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읽는 한 편의 詩

하....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석전碩田,제임스 2023. 8. 16. 06:35

하 …… 그림자가 없다

- 김수영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커크 더글러스나 리처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격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된켄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의 모습은 초토작전이나
<건 힐의 혈투>*** 모양으로 활발하지도 않고 보기 좋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언제나 싸우고 있다
아침에도 낮에도 밤에도 밥을 먹을 때에도
거리를 걸을 때도 환담할 때도
장사를 할 때도 토목공사를 할 때도
여행을 할 때도 울 때도 웃을 때도
풋나물을 먹을 때도
시장에 가서 비린 생선 냄새를 맡을 때도
배가 부를 때도 목이 마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졸음이 올 때도 꿈 속에서도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또 깨어나서도……
수업을 할 때도 퇴근시에도
사이렌 소리에 시계를 맞출 때도 구두를 닦을 때도……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민주주의의 싸움이니까 싸우는 방법은 민주주의식으로 싸워야 한다
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
하 …… 그림자가 없다

하 …… 그렇다 ……
하 …… 그렇지 ……
아암 그렇구말구 …… 그렇지 그래……
응응…… 응 ……뭐?
아 그래……그래 그래.(1960.4.3)

* 프랑스 북부의 도시,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유명한 철수 작전이 있었던 곳
** 한국전쟁 당시 서울 탈환을 위해 격전이 벌어진 곳
*** 존 스터지스 감독의 1959년 작 서부영화

- <디 에센셜 – 김수영>(민음사, 2023)

* 감상 : 김수영(金洙暎) 시인.

1921년 11월 27일 서울 종로구 관철동(종로2가 58-1)에서 아버지 김태욱, 어머니 안형순 사이에서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1968년 6월 16일 사망하였습니다. 종4품 무관을 지낸 증조부, 정3품 통정대부 중추의관이었던 조부로 인해 그의 집안은 부유했던 편이어서 비교적 유복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태어날 때는 일제가 지배하고 있던 시기, 가세는 급격하게 기울어지기 시작하였고 종로 2가에서 종로 6가로, 그리고 다시 용두동으로 이사를 했으며 아버지는 지전상(紙廛商)을 운영했습니다. 유치원과 서당을 다녔던 어린 시절을 거쳐 현재 서울 효제초등학교의 전신인 어의동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으나 6학년 때 폐렴과 뇌막염을 앓아 중학교 입학에 실패하여 선린 상업학교 전수과에 입학, 3년 후 본과로 진학하였습니다. 재학 시절 오스카 와일드의 원문 시 작품들을 외워 읽을 만큼 영어 성적이 우수했습니다. 이 시기, 가세는 더욱 기울어 용두동 집을 줄여 다시 현저동으로 이사를 하였습니다.

1941년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에 일본 유학차 도쿄로 건너가 선린 상업학교의 선배 이종구(영문학자)와 함께 도쿄 나카노에서 하숙하며 대학 입시 준비를 위해 조후쿠(城北) 고등 예비학교에 들어갔지만, 진학 공부보다는 문학과 예술 서적을 탐닉하다가 연극에 몰두하였습니다. 이 시기 그의 집안은 더욱 기울어져 만주 길림성(吉林省)으로 이주하였습니다. 1943년 2월 초, 일본에서 귀국한 그는 가족이 있는 만주로 가지 않고 종로6가 고모 집에 머물면서 연극 활동에 열정을 쏟아부었습니다. 그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현실 도피를 위한 몸부림으로 평가하기도 합니다.

1945년, 연극 공연 중 졸도한 그는 깨어나서 만주 가족이 있는 곳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길림극예술연구회 회원들을 만나 또다시 연극 활동을 하였습니다. 8월 15일, 광복을 맞아 그는 가족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평북 개천, 평양을 거쳐 서울 종로6가 고모 집으로 돌아왔고, 얼마 후 충무로 4가에 집을 구해 따로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그해 11월,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에 편입, 공부를 계속하려고 하였으나 이듬해 6월에는 학교를 자퇴하고 선배 이종구와 함께 영어학원 강사, 간판 그리기, 통역 등의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1949년에는 선배 이종구가 소개한 김현경과 결혼, 돈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습니다.

가 처음 시를 쓰기 시작한 것은 1946년 3월, ‘묘정의 노래’라는 제목의 시를 <예술부락>에 발표하면서부터였습니다. 그 후 ‘신시론’ 동인에 합류하여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을 발간, 두 편의 시를 발표하였습니다. 김수영과 아내 김현경의 관계는 선배 이종구의 소개로 만난 사이지만 나중에 복잡하게 얽힌 배신과 애증 관계, 또 재결합과 한집안에 살아가는 ‘명목상의 부부 관계’ 등 얘깃거리가 많아 이 글에서는 생략하고 기회가 있을 때 한번 심층적으로 들여다봤으면 좋겠습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 의해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평남 개천군 북원리에 있는 훈련소로 끌려가 1개월간 군사 훈련을 받다가 9월 28일 탈출하고, 다시 체포, 또 탈출하는 등 천신만고 끝에 서울 집에 도착하였으나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을 수복했던 국군과 경찰에 의해 체포, 부산 거제리의 포로수용소로 압송되었습니다. 당시 거제리 포로수용소는 반공 포로와 공산주의자 포로들의 싸움터나 다름없었습니다. 포로를 관리해야 할 군(軍)은 수용소 내부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고 있었고, 양 세력 간 자비 없는 패싸움과 유혈 사태는 일상적이었습니다. 김수영은 공포에 떨며 고초를 겪어야 했으며 3년 만에 민간인 억류자로 석방되었습니다. 그의 생사가 묘연해지고 연락이 두절 되었을 때, 그의 아내 김현경이 이종구와 같이 부산에서 살게 된 어이없는 사건이 이때 벌어졌습니다.

1953년, 피난지인 부산으로 가서 <자유세계> 편집장이었던 박연희의 주선으로 미 8군 수송관의 통역관으로 취직하기도 했지만, 이내 그만두고 모교인 선린상업학교 영어 교사로 잠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1954년 서울로 돌아와 피난지에서 돌아온 가족(아내)과 재결합하여 서울 성북동에 거처를 정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평화신문사> 문화부 차장으로 근무하기도 했고, 55년 6월에는 마포구 舊水洞(현재 신수동의 옛 이름)으로 이사, 번역일과 양계(養雞)를 하면서 지냈습니다. 김수영 시인이 해방과 전쟁 등 한국 근대사의 광풍과도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지쳤던 몸과 마음이 비교적 안정을 누리면서 지낸 시기가 이때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 지낸 4년여 동안 활발하게 시작 활동을 했는데, 1957년 12월에는 제 1회 <한국시인협회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59년에는 그간 그가 이곳 저곳에서 발표했던 작품들을 모아 첫 시집 <달나라의 장난>(춘조사, 1959)을 출간하였습니다.

시, 문단에서 김수영은 ‘노랭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 합니다. 가난하게 살던 당시의 문인들은 원고료를 받으면 집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동료들의 막걸리값으로 풀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1950년대 한국 문단의 미풍양속이고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원고료를 안주머니에 챙겨 꼬박꼬박 집에 갖다주는 김수영의 모습은 이런 관례를 깨뜨려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직굵직한 한국의 근대사에서 일어난 엄청난 일들을 온몸으로 겪어냈던 ‘어두운 시대의 증인’이었던 김수영이, 시대와 예술가, 혹은 지식인의 사회 참여라는 문제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게 된 것은 1960년 <4.19 혁명> 이후라고 평론가들은 말합니다. 물론 1960년대로 접어들어서도 김수영은 여전히 양계와 번역료로 생활하면서 변변한 직장은 가지지 않았으며, 시·시론·시평 등을 통해 우리 사회의 후진성과 허위의식을 비판하고 진정한 참여를 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자아 반성’하고 한탄하는 성격의 글을 많이 발표하였습니다. 이러한 김수영의 자조적인 성향과 특유의 강렬한 시적 표현은 결과론적으로 김수영만의 독특한 시 세계를 형성하는 요인이기도 했습니다.

1968년 6월 15일 밤 11시 10분, 문우(文友)들과 가졌던 술자리에서 귀가하던 중 구수동 집 근처에서 인도로 뛰어든 버스에 치여 적십자병원으로 옮겨진 뒤 다음 날 새벽 48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예총 회관에서 문인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서울 도봉동 선영에 안장되었습니다. 지난 1981년에는 <김수영 전집1,2>(민음사)이 출간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이 제정되었으며, 2013년에는 그의 사후 1주기 때 시비가 세워져 있는 서울 도봉구 선영(先塋)에 시인을 기리고 그의 시문 및 시 업적을 알리는 <김수영 문학관>이 설립되었습니다.

편의 시를 감상하기 위해서 시인을 소개하는 글이 너무 길어졌습니다. 그러나 한국 문단에서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김수영’이라는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김수영의 삶을 이해하지 않고 그냥 슬렁슬렁 지나갈 수도 없어 이런 군사설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일 아침 운동을 위해서 연희동 성산회관이 있었던 뒷 산(‘104고지’라고 부름)에 있는 <궁동 배드민턴체육관>을 오르고 있는데, 시인이 시 속에서 바로 이 ‘연희고지’를 콕 찍어서 언급했다는 것도 무척 신기하게 다가오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40년 전 처음 연희동에 왔을 때 5월이면 그저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는 동네의 작은 산 정도로만 알았는데, 어느 날 산의 동남쪽 중턱을 허물고 해병대 전승 기념탑이 건립되는 것을 목격하면서, 그제야 ‘아, 이곳이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었구나’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미 그보다 훨씬 전인데도 이곳 ‘연희고지’의 역사적인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1968년 4월 그가 죽기 한 달 전, 펜클럽 주최로 부산에서 열린 문학 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를 하였는데, 그는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시인은 자신의 그 말을 실천하기 위해서 평생을 철저한 자기반성, 지식인의 정직한 고뇌, 자유가 억압된 현실에 대한 항의를 온몸으로 노래했습니다.

수영은 전통적인 서정시의 세계를 따르지 않고 모더니즘적인 시에 지향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시적인 모색을 시도하면서 그것을 실천하고자 했습니다. 모더니즘 시가 자칫 빠지기 쉬운 허구적인 모습을 경계하면서 삶의 현장 속에서 참된 시를 쓰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시에서 기존의 시에서는 볼 수 없는 새로운 언어의 구사와 형식을 끊임없이 실천하는 시어들을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일체의 정립된 언어와 고정된 언어를 부정직한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시어들은 ‘관습의 언어’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의 언어’였으며, 대물림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였습니다. 그의 시에는 형식과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한자어와 영어, 일본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문어와 구어가 구별없이 사용되었으며, 관념어와 구체어가 섞여 있는 이유입니다.

늘 감상하는 시를 통해서 시인이 추구했던 ‘자유와 사랑’을 위해서, 그가 얼마나 부단히 실체없는 그림자와 싸웠으며, 또 궁극적으로 시는 어떠해야 하는 지를 피를 토하듯이 노래했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그림자도 없는 실체와의 싸움, 그러나 그 싸움은 쉬지도 않고 언제나 우리 곁에서 벌어지는 싸움이라는 사실에 그는 힘겨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들의 싸움은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차 있다’, ‘우리들의 싸움은 쉬지 않는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런데 중요한 것은 싸움의 상대가 보이지도 않을 뿐 아니라 ‘그림자도 없다’는 것입니다. 늘 깨어있지 않으면 십중팔구 패배할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시인이 다 포기한 듯 허탈하게 웃는 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듯합니다.

‘하 …… 그림자가 없다 // 하 …… 그렇다 …… / 하 …… 그렇지 …… / 아암 그렇구말구 …… 그렇지 그래…… / 응응…… 응 ……뭐? / 아 그래……그래 그래.’ - 석전(碩田)

시인의 동생 김수환이 결혼할 때 찍은 사진...가장 뒷 줄에&nbsp; 시인 김수용과 그의 아내 김현경, 그리고 앞 줄에는 어머니 안형순 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