것같이 여겨진 듯합니다. ‘붕붕거리는 부생공자망(浮生空自忙)’ 같은 삶의 모습을 시인이 노래했다는 말입니다. 1연은 젊은 시인이 이 시를 쓸 때까지 나름 ‘삶이 이런 거구나’ 하고 깨달았던 내용이라면, 2연은 아직 그 미스테리같은 삶에 대해서 구체적이고 심층적인 이유나 의미는 정확하게 깨닫지 못했지만, 앞으로 계속해서 탐구해 나가야 할 삶의 질문들처럼 여겨집니다. 

‘한국판 분서갱유(焚書坑儒)’에 비견 될 정도의 필화 사건을 겪은 후, 그가 서울 생활을 접고 안성으로 주거지를 옮긴 2000년 이후 그의 시편들이 자연 속에서 진지한 자기 성찰과 치열한 자기반성을 통해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 시 세계를 보여주었던 것을 보면, 아마도 2연에서 그가 던졌던 사소한 질문들에 대한 정답을 지금쯤에는 대부분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1연에서 자신이 자신 있게 깨달았다고 노래했던 것 - ‘새벽하늘에 떠가는 회색의 찢긴 구름 몇 장, / 공복과 쓰린 위, / 어느 날 찾아오는 죽음뿐이다.’ - 도 이제는 그 안에서 더 깊은 새로운 의미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외람되지만, 매일 아침 배드민턴을 치는 은퇴자로서 제가 시인에게 확실하게 답할 수 있는 것은, ‘왜 늙은 사람들은 배드민턴을 치’는 지에 대한 질문에 ‘너무너무 재미있기 때문’이라고 말해주고 싶다는 것입니다.

론가이면서 시인으로서, 이 땅의 시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장석주 시인이 직접 쓴 산문 일부를 소개하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시인은 언어의 부름을 받은 사람, 자신의 영혼을 책임지는 사람, 가난한 사람들이 이기도록 도와주는 사람, 몸이 부서지도록 일하는 사람, 밤새도록 달을 바라보는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 이 칠흑 같은 세상에서 무엇으로 시에 불을 밝힐까? 시인은 자기 몸을 태워 시대의 어둠을 밝히고자 나선다. 시인은 날마다 세상의 너무나 많은 불행 때문에 죽는다. 그리고 날이 밝으면 부활한다. 인간의 불행에 나 몰라라 하는 시인은 현실의 변방을 떠도는 건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시는 무용하고, 시인은 아무 힘도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불행의 터럭이 단 한 가닥이라도 있는 한 시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 석전(碩田)

2023년 11월 11일, 평창동에 있는 토탈미술관에서..판화가 김승연 교수의 개인전에서 장석주 작가를 만났습니다. 김승연 교수와 장석주 작가는 중학교 동창 사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