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산
- 오세영
자지러져 검푸르기까지 한
여름 산 짙은 녹음은 차라리
짐승의 무성한 털 갈기 같다.
태풍이 치는 밤,
쩌렁쩌렁 우는 그 포효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언뜻 보인다
번갯불 사이로
온몸을 땀에 흠뻑 적신 채
대지에 웅크리고 있는 그 거대한
수컷 한 마리.
주체할 수 없는 욕망에
꽃을 잡아먹어, 새를, 숲을 잡아먹어 마침내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
맹수 한 마리.
- 시집 <별 밭의 파도 소리>(천년의 시작, 2013)
* 감상 : 오세영 시인.
1942년 전라남도 영광(靈光)에서 유복자로 태어났으며 외가가 있는 전남 장성에서 외할머니 손에 자랐고, 전북 전주에서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다녔습니다. 본관은 해주(海州)입니다. 그의 외가는 호남 성리학의 태두인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 : 1510~1560)의 후손 집안입니다. 전주 신흥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일 때 ‘아카시아꽃’이라는 제목의 시를 써서 백일장 장원으로 뽑혀 시를 쓰고 싶은 마음은 있었으나, 집안 형편으로 인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입시를 포기하였습니다. 그 후 서울로 상경해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대학 진학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홀로 독학을 한 후 서울대 국문학과에 진학,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65년 대학을 졸업한 후 공채를 통해 전주 기전여고 국어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그곳에서 약 9년 동안 후학들을 가르쳤습니다. 이때 <혼불>의 작가 최명희를 가르쳤다고 합니다. 충남대학교(1974~1981)와 단국대학교(1981~1985) 국문학과 교수를 거쳐, 1985년부터 서울대학교로 자리를 옮겨 현대문학(현대 시)을 가르쳤으며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의 버클리 캠퍼스에서 방문 교수로 ‘한국 현대문학’을 강의(1995~1996)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8월 31일 자로 정년퇴임, 현재는 명예교수입니다.
1965년 박목월(朴木月)에 의해 시 ‘새벽’이, 1966년 ‘꽃’이, 그리고 1968년에 ‘잠깨는 추상’이 <현대문학>에 추천 완료되어 시인으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반란하는 빛>(문학동네, 1970), <가장 어두운 날 저녁에>(문학사상사, 1983), <모순의 흙>(고려원, 1985), <무명연시(無名戀詩)>(전예원, 1986), <불타는 물>(1988), <사랑의 저쪽>(미학사, 1990), <신의 하늘에도 어둠은 있다>(미래사, 1991), <꽃들은 별을 우러르며 산다>(시화시학사, 1992), <어리석은 헤겔>(1994), <벼랑의 꿈>(시와시학사, 1999), <적멸의 불빛>(문학사상사, 2001), <시간의 쪽배>(민음사, 2005), <문 열어라 하늘아>(서정시학, 2006), <밤 하늘의 바둑판>(서정시학, 2011), <별 밭의 파도 소리>(천년의 시작, 2013), <가을 빗소리>(천년의 시작, 2016) 등이 있습니다. 시인의 시집 <밤 하늘의 바둑판>은 영문판(Night-sky checkerboard)으로 번역되었는데, 2016년 미국의 문예지 <Chicago Review of Books>가 선정한 ‘올해의 시집’ 12권 중 한 권에 선정되기도 하였습니다. 산문집으로 <곡선은 직선보다 아름답다>(푸른 사상, 2022)가 있습니다. 모더니즘에 심취해 있던 초기 시에서는 감각적인 언어 의식과 날카로운 직관으로 기교적이며 실험정신이 두드러지는 시들을 발표했다면, 점점 인간 존재의 실존적 고뇌를 서정적·철학적으로 노래하는 시를 써 왔습니다.
민족 정서와 세계정신의 보편성이 녹아 있는 작품들이 높이 평가되어, 한국시인협회상(1983), 녹원문학상(평론부문, 1984), 소월시문학상(1986), 정지용문학상(1992), 편운문학상(평론부문, 1992), 공초문학상(1999), 만해문학상(2000), 불교문학상(2009), 목월문학상(2012) 등을 수상했습니다. 2006년 제35대 한국시인협회장에 추대되었으며, 2011년에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오늘 감상하는 시는 며칠 전 태풍이 한반도를 정면으로 관통한다고 온 나라가 어수선했을 때, ‘아침에 읽는 한 편의 시’를 구독하는 지인께서 답시(答詩) 형식으로 보내 준 시입니다. 이 시를 읽는 순간 꽤 오래전인 2006년, 울릉도 여행을 갔다가 아내와 성인봉을 올랐을 때의 추억이 갑자기 소환되었습니다.
그 당시, 2박 3일 일정으로 단체팀과 어울려 울릉도에 가면서, 마음속으로 ‘이번에 성인봉을 반드시 오르리라’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팀을 인도하는 가이더에게는 둘째 날 오전 자유 시간을 이용해서 성인봉을 다녀올 수 있는 허락도 받았습니다. 성인봉을 다녀오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2시간 먼저 일어나 숙소에서 준비해 주는 새벽밥을 먹은 후, 아직 사위가 캄캄할 때 출발해야 했고, 또 지체하면 시간 안에 하산할 수 없으므로 산행 들머리를 미리 확인, 낭비하는 시간을 최소화하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기상을 했더니 그 전날까지 잔잔했던 날씨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세찬 비바람이 불고 있었습니다. ‘사나이 한번 결심을 이 정도 비바람 때문에 포기할 수는 없지 않냐’는 마음으로, 산행 채비를 하고 숙소의 식당으로 내려갔더니, 그 전날 동행하기로 약속했던 한 쌍의 부부는 아예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같이 가보고 싶긴 하지만, 비가 오면 자기들은 포기할 것이라고 말했기에, 이런 궂은 날씨에 길을 나서지 않을 것은 뻔했습니다. 아내는 내심 남편이 포기해주길 바라는 눈치였지만, 결심하면 반드시 하고야 마는 내 성격을 알고 묵묵히 따라주었습니다. 아마도, 그 상황에서 아내가 ‘이번에는 여기서 멈추고, 다음 기회에 가자’고 한 마디라도 말했더라면, 못 이기는 척하고 그만 두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게 사실입니다.
‘자지러져 검푸르기까지 한 / 여름 산 짙은 녹음은 차라리 / 짐승의 무성한 털 갈기 같다. /태풍이 치는 밤, / 쩌렁쩌렁 우는 그 포효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가.’ 숙소를 나서 산행 들머리 지점으로 가기 위해 성인봉 쪽을 바라보니, 시인이 목격했던 섬뜩하면서도 털 갈기를 세우고 버티고 서 있는 검푸른 여름 산이 바로 그곳에 서 있었습니다. 그냥 서 있기만 한 게 아니라, 세차게 부는 바닷 바람에 나무들이 서로 몸을 부대끼면서 내는 소리가, 귀신 울음소리처럼 끼익~ 끼익~ 삐걱거리고 있어 금방이라도 머리카락이 곤두설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가끔씩 내리치는 번갯불 섬광에 산 전체가 빗속에 보이는 모습은, ‘씩씩대며 나를 노려보고 있는 그 / 맹수 한 마리.’가 영락없었습니다.
시인은 폭풍우와 천둥 번개 치는 여름 산의 모습이 ‘그 맹수가 온몸을 흠뻑 적신 채 대지에 웅크리고 있는 수컷 한 마리’같았다고 노래했지만, 그때는 제가 온몸을 긴장의 땀으로 흠뻑 적신 채 불안에 떨고 있는 애처롭고 불쌍한 짐승 처지였습니다. 바람에 나무들이 서로 몸을 비틀면서 내는 삐걱거리는 소리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무섭고 불안했지만 애써 감추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내가 앞서고 아내가 뒤를 따라오는 성인봉 산행길에서, ‘내가 흔들리면 안 된다’는 다짐을 수없이 했던 기억이 납니다. 계곡 몇 개를 지나 어느 정도 오르고 나니 드디어 날이 조금씩 밝아지면서 사방이 보이기 시작했고, 마음이 조금씩 안정되었습니다. 그제야 배낭 안에 넣어간 물도 한 모금 마실 수 있었고, 또 지금까지 마음속에 있었던 불안과 두려움 등의 감정을 나누면서 서로를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성인봉 정상까지 갈 수 있었냐구요? 네, 당연히 정상까지 올랐고 예정된 시간 안에 무사히 하산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를 정상까지 갈 수 있도록 했던 결정적인 요인은, 뒤따라 올라오는 다른 산행팀의 목소리였습니다. 얼마나 반갑던지요! 궂은 날씨였지만, 그 팀도 포기하지 않고 성인봉 산행을 강행했던 것입니다. 섬뜩한 여름 산만 있었던 게 아니라, 그곳에는 같은 방향으로, 같은 길을 오르는 ‘도반’들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아쉬운 건, 당시 울릉도 여행기와 성인봉 산행기를 사진을 곁들여 제가 속한 어느 동창회 홈페이지에 그날 그날 일기 쓰듯이 썼지만, 그 사이트가 아예 없어지는 바람에 다시는 읽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때 울릉도 여행의 흔적은 다녀왔다는 내용의 짧은 글
(https://jamesbae50.tistory.com/7366849) 하나만 달랑 남아 있을 뿐입니다
한때는, 한국의 현대 시 100선 중에 오세영 시인의 작품이 네티즌 투표에서 1위를 했기 때문에 수준 미달의 시를 너도나도 ‘오세영’이라는 이름을 붙여 유통(?)하는 바람에 유명세를 톡톡히 차르야 했던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무 글이나 써 놓고 ‘오세영’이라는 이름을 붙이면 시로 통한다는 잘못된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에는 오세영 시인의 시라고 버젓이 소개되는 가짜 시들이 많다고 합니다.
무슨 두려움이 있었을까? 시인은 비바람 천둥 번개에 휩싸인 여름 산을 보면서 한 마리 굶주린 맹수를 떠올렸나 봅니다. 솔직한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20년 전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울릉도 성인봉을 올랐던 추억을 새삼 떠올릴 수 있었던 것도 참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2008년 <울릉문학> 창간호 발간 축하 행사에서 낭독되었던, 당시 한국시인협회장이었던 오 시인의 ‘울릉도’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을 더 읽으면서 글을 맺습니다. - 석전(碩田)
울릉도(鬱陵島)
- 오세영
밝음을 지향하는 마음이
얼마나 간절했으면
빛을 좇아 이렇듯 멀리 동으로 동으로
내달았을까.
밝음을 사랑하는 마음이 또
얼마나 애틋했으면
청정한 해류 따라 이렇듯 먼 대양에
이르렀을까.
그 순정한 사념(思念)
변함없이 받들기 위해서
뜻은 한가지로 높은 데 둘지니
너를 만나기 위함이라면
동해 거친 격랑에 몸을 맡겨
세상의 그 오욕칠정(五欲七情)을 모두 비워야 비로소
가능하구나.
신(神)이 이 지상에 떨어뜨린 한 알의 진주처럼
국토의 순결한 막냇누이여..
울릉도여.
- <울릉 문학>(창간호 축시, 20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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