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무 생각
- 이은상
봄의 교향악(交響樂)이 울려 퍼지는 청라(靑蘿)언덕 위에 백합 필 적에
나는 흰 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靑蘿)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白沙場)에 밀려 들오는 저녁 조수(潮水) 위에 흰 새 뛸 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 조수(潮水)와 같은 내 맘에 흰 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서리 바람 부는 낙엽 동산 속 꽃진 연당(蓮塘)에서 금어(金魚) 뛸 적에
나는 깊이 물속 굽어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꽃진 연당(蓮塘)과 같은 내 맘에 금어(金魚)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뛰놀 적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 없이 오는 눈발 사이로 밤의 장안(長安)에서 가등(街燈) 빛날 때
나는 높이 성궁(城宮) 쳐다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長安)과 같은 내 맘에 가등(街燈)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 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 이은상 작시, 박태준 작곡의 가곡, 1922년 만들어진 곡. 원제목은 ‘사우(思友)
* 감상 : 이은상(1903~1982) 작사, 박태준(1901~1986) 작곡의 대한민국 최초의 가곡(歌曲). 지난주 회의차 대구에 1박 2일 일정으로 내려갔을 때, “고위층 인사들이 대구에만 가면 가장 먼저 들리는 서문시장에 우리도 한번 가 보자”는 동행했던 지인의 장난기 섞인 제안에 의기투합, 서문시장을 방문했습니다.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바깥 기온이었지만, 예전 같지 않게 넓고 깨끗한 서문시장 안은 시원하게 냉방이 되어 있었고 잘 정비된 시장은 옛 추억을 새록새록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습니다. 없는 게 없을 정도로 풍성한 생필품들의 천국, 그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에너지가 넘쳐나는 곳. 우리 일행은 일명 ‘칼.제비.’라 불리는 칼국수 수제비로 점심 식사를 간단히 한 후, 동산의료원 뒤쪽에 있는 청라언덕을 올랐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이 ‘동무 생각’이 새겨져 있는 시비(詩碑)를 만났습니다.
이은상과 박태준은 마산에 있는 창신학교 교사로 있을 때 함께 근무했습니다. 노산 이은상은 마산 창신학교의 설립자(이승규)의 아들이면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었고, 박태준은 그 학교에서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습니다. 이 기간, 둘은 절친이 되어 인생, 문학과 예술을 나누는 각별한 사이였다고 합니다.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타향살이하는 박태준은 가끔 이은상에게 자신이 나고 자랐던 고향 대구 이야기며, 짝사랑했던 신명학교의 여학생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은상은 그 이야기를 모티브로 해서 시를 썼고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이 바로 ‘사우(思友)’였습니다. 청라 언덕 위 선교사 주택이 있는 동산 중앙에 세워져 있는 ‘동무 생각’ 시비에 적힌 글의 내용을 힌트 삼아 이때의 상황을 둘이 나누는 대화 형식으로 실감 나게 표현한 글이 있어 소개해 봅니다.
[태준: 봄 동산에 화사하게 꽃이 피니 마치 교향악이 울려 퍼지는 것 같네요. 내가 살았던 대구의 고향 언덕 위에는 선교사 사택이 있는데 담벽에 담쟁이넝쿨이 뻗어 올라가 '청라(靑蘿 = 푸른 담쟁이) 언덕'이라고 불렀어요.
은상: 아, 그래요? 참 이국적인 풍경이겠구려.
태준: 대구에 있는 계성학교에 다녔는데, 청라 언덕을 올라갈 때면 그 아래 신명 여학교 다니는 얼굴이 하얀 여학생하고 자주 마주치곤 했지요. 근처에 있는 교회당을 다니는 여학생이었는데 나는 수줍음을 많이 타서 말도 걸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어요. 청라 언덕에 많이 피곤했던 백합화를 닮은 흰 나리꽃처럼 참 이뻤지요.
은상: 그 여학생을 못 본 날은 너무 실망스러웠고, 다행히 만난 날은 가슴이 두 방망이질 치면서 온갖 시름 걱정이 다 사라졌겠구려.
태준: 그랬지요. 나는 이곳 남해 바닷가에 와서 음악선생을 하고 있는데 그녀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으려나?
은상: 박 선생, 내가 시를 지을 테니 박 선생이 곡을 붙여 사람들이 애창하도록 해 봅시다. 그러면 그녀도 이 노래를 누가 만들었을까 생각하지 않겠어요? 대구의 청라 언덕 말고 그녀가 박 선생의 존재를 떠올릴 수 있는 힌트가 또 없을까요?
태준: 내가 이곳 마산에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하니 바닷가의 백구(白鷗=하얀 갈매기), 그녀도 같이 거닐었던 청라언덕의 연못, 그리고 거기서 노니는 비단잉어를 넣으면 좋겠네요.
은상: 봄 동산의 백합화, 여름 바닷가의 흰 물새, 낙엽 지는 가을 연못의 금붕어(金魚)로 하되, 지금 박 선생이 외롭고 쓸쓸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그대를 만나 볼 수 있다면 모든 슬픔이 사라지겠다"는 말을 반복적으로 넣으면 되겠지요?
태준: 맞아요. 봄 여름 가을은 되었고, 겨울은 무엇으로 표현하지요? 눈보라? 눈사람?
은상: 당나라 장안(오늘날의 西安)은 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가 유명하니 그곳의 왕궁도 불빛이 없으면 얼마나 쓸쓸하겠냐는 식으로 댓구(對句)를 만들어 보리이다. 4계절의 연시(戀詩)를 마치 동요처럼 지어볼 테니 박 선생이 가곡으로 멋지게 곡을 붙여 보셔요.]
일제 탄압이 극에 달했던 때, 이런 낭만적인 연가(戀歌)를 합십해서 만들어 낼 정도로 일반인과는 조금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이은상과 박태준, 그들의 친분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은상이 그의 고종사촌 여동생을 소개하였고 그 둘은 결혼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청라 언덕 계단 길에서 이상화 시인의 생가터로 이어지는 대구근대화 골목길 투어 길을 걸어보는 것은 아쉽지만 다음 기회로 남겨두기로 하고 우리 일행은 회의 장소인 경산에 있는 대구 한의대학교까지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습니다. 청라 언덕에서 도시철도 2호선 '청라언덕역'까지 걸어서 10분. 그 길을 ‘동무 생각’ 노래를 함께 흥얼거리면서 걷는 시간이 행복했습니다. - 석전(碩田)
https://www.youtube.com/watch?v=BdQf2hlIx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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