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편지 10
- 고정희
길을 가다가 불현듯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목을 길게 뽑고
두 눈을 깊게 뜨고
저 가슴 밑바닥에 고여 있는 저음으로
첼로를 켜며
비장한 밤의 첼로를 켜며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너를 향한 기다림이 불이 되는 날
나는 다시 바람으로 떠올라
그 불 다 사그러질때까지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스스로 잠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일어서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 떠오르는 법을 익혔다.
네가 태양으로 떠오르는 아침이면
나는 원목으로 언덕 위에 쓰러져
따스한 햇빛을 덮고 누웠고
달력 속에서 뚝, 뚝,
꽃잎 떨어지는 날이면
바람은 너의 숨결을 몰고와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웠다.
그만큼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오르고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
나는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다.
수없는 나날이 셔터 속으로 사라졌다.
내가 꿈의 현상소에 당도했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
달빛 아래서나 가로수 밑에서
불쑥불쑥 다가왔다가
이내 바람으로 흩어지는 너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
- 시집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1987)
* 감상 : 고정희 시인.
1948년 1월 전남 해남에서 5남 3녀의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고성애(高聖愛).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박남수 시인의 추천으로 <현대시학>에 시 ‘부활 그 이후’, ‘연가’ 등이 추천되어 문단에 나왔습니다. <전남일보> 기자, 광주 YWCA 대학생부 간사, 크리스천 아카데미 출판부 책임 간사, 가정법률상담소 출판 부장, <여성신문> 초대 주간을 역임하였습니다.
<누가 홀로 술 틀을 밟고 있는가>(평민사, 1979), <실락원 기행>(인문당 1981), <초혼제>(창작과비평사, 1983), <이 시대의 아벨>(문학과지성사, 1983), <눈물 꽃>(실천문학사, 1986),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1987), <저 무덤 위에 푸른 잔디>(창작과비평사, 1989), <광주의 눈물비>(동아, 1990), <여성해방 출사표>(동광, 1990),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1) 등의 시집을 통해 어떤 상황 속에서도 쉽게 절망하지 않는 강한 의지와 함께 생명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노래했습니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계기로 전통적인 남도 가락과 씻김굿 형식을 빌려 민중의 아픔을 드러내고 위로하는 장시를 잇달아 발표했는데, 1991년 6월 9일 자기 시의 모체가 되어 온 지리산을 등반하는 도중 폭우로 불어난 급류에 휩쓸려 뱀사골 위쪽 쟁기소 계곡 바위에서 실족하여 변을 당했습니다. 그녀의 나이 마흔세 살, 아쉽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유고 시집으로 1992년에 간행된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창작과 비평사)가 있습니다.
시인은 시작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적 실천에 적극 앞장섰는데 특히, 1984년 대안문화 운동단체인 '또 하나의 문화' 공동체에 적극적인 동인 활동과 함께 한국 여성해방 문학의 지평을 넓히는 데 한몫을 담당했습니다. 그리고 여성들의 자발적인 출연으로 창간된 여성 정론지 '여성신문'의 초대 편집 주간을 맡아 1년간 그 기틀을 다지는 데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고정희 시인의 이 시를 남녀 간의 연시(戀詩)로 해석하여 감상하기도 합니다. 어떤 이는 퇴계 이황이 짧은 기간 단양 군수에 부임했다가 그곳에서 만난 젊은 관기 두향과의 운명적인 만남과 이별 이야기를 빗대어 노래한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구체적으로 글을 쓴 사람도 있습니다만, 길지 않은 삶을 살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그녀의 치열했던 삶을 감안하면 이 시를 ‘애틋한 남녀 간의 사랑과 이별의 시’라고 해석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 시가 실린 시집은 그녀의 여섯 번째 시집 <지리산의 봄>입니다. 모태 신앙인으로서 초기의 기독교적 세계관을 지상에 실현하고자 하는 꿈을 노래한 시에서부터 민족 민중 문학에 대한 치열한 모색, 그리고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문학에 이르기까지 그녀의 삶은 어느 분야에서든 철저하게 선구자의 자세였습니다. 그리고 이 시가 실린 시집이 상재될 당시에는 그녀의 시가 최고의 절정을 맞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치열하게 살았지만 많은 사람들로부터, 심지어 가장 친한 친구들 사이에서조차 제대로 이해받지 못해 절망하던 시기도 바로 이때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당시 시인의 친구였던 연세대학교 조한혜정(趙韓惠貞) 교수는 ‘한편에서는 여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머스마'들에 치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민족의 고통을 가볍게 아는 '기집아'들에 치이면서 그 틈바구니에서 누구보다 무겁게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시인’이었다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시인이 그 무거운 십자가의 거룩한 좁은 길 위에서 외로움과 고독감을 느낄 때, ‘불현듯’ 생각나는 그 사람은 누구였을까. ‘지금 이 순간’ 어느 하늘 아래에서 내가 지금 느끼는 외로움과 거룩한 분노를 똑같이 느끼며 치열하게 같은 길을 걸어가고 있을 그 사람, ‘가슴에 잉잉하게 차오르는 사람’을 생각하기만 해도 시인은 그리움으로 ‘울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밤, 시인은 ‘비장한’ 첼로의 저음으로 갈망하기도 했고, 또 ‘목을 길게 뽑고 / 두 눈을 깊게 뜬’ 채 ‘두 팔 가득 넘치는 외로움 너머로’ ‘그 사람’을 그리워하며 울부짖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어디선가 희망이 자라 오르고 / 무심히 저무는 시간 속에서 / 누군가 내 이름을 호명하는 밤’은 너무나 벅찼습니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 길을 선구자로 걸어야 한다는 소명(召命)을 받는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너에게 가까이 가기 위하여 / 빗장 밖으로 사다리를 내렸’을 때, ‘오오 그러나 너는 / 그 어느 곳에서도 부재중이었다’고, 시인은 외로움과 고독감, 그리고 ‘어두운 들과 산굽이 떠돌며’ 홀로 잠들고, 홀로 일어서고, 홀로 떠오르는 법을 익혀야만 했다고 비장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고 시인이 노래한 ‘네가’를 시인은 이 땅에서 제대로 만나지 못하고 어쩌면 외로운 길을 홀로 걸어간다고 느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젊은 시절, 의롭고 공의로운 ‘좁은 길’을 걷기로 다짐했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모든 세상 사람들이 넓은 길로만 달려가고 있는 것 같은 배신감을 느꼈을 때, 골목길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그 사람’에게 전화해서 전화선 저쪽 끝에서 전화를 받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엉엉 울부짖듯이 마구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나 혼자가 아니고, 나와 똑같은 치열한 싸움을 ‘그 사람’도 지금 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으로 위로가 되어 울음이 북받쳐 터져 나오는 ‘신비한 체험’이었습니다.
지난 글들을 찾아보니 고정희 시인의 시는 3년 전(2020년 1월 8일)에 ‘겨울 사랑’이라는 제목의 시를 함께 감상했더군요. 그 시를 다시 한번 꺼내 읽으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겨울 사랑
- 고정희
그 한번의 따뜻한 감촉
단 한번의 묵묵한 이별이
몇 번의 겨울을 버티게 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벽이 허물어지고
활짝 활짝 문 열리던 밤의 모닥불 사이로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푸르게 범람하던 치자꽃 향기,
소백산 한쪽을 들어올린 포옹,
혈관 속을 서서히 운행하던 별,
그 한번의 그윽한 기쁨
단 한번의 이슥한 진실이
내 일생을 버티게 할지도 모릅니다
-시집 <아름다운 사람 하나>(들꽃세상, 1999)
제목이 ‘겨울 사랑’이지만 사실 시 속에서 겨울을 나타내는 표현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달려온 삶의 여정이 혹독한 추위를 생각하게 하는 '겨울'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겨울을 견디게 했던 것이 바로, 그녀가 경험했던 단 한 번의 따뜻한 감촉, 사람과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찐한 사랑의 추억이었다고 고백하고 있고, 벽이 허물어지고 마음과 마음이 활짝 열렸던 그 밤도 모닥불이 타고 있는 겨울밤이었음을 노래합니다.
그 겨울밤, 마음과 마음을 헤집고 쳐들어온 치자꽃 향기가 온통 가득했던 그 사랑, 그 한 번의 이슥한 사랑의 진실을 알고 난 후 그녀는 어쩌면 일생이 차가운 겨울이라고 해도 버틸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네가 그리우면 나는 울었다’는 문장의 시적 은유로 노래하고자 했던 '그 사람'이 어쩌면 이 시에서 노래한 ‘그 겨울밤의 첫사랑’은 아니었을까.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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