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도 이제는
- 오규원
비가 온다. 어제도 왔다.
비가 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
슬픈 것은 슬픔도 주지 못하고
저 혼자 내리는 비뿐이다.
슬프지도 않은 비속으로
사람들이 지나간다.
비속에서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받쳐 들고
오, 그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비가 온다.
슬프지도 않은 비.
저 혼자 슬픈 비.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비에 젖고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가면도 없이
맨얼굴로
비 오는 세계에 참가한다.
어느 것이 가면인가.
슬프지도 않은 비.
저 혼자 슬픈 비.
- 시집 <사랑의 기교>(민음사, 1975 초판, 1995 개정판)
* 감상 : 오규원 시인.
1941년 12월 경남 밀양시(삼랑진읍 용전리)에서 태어났습니다. 본명은 규옥(圭沃)이며 호적상으로는 1944년생으로 되어 있습니다. 부산 중학교를 졸업한 후 부산사범학교에 진학한 그는 졸업 후 터무니없는 어린 나이에 부산 사상초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나 교장, 교감, 장학사 등과 부딪히는 등 어린(?) 교사로서 교육 현장에서는 잘 적응하지 못했습니다. 교사가 된 이듬해 현직에 있으면서 동아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습니다. 1965년 <현대문학>에 ‘겨울 나그네’가 초회 추천되었고, 1968년 군입대하여 대구 군의학교(軍醫學校)에서 교육을 받던 중 ‘몇 개의 현상’이 김현승 시인에 의해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등단하였습니다.
시집으로 <분명한 사건>(한림출판사, 1971), <순례>(민음사, 1973),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문학과지성사, 1978), <이 땅에 씌어지는 抒情詩>(문학과지성, 1981), <희망 만들며 살기>(지식산업사, 1985, 시선집),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문학과 지성, 1987), <사랑의 감옥>(문학과지성사, 1991), <길, 골목, 호텔 그리고 강물 소리>(문학과지성사, 1995), <순례>(세계사, 1997, 復刻板), <토마토는 붉다 아니 달콤하다>(문학과지성사, 1999), <새와 나무와 새똥 그리고 돌멩이>(문학과지성사, 2005), <오규원 시전집 1·2>(문학과지성사, 2002) 등과 시선집 <사랑의 기교>(민음사, 1975), <한 잎의 여자>(문학과지성사, 1998) 그리고 유고 시집 <두두>(문학과지성사, 2008)가 있습니다. 그 밖의 저서로는 시론집 <현실과 극기>(문학과지성사, 1976), <언어와 삶>(문학과지성사, 1983), <날 이미지와 시>(문학과지성사, 2005) 등과 <현대 시작법>(문학과지성사, 1990)이 있으며, 현대문학상, 연암문학상, 이산문학상, 대한민국예술상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1971년 첫 시집이 나오던 해, 초등학교 교사를 그만두고 태평양화학 홍보실로 직장을 옮기면서 경기도 시흥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1979년 그 직장도 그만두고 출판사 <문장>을 차려 단행본 등을 내는 일을 하다가 1983년 서울예술전문대학 문예창작과 전임교수 자리로 옮긴 후, 2002년까지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습니다. 만성폐기종으로 고생하다 1993년 공기가 좋은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무릉 마을로 들어가 그곳에서 1996년까지 머무는 동안 사진을 찍으며 병마와 싸웠으며, 2007년 2월 2일 향년 66세로 타계하였습니다.
지난 2017년, 고(故) 오규원 시인의 10주기를 맞아 눈빛 출판사에서 추모 사진집 <무릉의 저녁>을 출간하기도 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 문단의 현역 시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인으로 오규원 시인을 말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습니다. 그가 서울예전에서 가르칠 때 쓴 <현대 시작법>은 문창과 학생은 물론 시를 쓰려는 일반 사람들에게는 마치 ‘수학의 정석’이나 ‘성문 종합영어’같이 필독서로 지금까지 읽혀오기 때문입니다.
지난 달 말 기상청에서 장마 선언이 있은 후, 7월은 거의 한 달 내내 비가 내렸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를 읽을 때, 시인이 그저 비가 내린다는 것을 서술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비’와 ‘슬픔’이 어떤 연결지점이 분명히 있음을 긴장감 있게 말하려고 한다는 것을 눈치채야 합니다. 그 연결지점은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 비에 젖고 / 우산이 없는 사람들은 오늘도 / 가면도 없이 / 맨얼굴로 / 비 오는 세계에 참가한다’라는 표현의 제4 연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시인은 극한 슬픔을 겪으면서, ‘우산이 없는 사람’으로서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그 슬픔을 맨얼굴로 겪어 본 경험이 분명히 있었듯 합니다. 시인은 그것을 ‘가면도 없이 /맨얼굴로 / ’비 오는 세계 참가한다‘는 재미난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이후 시인에게는 비가 오면 슬픔이 자동으로 소환되곤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슬픈 것은’ 비가 어제도 오고 또 오늘도 내리지만 더 이상 이 비가 슬픔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슬프다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왜 그럴까. ‘우산으로 비가 오지 않는 세계를 / 받쳐 들고’ 걸어가면 어떤 비도 상관없다고 ‘슬프지도 않은 비 속으로 / 사람들이 지나간다’고 표현했듯이, 너무도 자신 있게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시인에게는 가면을 쓰고, 스스로 속이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습과도 같기 때문이 아닐까. 그래서 시인은 절규합니다. ‘오, 그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그리고 다시 한번 모두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슬프지도 않은 비 / 저 혼자 슬픈 비’ ‘어느 것이 가면인가’라고 말입니다.
평생 쓸 충분한 돈을 저금해 두었기 때문에 나는 아무 걱정이 없다고 자신만만, 스스로를 속이는 가면을 쓰고 있는 건 아닌지. 세상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성공한 자리에 올랐다고 그것이 자신을 영원히 행복하게 해 줄 것이라 자신만만, 가면을 쓴 채 스스로 속고 있는 건 아닌지. 건강하기에 몸이 약한 사람들의 슬픔과 비애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만만, 천년만년 살 것처럼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닌지..... 이 시에 내재(內在)되어 있는 ‘시적 은유’를 힌트 삼아 다양한 은유들을 소환해 봅니다.
'비가 와도 이제는 슬프지 않다'고 슬프게 노래한 시인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갑자기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함과 같다‘고 표현한 성경의 어느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시인처럼, ‘오, 그들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걱정스럽게 되물어 보게되는 아침입니다. - 석전(碩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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